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중진공업국을 향하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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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중진공업국을 향하여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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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남북관계(1970) - ②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북한의 경제기획과 그 추진상황

북한의 소련군정 당국은 소련식으로 기획경제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우선 1947년과 48년 두 차례의 「1개년 계획」이 실시되었는데, 그 목표는 각 공장 및 기업소의 정비와 생필품의 생산이었다(註: <도표 8-1> 참조). 49년부터는 「2개년 계획」을 실시했는데 그 목표는 경제 각 분야에서 해방 전해인 44년도의 생산 수준까지 복구하자는 것이었다.

「2개년 계획」은 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으로 중단되고 모든 산업은 전시경제체제로 전환해 갔으며, 중요 공장의 일부를 만주 및 북부산악지대로 소개(疏開)했다. 특히 자강도(慈江道)의 산중에다 군수공업지구를 건설했다.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건국 그리고 전쟁

 


소련군은 1945년 10월부터 「건당(建黨), 건군(建軍), 건국(建國)」의 3대 과제를 내세웠다.

▲ 건당은 같은 해 12월 8일 「북조선 공산당」의 창당과 동시에 김일성을 책임비서로 정했다.

▲ 건군은 모든 사전준비작업을 마무리하고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창설했다.

▲ 그리고 7개월 후인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건국하고 김일성이 수상이 되었다(註: <건당→건군→건국>의 순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 남한에서는 1948년 5월 10일 UN감시 하에 총선 실시, 제헌국회 구성하고 7월 12일 헌법 제정, 7월 20일 이승만 대통령 선출

▲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 이승만 대통령 취임

▲ 동일 육군과 해군을 산하에 둔 「국방부」가 창설됐다. 「국군 창군」이다.


이로써 1948년에 군정통치는 끝나고 북한에는 「조선인민공화국」, 남한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됐다. 그 후 김일성은 「남조선해방」,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통일」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이 구호속에 평화적 분위기는 전혀 없다. 모두 무력으로 쟁취하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김일성에겐 내부에 적이 많았다. 절대 권력자가 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큰공을 세워야 했는데 마침내 결정적인 기회가 왔다.

1949년 6월에 주한미군이 철수했고 50년 1월에 애치슨 美 국무장관이 「한국은 미국 방위선 내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발표했는데, 이 때 미국은 실로 중대한 실책을 범한 것이다.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는 것이 공산사회주의의 「힘의 논리」요, 전략이다.

김일성은 스탈린 및 모택동과 남침을 모의하였다.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소련제 탱크를 앞세우고 붉은 깃발을 휘날리며 자유민주주의의 나라 대한민국을 침공해 왔다. 이에 당황한 미국은 UN군을 조직, 침략군과 맞섰다. 이어서 소련은 대대적인 공군을 파견했는데, 손실을 본 항공기 수만도 1,949대에 달했다. 중공도 의용군이라는 명목 하에 수백만의 지상군을 파병했다.

한반도는 공산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맞붙은 일대 혈전장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 전쟁은 어디까지나 「동서(東西)진영 간의 국제전」이었다. 불행하게도 이 전쟁이 우리 땅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우리 민족이 가장 큰 희생을 치렀다. 가장 많은 피를 흘렸으며 가장 많은 재산상의 손실을 입었고 가장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미소 양국은 우리 민족의 분단상태는 그대로 남겨 놓은 채 자기들 나라만을 위해 휴전을 했다.

「전쟁복구」는 3개년 계획(1954~56)으로 완성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되었다.

북한은 「8,700개의 공장, 5천 개의 학교, 1천 개의 병원(진료소)이 파괴됐으며, 공업생산은 6 · 25 전에 비해 60% 이하로 떨어졌고, 전력은 26%, 연료는 11%, 야금(제련)은 10%, 화학 22%, 건설자재 36%, 수산업은 24%로 떨어졌다. 또한 농촌의 노동력이 극히 부족하게 됐으며, 6 · 25 전쟁 중 소 25만 마리, 돼지 38만 마리가 살해되어 가축 수가 크게 줄어들었고 대부분의 농가는 식량은 물론 종자까지 부족한 상태가 되었다」라고 발표했다.

이런 상태에서 북한은 54년부터 「전후복구 3개년 계획」에 들어갔다. 6·25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복구해서 49년 수준으로 복귀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전후복구 3개년 계획」에 대해서는 소련, 중공을 위시한 동구 여러 나라에서 많은 원조를 했다(註: <도표 8-2> 참조).

