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협 기자의 실크로드 기행[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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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간다라 미술의 보고寶庫 스왓드

'그리하여 법사法師는 일행과 재회하고 동남을 바라 산길을 나아가기 5 백여리, 간다라 국에 이르렀다. 이 나라의 동쪽은 신두강에 면하였고 도성은 불샤부라라 불렀다. 그 옆에 카니시카왕이 만든 스투바가 있다. 높이 4 백자, 터 주위 1리 반, 높이 1백50자, 그 위에 금동불사 25층이 서 있었으며 안에 여래如來의 사리舍利 1 과가 들어 있다.(혜립,언종의'현장법사' 중에서)

이 '불샤부라'라 이른 도시가 현재의 페샤왈이다. 페샤왈은 부처 탄생의 땅 간다라의 중심이었다. 간다라 지방이란 아프카니스탄의 국경으로부터 인더스강에 걸쳐 있는 광대한 범위를 말한다. 힌두쿠시 산맥을 넘어 펀잡 평원에 통하는 길 도중에 있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타 민족의 침입이 잇달았다.

기원전 4 세기 이전은 페르시아의 지배아래 있었던 이 땅도, 알렉산더 대왕의 동진東進으로 그리스의 식민지가 되었고 그리스 문화가 퍼졌다. 그 후에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세력아래 들어갔는데 이때 불교문화의 유입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의 분열을 일으켰다. 게다가 2 세기에는 쿠샨 왕조 '카니시카'왕이 이 땅에 군림하였다.

그리스 문화가 드높았던 이 곳에서 '카니시카'왕은 불교를 보호하고 육성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 문화와 불교문화가 어우러져 간다라 문화를 꽃 피웠다. 카니시카 가스겟이란, 20 세기 초 페샤왈 교외 샤지기데리에서 출토한 사리용기를 말한다. 간다라 미술의 기원을 엿 보는데 귀중한 자료로 되어 있다. 간다라 미술의 보고인 페샤왈 박물관에서의 관찰을 기록하는 사이에, 이러한 불상이 출토된 토지를 직접 보고 싶은 충동이 점점 강렬하게 솟아올랐다.

페샤왈의 북서 40 킬로미터 정도의 산지에 간다라의 전형적인 산악사원 터로 알려진 '다브티바하이'가 있다. 산정에는 탑이나 승방僧房이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석벽에 면한 사당을 보고 있노라니 수행 승의 독경소리가 들려오는 듯 싶었다. 어제 페샤왈 박물관에서 촬영한 '명상에 잠긴 불상'도 예전엔 이 일각에 앉아 있었을 것이다. 촬영을 위해 상공上空에서 내려다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드넓은 경사면에 남아 있는 자취가 손에 잡힐 듯 역력했다. 가장 번영을 누렸던 2~3 세기 무렵에는, 수백명이나 되는 승려들이 수행의 나날을 보냈다 한다. 때로는 중국의 구법 승이 머물다 갔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다음의 목적지, 예전 간다라 북쪽 중심지였던 스왓드 지방을 방문하기로 작정하였다. 그 곳은 지금도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평화로운 촌락이라는 말을 들어 온 터이다. 지프차는 느슨하게 휘~ 돌아 감돈 산길을 계속 올랐다. 도로의 폭은 넓어, 카라코룸 하이웨이 처럼 낭떠러지로 떨어질 듯한 위험은 없다.

창밖엔 보슬비가 내리고, 구름바다가 가까운 산 사이를 누비며 차가 달린다. 알맞은 리듬으로 흔들리는 차에 잠깐 몸을 맡기고 있는 사이에, 잠시 전 통과한 도로가 멀리 뒤편 산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저 쪽에 알렉산더의 군대가 캠프를 쳤었지요. 그 때는 전차도 트럭도 없었기 때문에, 상관은 말로, 병대는 걷느라고 잠깐의 이동도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알렉산더 군軍은 아프카니스탄에서 페샤왈 평야까지 속전속결 반년만에 공략해 허물어뜨렸으니까 대단한 것어었지요.'

운전수 '아그발' 씨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역사에 흥미를 가진 듯 하였고 '역사기행'이라고 이름 붙인 투어Tour를 기획하고 있는 만큼 박식하게 해설도 잘 했다. 스왓드의 중심, '사이드샤리프' 까지 앞으로 15 킬로라는 이정표를 지나자, 잠시 전만 해도 주절거리던 보슬비가 그치고 안개도 개었다. 그리하여 잠시 뒤 필자는 스왓드 박물관장 '나질아프 메드칸' 박사와 만났다.

그는 파키스탄 고고학계의 중진으로 신처럼 숭앙 받는 존재인 '대니'박사의 제자 중 한 사람이다. 외국의 조사대와 더불어 스왓드의 불교 유적조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몸체가 크진 않으나 단정한 메너로 눈빛이 예리하다. 정장을 싫어하는지, 복장도 민속 복, 맨발에 파단의 샌달을 신은 채, 한 사람 한 사람씩 정중히 악수하였다.

