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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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의 현장을 찾아서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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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과 일란성 쌍둥이가 대한민국!

 
   
  ▲ 광주사태  
 

나는 이들의 기습공격이 걱정되어 300명의 진압군이 나주대대에 투입 되었다며 거짓 정보를 흘려주었다. 무장 시위대의 읍내 점거에따라 공포와 불안속에 떨고있는 주민들을 안정시키려는 이유였다는 말에 대대장은 궁금증이 풀리듯 향후 대처할 방법들을 의논했다.

"3백명 진압군 공수"라는 헛소문을 퍼트린지 2시간쯤, 해질무렵에 예상밖의 일이 벌어졌다. 진압군 공수소식으로 무장차량 10여대가 광목간 도로 천주교앞으로 집결 했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허위정보를 흘려준 실책에 당황, 이들의 공격으로 인해 60여명의 희생이 생긴다는 최악의 사태를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다.

시민군을 자처한 폭도들이 부대점거를 위해 "특공대와 기동타격조"까지 결성했다는 소식을 듣고부터 진압군 공수설을 퍼트린 나는 심한 죄책감에 전신에 경련을 일으켰다. 정소령이 냉수 한컵을 권하며 "형님 잘못이 아니요, 부대를 사수하기 위한 방법이니 자책하지 마시오" 위로해 준다.

22일 오후 5시, 내무과장으로 부터 뜻밖의 연락이 왔다. 계엄군 공수소식을 듣고 뜻있는 읍민들이 시위대를 설득하겠다며 수습대책에 나섰다는 반가운 소식을 전한다. 그리고 이들과 협상을 하면 진압군의 읍내진입을 유보해 달라는 제안과 함께 무기를 자진 반납한 시민군에게는 신변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이들을 설득하겠다고 한다.

대대장이 흐뭇한 표정으로 " 주민대표들이 부대에 올 경우 3백명 병력의 거짓이 들통나지 않겠오"라며 걱정을 한다. 나는 60명의 병력을 3백명으로 보이도록 위장하면 된다고 자신있게 말햇다. 우선 월남전에서 흔히 쓰는 위장술과 심리전을 병행하기로 했다.

22일 어느덧 부대 서편 산등성이에 걸쳐있다. 오늘밤을 지새면 내일은 부대를 방문하기위해주민대표들이 찾아온다. 주민들이 앞장서 준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 부대에온지 3일만에 가장 편안한 밤이 되고 오늘밤은 마지막 월남전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역속했다. 20대 후반의 두중위가 초등학교 시절 월남에 있는 국군장병 아저씨께 위문편지 쓰던 기억이 새롭다며 이야기를 재촉한다.

나는 김치작전에이어 2.4종 보급품인 정글복과 정글화의 국산화 조변작전의 비화를 꺼냈다."김치작전"실시 이후 두달만에 사이공 주월사령부로부터 "녹색작전"2호로 시달된 군수2호 명령서는 각본에 따라 연출되고 이번 작전에는기상천외한 "펜 티 차림에 완전무장 집결"이다.

팬티차림에 방탄 조끼를 입고 수류탄을 매달고 완전무장을 한 병사들이 부대주변정글 8부 능선의 탈환작전은 실전을 방불케 한 작전인 만큼 공중헬기의 기관총사격과 지상의 기관총사격이 퍼붓는 만큼 낮은 포복이 필수적이다.

(공포탄) 팬티바람으로 작전에 참가한 병사들은 무릅과 팔목에서 흐르는 피도 아랑곳없이 고지를 향해 낮은 포복을 계속해야했다. 실전을 능가하는 작전으로 우리들은 가시 덩쿨에 팔과 무릅이 피투성이가 되고 공중과 지상에선 정훈병이 분주하게 16미리 영사용 카메라가 움직인다.

다음날 어김없이 만들어진 차트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주월 한국군은 4계절이 뚜렷한 동양인의 체질로서 열대 고온의 정글 전에서 미군이 지급하는 정글전투복이 동양인의 체형과 체질에 맞지 않아 각종 피부병을 일으켜 급기야 정글복 을 버리고 맨몸으로 작전에 임하는 부대가 곳곳에서 발생하고있다는 전투상황들이 사진자료와 함께 만들어 졌다

브리핑 내용을 본 주월 미국방부 군사고문관은 "no..n0..노. 노".를 연발하고 종군기자들에게 이 사실을 감추려고 안절부절 했다. 당시는 미국전역에서 벌어진 반전단체의 월남파병 반대열기가 빗발치던 때라서 한국군의 팬티차림 작전이 언론에 알려질 경우 국제적인 망신을 당할게 뻔한데 바로 목전에서 "한국군 팬티바람 작전"의 황당 함을 군사고문관이 직접 목격한 셈이다.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참전용사들이 벗어 던졌던 미제 정글복과 정글화 는 미국이 월남전의 열대 지역의 작전에 사용하려고 특별히 제작한 보급품이다. 정글복은 땀의 흡수처리가 뛰어나고 정글화는 오랜 시간 늪지대 에서 신발을 벗지 않고도 견딜 수 있는 특별한 제품인데 우리들은 최상의 보급품을 내던지고 최하의 국산보급품을 선택했던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과 국산화 꿈을 이룬 십자성부대 100군수사령관 이 범준 장군의 애국심을 잊지 않았다.

월남전을 통해 참전용사들은 단 한푼의 달러가 얻기위해 쇠붙이 한 조각이라도 고국으로 보내고 전쟁비용을 아껴 조국으로 보내는것을 최대의 자랑으로 여겼다.그 특명작전의 명칭은 바로 "모든 전쟁장비를 국산화하라!" 였다.

