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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주의자가 뱉는 험담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이조 이전에 조선 사람의 붓으로 쓴 기자의 사실은, 삼국유사에 “단군이 기자를 피하여”의 열 몇 자와 삼국사기에 “기자는 주 왕실에서 봉함을 받다”라는 일곱 자가 있으나, 이는 사기에 적힌 것을 뽑아 기록한 것이다.

- 신채호의 “조선사 연구” 중에서 -

펀더멘털(fundamental)은 논리나 윤리에서 기본 원리를 지칭하는 것으로써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사회가 이 펀더멘털이 무시되고 허물어지고 있어서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그런데 근본주의(fundamentalism)는 일종의 극단주의로서 경계의 대상이 된다. 여기에 따르는 무리들은 파당을 짓고 기존세력과 갈등을 부른다. 때로는 신념 때문에 살상도 서슴지 않는다.

가령 담론(談論)의 스펙트럼에서 극좌와 극우가 양극이라 하자. 이때 극좌에서 보면 중도는 물론 범좌까지도 우파로 보인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기를 중심으로 그 밖의 모두는 좌표상 우파가 된다(물론 그 역 논리도 가능). 극단주의자들은 한쪽 어두운 곳에서 세상을 내다보는 까닭에 그들이 내뱉는 주장이 선명하다. 비판 위주로 과거청산까지 뻗어나가게 마련이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89)과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시대는 약간 차이나지만, 각각 예학(禮學)과 실학(實學)을 대표하는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주로 우암은 권세자로서, 다산은 유배자로서 승패가 갈렸지만 사후의 평가는 다르게 보는 것이 보통이다. 즉 우암은 역사상 가장 논란이 많은 대상으로, 반대로 다산은 존경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

우암은 화양리에 모화주의 성지로서 만동묘(萬東廟)를 세우고, 말년에는 아예 중국의 관복을 입고 다녔다. 그러나 이것은 조선개국 이후 이방원, 하륜, 최만리, 조광조 등 일관된 풍조였다. 그리고 다산이 쓴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제1장 첫마디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조선(朝鮮)이란 이름은 평양(平壤)에서 생겼는데, 실은 기자(箕子)가 도읍한 본거지를 말한다.”

650년 신라에서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면서 사대주의가 시작되었다. 이후부터 통일신라,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천년 넘게 중국의 연호는 한반도의 국시(國是)처럼 되어버렸다. 기원전 5세기경부터 한자로 서술한 우리의 사서는 자연스럽게 해동사관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최초의 정사로 평가되는 삼국사기는 물론 이와 쌍벽을 이루는 삼국유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夷)는 본래 중국인이 동방의 활 잘 쏘는(大+弓=夷) 우리 민족을 지칭하던 말이다. 그런데 공자가 춘추(春秋)에서 동이(東夷)를 서융(西戎)과 나란히 사용한 이래로 우리는 야만족이 되어버렸다. 동방예의지국을 자처하는 소중화(小中華)는 굴종이 아니라 오랑캐 색채를 지우는 처방이었다. 따라서 대륙의 춘추필법(春秋筆法)은 하나의 긍지였다. 율곡도 비켜갈 수 없었다.

“은태사(殷太師)여, 새 나라를 창건하여 낙랑 땅에 도읍했네. 아침나라 긴긴밤에 팔조금법(八條禁法) 설정하고 예의교화 밝혔도다. 대동강 태백산에 서기마저 영롱하니 자자손손 계승하여 천세만세 만만세라.” 율곡의 기자실기(箕子實記)에서 뽑은 것이다. 그러나 BC 1122년의 기자조선은 단군조선의 일부 변방이었고, BC 323년에 이르러 그의 후손이 왕이라 칭했다고 본다.

기자는 생몰연도가 불확실하지만, 은(殷)-주(周) 교체기의 현자(賢者)였던 것 같다. 그는 역성혁명으로 새 나라를 세운 무왕(武王 재위 BC 1134-16)의 제의를 사양하고, 유민들과 함께 경계가 역동적이었던 당시의 조선 땅으로 옮겨 기거했다. 한편 무왕은 과거 옥에서 불굴의 정신으로 주역(周易)을 완성한 부친을 문왕으로 추대했으며, 문왕은 태임(太任) 부인의 아들이었다.

신인선(申仁善 1504-51)의 호 사임당(師任堂)은 인류 최초로 태교(胎敎)를 실행했다는 태임을 본받아 지은 것으로 이해되고 있었다. 이것도 국수주의자들은 율곡의 “기자칭송”과 같은 맥락으로 반민족적 행위로 성토할 수 있다. 더구나 태임이 낳은 아들이 국가에 대하여 반역을 일으켰고, 마침내 손자 대에서 성취했던 것이다. 이렇듯 사임당은 용꿈 꾸고 율곡을 낳았다.

파주에는 자운서원(紫雲書院)과 함께 율곡기념관 및 율곡 일가의 묘지가 있다. 그런데 서출이지만 그의 맏아들 이경임의 묘가 맨 앞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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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2006-11-30 10:37:53
잘 배우고 갑니다^^

리포미스트 2006-11-30 10:48:53
신사임당--율곡-이경임. 이 계보는 과거사람들이지만 실상
미래 사람인 것처럼 통속적 기존의 펀더멘탈을 뛰어 넘는 사상으로
시대를 꿰뚫는 그야말로 산 지식인이었다.

현 우리시대엔 이런 살아 꿈틀거리는 산지식은 정녕 볼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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