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나야, 니도 이 글을 보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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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추억 속의 그 이름> 깜부기

 
   
  ^^^▲ 청보리가 패고 있다
ⓒ 보리밭/이종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고향 그리워
피 - 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 ㄹ 닐니리.

(한하운 '보리피리' 모두)

비닐하우스가 하얗게 덮힌 못자리 곁에서 파아란 보리가 패고 있다.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웃자란 보리 몇몇이 초록빛 보릿대를 쑥쑥 밀어올리기 시작하더니, 그새 들판 전체가 온통 까끄러운 수염을 단 보리로 가득 차 있다. 저렇게 고개를 빳빳히 치켜든 보리를 바라보고 있으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라는 옛 속담과 함께 문둥이 시인 한하운이 생각난다.

"예끼! 못 된 넘 같으니라구. 명색이 고등핵교까지 댕긴다는 넘이 그래, 누구한테 함부로 대든단 말이고. 니 에미 애비한테 가서도 그렇게 한번 대들어 보그라. 그래. 핵교에서는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은 배우지 않는 갑지?"

"어르신! 내가 뭘 어쨌다꼬 그라능교?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지만 보리는 익어도 고개를 빳빳하게 치켜들고 있다는 것도 모르능교?"

"저~ 저~ 못 된 주둥아리 하고는. 아, 터진 기 입이라꼬 나오는 데로 씨부리모(내뱉으면) 되는 줄 아나? 그라고 보리하고 벼하고 같더나? 천하에 빌어먹을 넘 같으니라고. 그래, 니 하는 꼬라지(꼴)로 보이(보니까) 평생 보리 밖에 못 될 넘이네"

봄비 한번 내리지 않았던 그해는 우리 마을 전체에 보리 흉년이 들었다. 신작로 주변을 비롯한 온 들판에서는 보리보다 깜부기가 더 많이 패기 시작했던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의 얼굴에는 주름살이 더욱 깊게 패이기 시작했고, 입에서는 땅이 꺼지는 듯한 한숨소리가 절로 새어나왔다.

말 그대로 그 현기증 이는 보릿고개가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해는 다른 해와는 달랐다. 그나마 보리가 패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마을 어르신들의 기대와는 달리 파아란 보릿대에서는 어르신들의 꺼칠한 수염 같은 깜부기만 쑤욱쑥 올라오고 있었다.

행여나, 아직 패지 않은 보리가 제대로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자고 일어나면 새로 피어나는 보리마저도 대부분 깜부기 일색이었다. 밤새 누군가 보리서리를 하기 위해 온 들판을 통째로 불로 거슬린 것만 같았다. 깜부기는 보리밭에서만 피어나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밀밭에서도 마치 우리들 약을 올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 시커먼 깜부기를 쑥쑥 밀어올렸다.

 

 
   
  ^^^▲ 요즈음에는 깜부기도 보리밭도 보기가 쉽지 않다
ⓒ 이종찬^^^
 
 

"아나"
"그기 뭐꼬?"
"밀알이다"
"다 익지도 않은 밀알로 가꼬 뭐하라꼬?"
"밀알로 오래 씹으모 껌 된다"

그랬다. 우리들이 밀이 패기를 애타게 기다린 것은 다름 아닌 껌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밀이 패어나고 얼마 지나면 밀알이 통통해지면서 제법 단단해진다. 이때 밀을 따서 까슬까슬한 수염을 대충 제거하고 난 뒤 양손으로 비비면 파아란 밀알이 나온다. 그러면 입으로 후우, 분 뒤 입에 탁, 털어넣으면 그만이었다.

밀알을 씹으면 처음에는 약간 비릿한 맛이 나지만 조금 지나면 제법 달착지근하다. 그리고 이 밀알을 그냥 삼키지 않고 오래 씹으면 마치 껌처럼 진득진득한 게 남는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껌이라고 생각하며 씹고 다닌 것이다. 또 그맘 때가 밀서리를 하기에도 가장 적당한 시기였다.

하지만 그해는 깜부기가 더 많이 피어나 우리들이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던 밀알껌은 커녕 그 맛있는 보리서리와 밀서리조차 할 수가 없었다. 마을에서 심술궂기로 소문난, 택호가 앵금통이라고 불리던 그 어르신과 고등학교에 다니던 마을 형님이 싸운 것도 바로 그 밀서리 때문이었다.

"깜부기까지 같이 조금 베냈으모 말도 안한다카이. 해필(하필) 깜부기가 덜 핀 그 밀만 쏘옥 골라서 베냈다카이. 그라이 내가 성(화)이 안나게 생겼나"
"아(애)들이 울매나 배가 고팠으모 그랬겠능교? 고마 어르신이 이해로 하소"
"내도 그거로 우째 모르것노. 아, 작년에는 내 밀밭에서 밀로 베내가꼬 꺼실라(그슬려) 묵는 거로 보고도 모른 척 했다카이"
"아, 올개(올해)는 이래나 저래나 기왕 베린(버린) 농사 아인교?"
"내도 안다. 그런데 지가 뭘 잘했다꼬 악다구로 하면서 내한테 대드노 이 말이다"

그해 우리 마을에서는 아이 어른 할것없이 누구나 들판에 나가 깜부기를 뽑기에 바빴다. 마을 어르신들은 그렇게 뽑은 깜부기를 논둑에 모아놓고 짚풀을 불쏘시개로 삼아 불을 질렀다. 하지만 우리들은 깜부기로 서로 콧수염을 그려주기도 하고, 양볼에 그리기도 하면서 배를 잡고 깔깔거렸다.

그리고 우리는 깜부기가 팬 그 보릿대와 밀대를 낫으로 베내 보리피리를 만들었다. 보리피리를 만드는 것은 버들피리를 만드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보리피리는 보릿대의 마디를 꺾은 뒤 한쪽 마디는 막힌 채로 두고 다른 쪽 마디를 베어낸 뒤 막힌 쪽 마디 아래를 연필 깎는 칼로 적당한 길이로 가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입으로 훅 불면 삐이~ 하는 소리가 났다.

"아나"
"이거는 또 뭐꼬?"
"보리피리다. 제일 소리가 잘 나는 걸로 골랐다"
"고맙구로. 그라고 나도 니한테 줄 끼 있다"
"뭐꼬?"
"나중에 집에 가서 읽어봐라. 그라고 나중에 시인 되모 내 이야기도 좀 써주라"

 

 
   
  ^^^▲ 마악 보릿대를 올리고 있는 보리밭
ⓒ 이종찬^^^
 
 

그날, 그 가시나가 내게 건네준 것은 문둥이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의 <보리피리> 라는 시집이었다. 그 가시나는 그 시들 중에서도 '파랑새'란 시와 '보리피리'란 시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그래. 그 가시나의 바램대로 나는 시인이 되었다. 그리고 그 가시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지금 이 이야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으리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가 되리

(한하운 '파랑새' 모두)

가시나야!
니도 지금 이 글을 보고 있나?
아니모 벌써 파랑새가 되어뿟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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