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로 등극한 백제 무령왕
스크롤 이동 상태바
쿠데타로 등극한 백제 무령왕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어느 시대고 폭군은 쫓겨난다는 진리

 
   
  ▲ 우전팔번경(隅田八幡鏡)무령왕이 계체에게 하사한 구리거울
ⓒ 장팔현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여! 총궐기하라!

애국애족의 군사들은 상하 지위를 막론하고 적군에 나라를 바치려는 부당하고 무능한 이적 통치자에 대하여 불쌍한 백성 편에 서서 당장 나라를 구하라! 국방의 최 일선에 선 군대야말로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지켜줄 마지막 보루이다. 어서 피골이 상접해질대로 빈사상태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라!

신하들은 일신의 영달을 위해 어리석은 군주에 아첨과 교언영색 한 언어로 아부하지 말 것이며, 일치단결하여 잘못된 정치를 일삼는 통치자를 즉각 내쫓아야 할 것이다. 그 길만이 조국 백제를 구하는 길이다.

무도한 통치자가 뭇 백성들의 머리 꼭대기에 앉아 군림하면 그가 아무리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닌 것이다. 그러한 통치자는 이미 인간의 피를 즐기는 드라큘라이자, 짐승인 것이다. 때문에 백성들은 들고 일어나 그 짐승을 처치해야하는 것이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측근인 신하들이 먼저 공공의 적이자 공분을 일으키는 무능한 통치자를 제거하는 것이다.

사마왕자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백가와 금주리를 매개로 하여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동성왕의 난폭한 정치를 훤히 알 수 있었다. 멀리 왜국에서 후왕에 지나지 않는 왜왕무로 있으면서도 본국 백제에서 일어나는 일거수 일투족에 대하여 비록 한두 달 걸릴지라도 모두 알고 있었다.

본국 곰나루의 야트막한 산자락에 위치한 공산성 안 궁성에서 벌어지는 기기묘묘한 연회가 깊어질수록 사마왕의 본국 귀환은 그만큼 시간을 재촉하고 있었다. 사마왕은 마음을 굳게 먹고 본국 귀환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낌새를 왜국이나 본국에서 알아차리지 못하게끔 일을 치밀하게 꾸며야 했다.

왜왕무는 예의 왜국의 통치에 여념이 없이 지내면서 501년 9월 양무제에게 사신을 보냈다. 물론 백제에서도 사신을 보낸다는 전갈을 이미 받아 놓은 상태였다. 사마왕자는 백 가와의 관계는 물론 쿠데타 계획을 은밀히 하기 위해 일부러 백제왕실에 부탁을 하였다. 즉 왜국은 아직 중국에 직접 갈 수 있는 조선 기술이나 항해 기술이 없으므로 백제 사신을 중국에 보낼 때 왜국 사신도 함께 실어 달라는 부탁이자, 쿠데타 계획을 감쪽같이 속이기 위한 청탁이었다.

물론 백제왕가에서 이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으레 관례처럼 그렇게 해오던 일이었다. 오히려 그러한 부탁을 일부러 해 온 사촌형의 저자세가 말다왕으로서는 더욱더 기분 좋을 뿐이었다.

사마왕자 왜왕무는 비록 말다왕의 사촌형이자, 아버지가 다른 형이었지만 백제 본국의 후왕에 지나지 않았기에 거드름 피기를 좋아하는 말다왕에게는 하나의 기쁨이요, 자만의 표상이었다. 바로 대왕과 후왕이라는 입지의 차이를 말다왕은 즐기고 있었다. 후왕의 자리에 있는 사촌형 사마왕자가 스스로 자신의 지위를 인정해 옴은 방자한 말다왕에게 하나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였다. 하여튼 그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사마왕자는 자신과 백 가와의 관계를 숨기기 위해 일부러 왜 사신을 백제를 통해 함께 가기를 요청한 것이다. 물론 조선기술과 항해기술에 있어서의 차이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쿠데타 계획을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 더 컸다. 당장은 사촌동생에게 굽실거림이 자존심을 구겼지만 그보다는 수 십 년 절치부심하며 기다려온 백제 본국의 왕 자리가 그에게는 더욱더 소중하고 중요했다. 아니 자리 욕심이 아니라, 백제사직을 올바로 이어받고 나라를 안태하게 하며 불쌍한 백성들을 폭군으로부터 구제해 주고 싶었다.

마지막 결심을 굳힌 왜왕무 사마는 왜국(실제로는 왜국 내 나니와에 있는 백제분국) 사신을 백제로 출발 시킨 다음 그도 사흘이 지난 후 백제를 향해 떠났다. 백제 분국의 후왕자리는 태자인 순타에게 맡기고 그는 백제 우두성(현, 서천군 한산면 일대)을 향했다. 그곳은 성주 해 명이 있는 곳으로 사마왕자와는 미리부터 잘 아는 사이였다.

