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 왕 카루베의 대역죄는 아직도 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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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굴 왕 카루베의 대역죄는 아직도 불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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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기와 4점 반납은 구우일모(九牛一毛)

 
   
  ▲ 카루베 지온백제유물 도굴왕  
 

충남 공주 송산리6호분의 도굴꾼인 카루베 지온

송산리 6호분만이 아니라 남혈사(南穴寺)란 절 터 굴속에서 길이 7촌 정도의 보살입상도 도굴하여 일본으로 빼돌린 교육자를 빙자한 백제고분 전문 도굴꾼.

가루비(갈비)인지, 카루베인지 하여튼 카루베 지온(輕部慈恩·1897~ 1970)은 일제시대 공주에서 교편을 잡은 교육자인 동시에 ‘백제 유물 약탈자’다. 일제시대 가장 많은 백제 유물을 훔쳐간 자로 ‘도굴왕(盜掘王)’이란 칭호가 어울릴 것이다.

28일 조선일보 인터넷 판 뉴스에 의하면, 그가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백제연화문 기와 유물 4점이 돌아온다고 한다. “국립공주박물관(관장 신창수)은 27일 ‘가루베의 유족이 ‘아버지가 남긴 한국 유물은 이게 다’라며 백제 기와 4점을 돌려주기로 했다”고 한다. 연꽃무늬 기와는 완형 2점과 깨진 것 2점(서기 6~7세기)이며, 기증식은 29일 공주박물관에서 열릴 예정이라 한다.

송산리 고분군도 카루베 조사 당시 30기의 고분이 당당히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호랑이가 먹이를 노리듯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카루베는 마침내 1933년에 송산리 고분군에도 마수를 뻗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마수로부터 각기 돌방무덤과 벽돌무덤으로 밝혀진 송산리 제5, 6호분이 난도질을 당하고야말았다.

오호통재라!

어찌 한낱 일본 도굴꾼에게 우리의 역사적 유물이 손때를 탔다는 말인가? 마치 오랫동안 정조를 지켜오던 숫처녀가 시정잡배 같은 무뢰한으로부터 강간을 당한 것처럼 파헤침을 당한 송산리 5호, 6호분의 주인공들은 억울함과 함께 못난 후손들을 질책하며 한탄을 했으리라!

특히 무령왕릉과 비슷한 구조의 6호분은 사마왕의 첫 번째 부인이거나 동성왕릉, 또는 성왕릉으로 추정되는데 그 어떠한 유물에 관한 정보 하나 없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더냐?

필자의 추정으로는 무령왕의 첫 번째 대부인(왕비)의 능일 가능성이 제일 크다고 본다. 왜냐하면, 송산리 6호분 출토 벽돌 중에 양관와위사의(梁官瓦爲師矣)라는 문구가 있어 입증된다. 이 내용은 ‘양나라의 관청(궁궐)용 기와를 모델로 하여 만들었다.’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문양의 벽돌로 무령왕릉 조성 때에도 사용된 것이 있었으니, 출토 벽돌 중에 ‘□□사 임진년작(□□士 壬辰年作)’이란 문구가 들어 있어 알 수 있다. 임진년은 서기 512년이다. 두 빈칸은 ‘와박(瓦博)’으로 추정되니, 와박사(기와 찍는 장인)가 임진년(서기 512)에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풀이된다. 그럼으로 사마대왕 첫 번째 대부인의 무덤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무령왕이 양나라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있어 더욱 그렇다.

동성왕의 능이라면 512년이 아니라, 501년 ‘신미년’이나 502년 ‘임오년’ 명(銘) 벽돌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아울러 성왕은 관산성(충북 옥천) 싸움에서 신라에 패한 후 그 머리는 멀리 경주의 왕궁 계단 밑에 묻히는 치욕을 당했으며, 남은 시신은 효자로 알려진 위덕왕이 불교에 귀의, 누이와 함께 부왕을 위해 사찰까지 건립했던 것으로 봐 부여 능산리 고분 쪽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송산리6호 고분은 백제 고분으로는 매우 드물게 네 벽면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으며, 무엇보다 그 구조가 무령왕릉과 아주 흡사하다. 벽돌을 구워서 만든 무덤임이 카루베 조사 때 이미 밝혀졌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미안했던지 카루베는 후일 송산리6호분을 발굴하고 보니, 이미 도굴된 상태였다고 발뺌하고 있었다.

