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협 기자의 실크로드 기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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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협 기자의 실크로드 기행[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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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거리 1만3천킬로의 비단 길 그 장대한 여로

01. 프롤로그

"실크로드Silk road"는 길고 장엄하다. 중국의 장안長安-지금의 서안-에서, 서방西方 페르시아, 로마에의 길이다. 직선 거리만으로도 1 만 3 천 킬로미터 남짓이다. 지구의 3 분의 1 주周에 이른다. 중국에서 인도에 달하는 불교의 길은, 파미르 산록을 넘지 않으면 안된다. 고개는 가장 낮은 길을 간다 해도 5천미터 안팎이다.

중국, 인도, 로마의 3 대 문명권을 고리 삼아 유라시아대륙을 동서남북으로 관통하는 실크로드. 동서 문화교류의 길인 동시에 역사가 통했던 길, 실크로드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실로 장대한 여로다.

우리말로는 흔히<비단 길>이라 번역된다. 당시 중국의 특산물이던 비단이 이 길을 통해서 서방에 반입된 데서, 독일 지리학자 리히트 호펜(1833-1905)이 그의 저서<차이나>에서 명명한 후, 고고학자 스타인(1862-1943)이 '실크로드 Silk road'로 영역英譯한 것에서 비롯되었다.

서방으로부터는, 보석, 옥, 직물 등의 산물이나 또는 불교, 이슬람교 등도 이 길을 통하여 동아시아에 전하여 졌다. 이 통상로通商路에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북변北邊을 통과하는 '서역북도西域北道'와, 같은 사막의 남변南邊을 경유하는 '서역남도西域南道'가 있으니, 똑 같이 파미르 고원을 넘어 서西투르키스탄의 시장市場에 이른다.

또한 동방으로는 감숙성甘肅城 돈황敦煌에서 합해져서 외길로 되어 황하黃河유역까지 이르고 있었다. 다만 초기의 것은 돈황의 서방에 위치하는 로브노르의 동단東端의 누란樓蘭-Koroayind을, 남도는 호남湖南의 미란Miran을 경유하여, 두 오아시스를 국제시장으로 번영케 하였다.

그러나 3 세기경부터 로브노르 일대의 건조화乾燥化가 진행되면서, 북도北道는 돈황에서 북행하여 천산산맥天山山脈의 동단, 토로번 분지吐魯蕃 盆地를 경유하여, 카라샤르焉耆, 쿠차龜玆,카슈가르疏勒에 이르게 되었다.

한편 로브노르의 남안南岸을 서쪽으로 향하여 호탄于檀에 이르는 남도는 점차로 이용도가 낮아져 갔다. 그 때문에 당조唐朝의 서역경영은 제 2 차의 서역북도에 따라 행하여졌으며, 후대에 천산남로天山南路의 호칭이 생기게 된 것도 같은 서역북도였다.

실크로드는 타클라마칸 사막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다수의 오아시스 나라들의 대상隊商활동에 의하여 유지된 것이다. 그 무역의 이익은 동방에서 중국인을, 북방에서 유목민을, 또 남방에서는 티베트Tibet 인을 끌어들여 그들에 의하여 강화되었다. 그러나 한편 이와 같은 외부세력에 의하여 시장이나 상로商路를 독점하려는 군사적 진출이 있었기 때문에 아시아의 형세를 좌우할 만큼 되어 있었다.

이 길의 동방과의 연결은 기원전 2 세기 후반의 한 무제 漢 武帝 때라고 한다. 장건張騫이 서역으로 특파(기원전 139-126)된 것을 계기로 하여 처음으로 서방의 사정이 공적公的기록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역대의 왕조는 예외 없이 동서의 무역에 열의를 나타내어 '실크로드'를 통과하는 여러 오아시스 나라들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 하에서 서방의 물건이 빈번히 중국으로 밀려들었다. 서방의 문물 특히 이란의 배화교拜火敎, 마니교 및 로마에서 이단시異端視 되었던 그리스도 교의 한 파派인 네스토리우스 파까지도 중국으로 전래되었다. 7 세기 중엽, 당조唐朝가 타림분지에 안서 도호부安西 都護府를 설치할 무렵은 '실크로드'의 가장 왕성했던 시기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안록산安祿山의 난亂이 일어나고(755) 티베트 군軍의 진출이 있어, 당조와 서역과의 직접적인 교섭이 단절되었다.