 

 
   
  ^^^^^^^^^▲ 일생을 받쳐 조국 근대화와 산업화를 이룩하신 故 박정희 대통령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이러한 원조로 북한은 김책(金策)제철소, 성진(城津)제강소, 흥남(興南)비료소, 수풍(水豊)발전소, 평양(平壤)방직공장 등을 복구하고 일부는 확장까지 할 수 있었다. 이 3개년 계획의 결과로 공업생산은 6·25 전쟁 발발 전해인 49년의 2배 이상, 곡물생산은 49년보다 8% 상회하는 278만 톤으로 늘어났다는 발표가 있었다.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려웠으나 큰 성과를 올린 것은 사실이었다.
(註: 이 발표가 나온 지 얼마 후에 좀 이상한 소문이 들려서 북한의 발표를 액면 그대로 믿어야 하는가 하는 의심도 나오기 시작했다. 55년 4월에 개최됐던 당 중앙위 총회 때의 김일성 발언이다. "54년도의 곡물생산에 대해 어떤 사람은 270만 톤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280만 톤이라고 하는데, 최종보고에는 280만 톤 생산한 것으로 되어 있다. 당초 54년도의 생산목표인 300만 톤에는 못 미치지만 280만 톤을 생산했다고 하더라도 6·25 전쟁 발발 전해인 1949년에 생산한 279만 톤보다는 많은 생산을 했다는 결과가 된다. 그런데 현재 우리는 극심한 식량부족을 겪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54년도의 곡물생산 통계는 틀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는 230만 톤 정도가 생산된 것으로 안다. 이런 사실은 현재의 극심한 식량난이 실증을 해주고 있다고 본다. 금년(55년)에도 어떤 이는 410만 톤의 생산이 가능하다고 한다. 당 중앙위(정치위)에 보고된 바도 360만 톤을 생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 중앙위는 360만 톤 생산에 반대하고 생산계획을 대폭 축소시켰다." 김일성이 직접 시정을 하지 않았던들 55년도 곡물 생산은 410만 톤이란 통계가 나올 수도 있었다고 보여진다).

중소분쟁으로 북한은 어느 한쪽 나라만 택해야 했다.

스탈린이나 모택동(그리고 김일성)은 1인 독재주의자이다. 6·25 전쟁 때까지는 서로 협조적이었다. 그러나 1953년 3월 5일 스탈린이 사망한 후, 중국과 소련의 관계는 크게 변했다(註: 같은 해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

(1) 1953년 9월 새로 집권한 후르시쵸프는 55년 2월 스탈린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 1인 독재주의를 전면 반대하고 나섰다. 중국의 모택동으로서는 독재자가 되어야 했으니 심기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모택동은 「중국의 황제(皇帝)」격이다. 「중국의 황제」라는 위치는「왕중왕」으로서 다른 나라인 소련의 명령에 따를 수는 없다.

(2) 후르시쵸프는 동서냉전을 대결국면으로부터 점차 협상하는 방향으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소위 「데탕트」시대의 개막이다. 그러나 아시아지역에는 아직도 무력으로 해방, 즉 공산사회주의화를 시켜야 할 나라가 많다고 느끼고 있던 모택동이나, 적화통일을 외치고 있는 김일성으로서는 이러한 방향 전환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3) 이상과 같은 체제와 투쟁방법의 차이에서 소련과 중국은 외교적 마찰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4) 소련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최신 병기의 원조를 제한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군사대국화 정책을 채택하고 핵무기와 운반수단(미사일, 인공위성) 개발에 총력을 경주했다(註: 중국의 첫 핵실험은 1964년 10월 16일, 인공위성 발사는 1970년 4월 24일에 있었다).

(5) 소련은 중국(및 북한)을 소련의 경제체제 하에 두기 위해 이들 국가의 중화학공업 육성에 협조하는 것을 꺼렸다. 그러나 중국으로서는 필요한 모든 분야를 전부 건설해야지 소련이 할당해 주는 공장만 건설할 수는 없었다.

이상과 같이 중소간에 불화가 조성되자 북한은 중국과 소련 어느 한 쪽만을 택해야 했다. 북한은 체제와 투쟁방법은 중국과 같은 입장이었으나 군사나 경제원조를 받기 위해서는 소련에 의지해야만 했다. 그래서 북한은 중국과 소련 사이를 왔다갔다하게 된다. 외교적 주체사상이 나오게 된 연유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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