특명작전의 성과로 모든 2.4종 보급품이 국산화가 된 후 한국군에게 지급되는 런닝. 팬티, 정글복,정글화 들은 무더위 속에 흐르는 땀들로 얼룩 저 지급 된지 하룻 만에 찢겨지기도 했지만 조국에서 만든 옷, 우리 부모형제의 손길과 체취를 느끼면서 아무런 불평 한마디 없이 찢겨진 국산 정글복을 입고 전투를 했다.

벽시계가 새벽 3시를 알리자 김중위가 월남전에서 한국군의 피해가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 그리고 베트공 과 현지 주민들의 식별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다며 나를 쳐다본다. 나는 김중위의 궁금증을 덜어주기 위해 월남전의 배경과 그 나라 국민성을 현지에서 느낀 대로 털어놓았다.

1966년 11월 월남의 5대 휴양도시로 알려진 항구도시 나트랑 에서 북쪽 8키로 쯤 떨어진 정글 평야지대에 주둔한 우리부대는 새벽 기상 나팔소리와 함께 기동 타격대 병력이 사령부 정문 쪽으로 비상 출동되었다

부대정문 초소에 이르자 월남현지 주민들과 학생들이 몰려와 피겟 과 현수막을 흔들며 "따이한 물러가라! 따이한 고 홈"을 외치며 시위를 하고있었다. 시위대의 요구는 월남경찰을 폭행한 한국군을 내놓으라는 항의 데모다. 이어 사령부 소속 26 헌병대가 출동하고, 258 병참보급소 이 상병이 긴급 연행되어 영창에 구금되었다.

이 상병은 전날 보급품 수령으로 캄란 만 미군 보급기지 에서 보급품을 실 고 나트랑 시내로 들어서다 가벼운 교통사고를 냈고 부상 당한 월남인을 트럭에 태워 부대병원으로 후송 중 경찰의 제지를 받고 환자를 내려놓으라며 권총을 들이대는 월남경찰을 거부한체 환자를 부대병원까지 옮겨와 치료를 해 준게 사건의 전말이었다.

그들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이 상병은 월남 경찰에 넘겨지고 경찰에 넘겨진 이상병은 그들의 고문과 심한 폭행을 당한 체 이틀만에 부대로 되 돌아왔다.그런데도 이들은 부대로 넘겨진 이 상병을 본국으로 송환하라며 시위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월남의 자유를 위해 참전한 우리들을 향해 "한국군 물러가라! 따이한 고홈"을 외치다니? 더구나 교통사고 환자를 병원에 후송하려던 이 상병에게 고문과 폭행을 한 후 본국송환의 억지를 부리는 월남의 국민들! 당시 우리 한국군은 국위 선양과 십자군으로서 사령관의 특별지시를 지켜야만 했다.

"100명의 베트공 섬멸에 앞서 한사람의 양민을 보호하고 대민 지원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
그들의 요구대로 이 상병이 강제 송환되자 우리들은 울분을 삼키며 약소국가의 비애를 이역만리 월남 땅에서 절실히 느꼈다.

한국군 물러가라! 미군 물러가라! 시위와 데모행렬이 그칠 날 없는 월남이란 나라! 공산화 와 민주화의 갈림길에서 전쟁을 치루고있는 나라가 지금은 패망으로 미군과 한국군이 치룬 8년의 월남전이 결국 공산화되었다는 교훈을 남겼다.

한국군이 월남전에 파병되기 직전인 65년 당시 야당의 지도자 김대중 김영삼 두 김씨가 미국의 대리전쟁에 한국의 젊은이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보낼 수 없다며 연일 집권 여당인 공화당 정권을 성토하고 국회 파병 동의 안 철회를 요구하는 농성이 끝일사이 없는 때였다.

자식들을 전쟁터로 내 몰아야하는 파병반대의 원성은 심했지만 국가의 부름에 월남인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파병된 우리들에게 "한국군 물러가라" "따이한 고 홈" 을 외치는 이들의 모습과 탈취한 무기를 들고 부대를 공격하겠다는 시위대의 모습이 에서 우리나라가 월남과 똑같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느껴진다"며 김중위의 월남전 이야기에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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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독자 2006-11-12 22:04:17
화염병 1년 만에 재등장


작년 농민시위 이후 사라졌던 화염병이 1년 만에 재등장했다. 10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5.18 광주 희생자들의 시위에서다.
이날 5.18 광주민주화동지회 소속원들은 정당한 피해 보상과 보훈처장의 면담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 시위대 속의 한 남성이 맞은편 전경들을 향해 화염병을 던졌고, 전경들의 머리 위로 불길이 솟구쳤다. 전경 한 명이 화상을 입었다.

또 이날 시위 중이던 문모(56)씨가 자신의 몸에 시너를 붓고 불을 질러 얼굴 등에 화상을 입었다. 문씨의 몸에 붙은 불을 끄는 과정에서도, 현장을 지켜보던 영등포경찰서 소속 강모 경사가 시위대에 둘러싸여 각목 등을 구타당해 병원으로 옮겨졌다.

경찰은 시위대가 미리 30여개 물병에 시너를 담아와 현장에서 화염병을 직접 만들어 사용한 점에 주목, 관련자를 엄벌키로 하고 집회 참가자 45명을 연행했다.


조선닷컴 internews@chosun.com

입력 : 2006.11.11 09:1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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