왜왕무는 이제 분국의 자리에 태자 순타를 앉히고 자신은 백제 본국의 대왕이 될 건곤일척의 각오로 우두성으로 향한 것이다. 해 명과 사마왕자는 어릴 적 같이 커 오던 사이로 심지가 굳고 총명한 인물이었다. 그 사이 이 둘의 연락은 금주리가 백제를 오갈 때마다 소식을 전했고 해 명과 가림성주 백 가와도 절친한 사이라서 친 사마왕자 편 인물들이었다.

이처럼 무령왕의 백제왕 등극이 나이 불혹이 되어서야 갑자기 등장함은 쿠데타로 밖에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 만일 사마왕자가 백제에 있었다면, 서기 475년의 고구려 침입으로부터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나? 이때 개로왕과 태자, 왕자들은 모두가 아차산성에서 비참한 최후를 마쳤고 심지어 왕비마저 죽었다고 사서는 기록하는데, 사마왕자 혼자 살아남았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둘째 : 문주왕과 삼근왕, 동성왕으로 이어지는 3대 26년간 개로왕의 유일 생존 왕자로서 사서에 기록이 없다함은 이 기간 동안 백제에 사마왕자가 없었음 말해준다. 이 기간 내에 백제에 있었다면 그는 해 구나 진 로 일당으로부터 큰 위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또한 사마왕자가 줄곧 백제에 있었다면 왕으로 추대되거나 밀려났다는 내용이 한 줄이라도 기록되어 있어야한다. 왜냐하면 사마왕자는 당시 개로왕의 유일한 생존 왕자로서 백제왕 등극 영순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문주왕 즉위 때 이미 사마왕자가 혈통적 계보로 볼 때 백제 왕위에 올랐어야 정상이다.

셋째 : 동성왕을 시해한 백 가를 즉시 처단하지 않고 1개월 여 걸린 점은 사마왕 측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사전에 쿠데타에 관련되어 있음을 어느 정도 시사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백 가의 동성왕 시해 결행 후 예상과는 달리 백성들로부터의 의혹의 눈길과 소문을 돌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사이 사마왕과 백 가와는 밀고 밀리는 협상과 타협 시도가 있었을 것이나, 결국 명분을 얻은 사마왕 측에서 불충의 역신 백 가를 처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넷째 : 왜지에 가 있던 사마왕자가 갑자기 본국 대왕으로 즉위함은 쿠데타 이외로는 설명하기 힘들다. 특히 한국이나 일본 어느 사서에도 사마왕 즉위를 일러 동성왕처럼 천황이 밀어줬다거나 신하들이 추대했다는 기록이 없으니, 이는 자력에 의한 등극으로밖에 볼 수 없다.

이러한 여러 정황이나 이유로 볼 때 사마왕자는 왜지의 분국 왕으로 있으면서 백제 본국의 정치상황에 한 발 물러서 있었다. 그러면서도 본국의 정치상황을 계속 관찰, 관여하면서 결국 중요한 시기에 쿠데타로 즉위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사마왕에 의한 쿠데타 설은 한․일 양국의 학자들에 의해 이미 제기되었다. 일본의 역사학자 카사이 와징(笠井倭人)은 동성왕 치세에 관한『삼국유서』와『삼국사기』간에 26년과 23년으로 3년 차이가 나기에, 이 기간을 동성왕과 무령왕이 무력을 가지고 대결을 벌이던 병립(竝立) 왕조시기라고 그의 논문「삼국유사 백제 왕력과 일본서기(三国遺事百済王暦と日本書紀)」(『조선학보』(24, 1962년)에서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더욱 구체적으로‘정변’이라 주장하는 후루카와 마사시(古川政司)라는 학자도 있다.

그는 이미 1980년『리츠메이칸사학(立命館史学)』이란 역사학 잡지책에「6세기 전반의 일한관계(六世紀前半の日朝関係)」라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양 학자의 주장은 비교적 양심적인 리츠메이칸 대학의 야마오 유키히사(山尾幸久) 교수에 의해서도 지지받고 있다1). 한국에서는 소진철 교수가 무령왕의 즉위를 범상치 않게 보고 있으며, 어려서 왜지로 건너가 왜왕무로 군림했던 백제의 후왕이 501년 귀국하여 즉위했다고 보고 있다. 모두 일리 있는 주장들이다.

사마왕 즉 무령왕의 즉위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 쿠데타(1)에 의한 것이라는 정황은 역사서에도 나오는 기록이다. 이러한 정황은『일본서기』가 인용한 백제 역사서『백제신찬』에서도 간취되는 바이다.

왜지의 왜왕무로 있던 무령왕이 금주리를 시켜 백 가와 밀약을 맺어 쿠데타로 사촌동생인 동성왕을 밀어내고 등극했음은 당시의 여러 정황이 뒷받침된다. 이러한 정황은 필자의 논문이나 저서로 더욱 구체적으로 밝혀질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