하여튼 강경여고 선생을 하다가 일제가 패망하고 난 이듬해 카루베는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수많은 국보급 백제 유물을 일본으로 빼돌린 채......,

그러나 역사는 악인에게 두 번 다시 기회를 주지 않았다. 송산리에서 무령왕릉이 우연찮게 발견된 1971년을 1년 여 앞둔 시점에서 도굴꾼 카루베는 그 질긴 인생에 종지부를 찍듯 요단강을 건너가 버렸다. 향년 73세. 우리 나이로는 74세인 문화재 전문도굴꾼은 한줌의 재가 되어 영원히 잠들었다. 만일 그가 살아서 무령왕릉 발굴 소식을 들었다면......,

땅이 꺼지는 탄식소리와 함께 무엇이라 말했을지 매우 궁금하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준다. 죽은 무령왕은 죽은 제갈공명이 산 중달을 이겼듯이 고대 동아시아의 대제였던 그분을 찾아 송산리 온 산을 헤매던 카루베란 전문 도굴꾼의 마수에서 벗어나 결국 카루베를 사망에 이르게 한 강력한 펀치를 날린 다음에야 이 세상에 그 빛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당시 제국주의 일본인 도굴꾼 카루베는 딱 한 번 크나큰 실수를 하였다. 즉 송산리 6호분이 무령왕 무덤이라 생각하고 그 밑 구릉에 대해서는 오판을 하는 기염을 토한 것이다. 전문 도굴꾼이 놓친 일생일대의 대실수였다. 이는 풍수지리를 어느 정도 익히고 있던 교사이자, 일본인 도굴꾼에 불과했던 카루베의 지나친 자가당착이었지만,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다.

그나마 무령왕릉이 그의 마수를 벗어나 우리에게 그 위용을 드러낸 것은 천우신조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만일 그 때 카루베가 무령왕릉을 발굴했다면? 과연 그는 그 진실을 밝혔을까? 만일 무령왕릉이 전문 도굴꾼인 카루베에 의해 도굴되었다면?

솔직히 오금이 저리고 손발에 땀이 날 정도다. 아마도 무덤 안에서 나온 금관과 환두대도와 구리거울은 물론이고 수많은 보물들을 고가에 팔아넘기기에 급급했을 것이요, 그가 양심에 가책을 느껴 무령왕 지석을 밝히려했을지라도 이번에는 총독부에서 철저히 가로막았거나 송산리6호분처럼 역사의 영원한 미스터리로 만들었거나 무령왕의 지석조차 없앴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 무령왕은 죽어서도 후손들을 위해 왜구들의 노략질로부터 모든 기를 발산하여 도적질을 막아냈다고 생각한다.

만일 송산리6호분도 일제시대에 발견되지 않고 우리 손에 발굴되었다면 아마도 무령왕의 첫 번째 왕비릉으로 제 모습을 보여줬을 것이다. 초라하게 카루베 자손이 보낸 백제시대의 4장의 연화문 기와가 아닌 찬란한 무령왕비의 본래 모습으로 무령왕릉과 함께 백제의 웅진시대 모습을 제대로 알려줬을 텐데,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이제라도 카루베 후손들은 카루베가 행한 송산리 고분군 도굴에 대해 진정으로 사과하고 그 전모를 밝혀줘야 한다. 아울러 훔쳐간 유물 전량을 원래의 위치인 공주시에 반납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송산리 고분군의 주인들은 물론 무령왕과 백제인들의 저주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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