바지라의 성

'먼저 알렉산더 부터 가 볼까요?' 관장이 운전하는 한국 산 새 차가 필자를 선도하였다. 낮은 산등성이가 이어졌고 그 산록에 전원지대가 널리 자리잡고 있었다. 차는 그 전원지대를 관동하는 한 가닥 포장도로를 쾌조로 달렸다. 가끔 지나가는 트럭 외에 마주 오는 차는 전혀 볼 수 없었다.

당나귀 등에 마른풀을 잔뜩 지워 나르는 눈이 둥그런 소년, 여남은 마리의 물소를 이동시키는 땅달보 아저씨, 머리에 이제 막 베어 낸 풀을 이고 가는 여인들, 이 도로에는 이런 사람들이 잘 어울려 보였다. '바리곳드'라는 마을에 접어들자, 왼편으로 작은 바위산이 들어온다. 도로에서 5백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그다지 색다른 데가 없는 산이다.

'자~ 올라가시죠.' 관장은 필자를 재촉, 잰 걸음으로 보리 밭 사잇 길을 바윗 산쪽으로 걷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눈대중으로도 대략 1백 5십미터 정도의 산이었다.

'이 정도의 산쯤, 아무것도 아니지요. 자~, 갑시다' 산책하는 기분으로 오르기 시작하는 필자의 뒤로 운전수들은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은 채 배웅하고 있었다.

운전하느라 피곤해서겠지 싶어 별반 이상할 것 없다는 생각에 필자는 그들에게 손을 흔들며 길을 나아갔다. 그런데 윈걸, 보리 밭 길이 뚝~ 끊긴 곳에서 무드가 일변하였다. 운전수들이 따라나서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바위산의 산록은 멀리서 볼 때는 알지 못하였으나 직경 50~80센치 정도의 큰 울퉁불퉁한 돌 바닥이었다.

돌 끝은 날카롭고 예리하여 등산화의 밑바닥을 금방이라도 일그려뜨릴 것만 같았다. 걷기가 여간만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카메라와 삼각대를 쥐고, 주의 깊게 올라와 보니 고작 20 미터를 나아가는데 10 여분이나 걸렸다. 원망스럽게도 관장은 이미 바위 산 중턱 커다란 바위에 허리를 기댄 채 담배를 피워 물고 있는 것이 아닌가!

가까스로 뒤 따라 오는 필자에게 '어떻습니까? 좋은 운동이지요? 한국에 돌아가서도 좋은 추억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 풀은 안쪽 하얀 면을 먹습니다. 제법이지요.'

완전히 피크닉 기분으로 쉬고 있는 그 모양이라니~ 바위산 이라지만 이것이 또한 수직에 가까운 단애다. 필자를 기다리고 있던 관장도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비단 샌달을 신은 채 술럴술렁 흡사 산 원숭이처럼 정상을 향해 걸어간다. 필자는 한 시간이나 걸려서야 겨우 정상에 도달하였다.

'와~! 대단하구나! 이거야말로 장관이다 일대 파노라마일세!'
절로 탄성이 터진다. 눈앞에 웅대한 경치가 전개되었다. 스왓드의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멀리 앞쪽으로 힌두쿠시 산맥이 눈을 이고 뻗어 있다. 그 산맥의 자락에서 한 가닥의 물줄기가 차츰 강을 이루고 있다. 스왓드 강이다. 양쪽은 드넓은 평야다. 녹음 우거진 대 분지, 이것이 스왓드인 것이다.

'박선생, 지금 우리들이 서 있는 이 산이 알렉산더 대왕이 공격했던 성으로 유명한 바지라의 성입니다.' 한쪽 절벽이 급류의 스왓드 강에 면하여, 산 전체가 오르기 힘든 바위일 뿐만 아니라 정상 부근에 널따란 경작지까지 있는 바지라 성은 천연 요새였음에 틀림없다.

기원전 327 년, 알렉산더는 아프카니스탄으로 부터 간다라 평야를 목표로 진군을 개시하였다. 도중 산악지대에서는 선두에서 지휘하던 알렉산더 자신은 물론, 프톨레마이오스, 레오나두스라는 중신이 부상하는 고전을 겪기도 했다. 추위를 피한 한 여름의 전투에서조차 복잡한 지형지물과 용맹무쌍한 산악민족의 저항기질에 정복이 용이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동쪽을 향한 알렉산더에게 있어서 이곳은 기필코 돌파하지 않으면 안될 관문이었다. 끝까지 저항자세를 무너뜨리려 하지 않았던 산악 민, 그리하여 역사상 유명한 피의 대학살이 벌어졌던 것이다. 최대의 전투 '마사다의 공방전'에서 실로 7천명이 넘는 산악민족이 무참하게 살해되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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