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의 비감 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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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산의 비감 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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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평등을 외치다 죽은 반골 문학가 교산

 
   
  ^^^▲ 교산 허균의 생가터^^^  
 

쉰 살이 되기 전까지 나는 참으로 한 마리 개였다. 그러므로 앞의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나 역시 따라 짖을 뿐이었다.

- 이탁오의 “속분서(續焚書)” 중에서 -

교산 허균(蛟山 許筠 1569-1618)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문소설 홍길동전(洪吉童傳)의 저자로 유명하다. 공문서를 작성할 때 성명 칸에 예시로 적혀있는 “홍길동”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이라면 소설의 줄거리를 대충 알고 있다. 작품 속에 나오는 홍길동은 부친은 양반, 모친은 천비로서 전형적인 서출(庶出) 출신이다. 애매한 사회계급이었다.

교산은 홍길동과 달리 서출이 아니다. 부친 허엽은 화담학파 서경덕의 수제자였으며, 생모는 비록 재취 댁이었지만 분명 정실이었다. 교산은 3남3녀 중의 막내였고, 특히 같은 어머니에서 난 형 허봉(18세 연상)은 그에게 학문의 스승이었다. 또 누나 허난설헌(5세 연상)과 함께 세분 모두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 그러나 허봉은 38세로, 허난설헌은 27세로 아깝게 요절했다.

난설헌의 죽음은 동생에게 큰 아픔과 슬픔을 마음 속 깊이 남겼다. 교산의 훼벽사(毁壁辭)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 누이는 현숙하고 문장이 있었으나, 그 시어머니에게 잘못 보이고 또 두 아들을 잃은 뒤 드디어 한을 품고 죽었다. 그를 생각할 때마다 저려오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다." 아마도 평생토록 비감(悲感)으로 새겨졌던 것 같다. 여기에 반골의 실마리가 있었다.

소설 홍길동전은 현실부정과 이상건설의 두 축으로 구성되어 있다. 길동이 가출하여 활빈당(活貧黨) 중심의 의적생활이 그 전반부요, 이후 해외로 진출하여 율도국(硉島國)이란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이 이어진 후반부이다. 그런데 이 두 부분의 경계가 뚜렷해서 마치 별개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래서 후대에서 엮은 재구성(re-make)은 대부분 후반을 부록처럼 처리한다.

실제로 교산의 창작동기에는 활빈당과 율도국으로 명칭된 두 개의 모델이 따로 존재한 듯 하다. 즉 활빈당은 조선 초기 현실의 부조리에 항거했던 홍길동에 대한 찬양이며, 율도국은 모순된 현실너머로 선계(仙界)를 꿈꾸었던 누이 허난설헌에 대한 추모이다. 그러나 교산의 입장은 장원급제와 당상관으로, 또 풍류를 즐기는 플레이보이로서 현실을 개혁할 필요가 없었다.

작가 허균은 임진왜란을 직접 체험했다. 황폐해진 산하 속에서 그는 아내와 아들까지 잃는 아픔을 맛보아야했다. 그러나 양반 집권층은 늑대의 탈을 쓰고 수탈을 일삼았고, 따라서 농촌은 피폐하고 도둑이 횡행했다. 중세적 질서가 해체되기 시작하고, 자유와 평등의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다. 홍길동전은 이러한 상황에서 백성의 편에서 민중이 당하는 아픔을 어루만지고 있다.

당대 사회의 부조리인 적서차별 철폐, 탐관오리 응징을 고발한 것도 천재만의 용기지만, 교산의 위대성은 오히려 주체성에 있다. 홍길동전은 바로 우리나라를 무대로 삼고, 한글로 표기하여 서민들에게 읽을거리를 제공했다. 만연했던 모화주의(慕華主義)로부터 탈피를 반짝이며 보여준 것이다. 사회구조의 모순타파와 함께 한반도 울타리를 넘어선 이상향을 제시한 것이다.

전라남도 장성군에서는 매년 어린이날을 전후하여 홍길동 생가 터에서 추모행사를 펼친다고 한다. 이때 홍길동이 실존인물임을 증명하는 각종 역사적 고증자료와 율도국 관련 자료를 전시한다. 일본 오키나와에는 놀랍게도 홍씨 성을 가진 장군이 통치했다는 역사적 자료와 유물이 일부 남아있다고 한다. 그러나 율도국이 정말 오키나와였는지는 좀더 연구할 과제라고 본다.

교산은 결국 혁명을 주도하다 50세의 일기로 능지처참되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동안 기생문제, 불교심취, 시관부정 등의 이유로 몇 차례 탄핵을 받아 파직됐으며, 때로는 유배까지 당했다. 그는 틈틈이 전라북도 변산 우반동(邊山 愚磻洞)을 찾았다. 변산은 신선이 산다는 봉래산(蓬萊山)과 같다고 알려져 있었다. 여기서 홍길동의 고향 장성까지는 거리상으로 멀지 않다.

파란만장하지만 교산의 생애에서 여러 번의 서행(西行)한 경력이 눈에 띈다. 중국통의 국제적 인물로서 그의 문장력이 높이 평가된 것이다. 중국에서 조선을 돌이켜보면 무엇을 개혁할 것인지 더 잘 보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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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플 2006-11-17 11:30:35
만일 "홍길동"이를 외교부 장관에 임명한다면?

나부시 2006-11-17 11:31:55
아마 부시가 아그레망을 거절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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