서역의 동부는 위구르인人이 점거하여 의연히 고대부터의 문화를 계승하고는 있었으나 서부에는 이슬람 세력이 진을 치고 있었다. '실크로드'는 중간의 파미르 근처에서 중단되는 경향이었고 이것이 결국 정치적으로 투르키스탄의 동서 2 분으로 연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파키스탄 수도 이스라마바드 북쪽 2 백킬로 지점에 '다고트'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다. 인더스강이 흐르고 기다란 철교가 걸려 있다. '다고트 교橋'다. 다리의 교각橋脚에 중국사자獅子가 새겨져 있어서, 사람들은 '챠이나브리지'라 부른다. 1978 년 6 월 이 다리에서 성대한 축하연 벌어졌다.

'카라코룸 하이웨이' 개통식이었다. '다고트' 다리에서 카라코룸 산중山中, 중국과의 국경 '군재라브'고개까지 645 키로의 전선前線에는 중-파 양국의 요인要人, 파키스탄 주재의 각국 대사 및 수많은 공사관계자가 열석列席하였다. 우리 나라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카라코룸 하이웨이' 공사는 파키스탄에 있어서는 국가적인 대 사업이었다.

이 길은 중국과 파키스탄을 단숨에 연결 짓는 대 동맥으로, 밀월시대에 있는 중-파 양국의 심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고트'에서 북쪽은 8 할 이상이 단애절벽斷崖絶壁으로 공사는 난항을 거듭하였다.

중국은 우호국 파키스탄의 도로건설에 인원, 자재, 기계와 전면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완성에는 10 수년이 걸렸으며, 그 사이 희생자는 3 천명을 넘었다고 전한다. 하이웨이를 가다 보면 군데군데 희생자의 위령비가 있어, 얼마나 난공사였는가를 엿볼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나서고자 하는 '카라코룸 하이웨이'는 중-파 양국의 사람들이 피와 땀으로 닦아 놓은 길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옛날 중국의 구법승求法僧이나 여행자, 그리하여 대상隊商들이 통과했던 길, '실크로드'인 것이다. 길은 중국 령 카슈갈, 다슈구르간을 지나 파미르에 든다. 그 곳은 사막과는 또 달리 혹한酷寒의 세계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난에 넘친 여로旅路였음에 틀림없다.

히말라야, 카라코룸, 힌두쿠시, 천산, 곤륜崑崙의 준봉峻峰들이 장엄하게 늘어선 대 파미르, 총령叢嶺이라고도 불린 파미르의 험준한 산길이야말로 남쪽 그리고 동-서로 향한 길인 것이다. 불교의 나라 인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이 루-트를 타지 않으면 안 된다. 불상佛像탄생지 간다라에 향하는 것도 이 길이다.

그리하여 간다라에서 서쪽으로 나서면 페르시아, 나아가 그 이서以西는 로마에로 이어진다. '카라코룸 하이웨이'의 북쪽 기점起點, 파미르 산중의 '군재라브' 고개야말로 서양을 향한 기나긴 여행의 출발점인 것이다. '카라코룸'에서는 표고標高 5천미터 부근에 '만년설 한계萬年雪限界'라 불리는 경계가 있어, 연중 눈이 덮여 있다.

그 눈은 수십 년, 수 백년동안 막대한 적설량이 되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만년설 한계의 아래까지 흘러내린 것이 빙하氷河다. 산이 높으면 높을수록 내리 누르는 힘이 강하여, 빙하는 그만큼 오랜 세월을 안고 있다. 장대한 봉우리가 연이어 있어 '카라코룸'에는 50 킬로, 60 킬로나 되는 길다란 빙하가 생겨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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