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서 '+'의 세계를 얻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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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에서 '+'의 세계를 얻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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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하종오 10번째 시집 <무언가 찾아올 적엔> 펴내

 
   
  ▲ 시인 하종오
ⓒ 민예총
 
 

"근래 몇년 동안 강화도와 서울을 오가며 생활하면서 농촌과 도시 간의 단절을, 윗세대와 아랫세대 간의 단절을, 자기와 타자의 단절을, 자연과 인간의 단절을, 생과 사의 단절을 느끼면서 자꾸만 극단으로 삶의 각을 세우게 하는 것이 무엇이며... 시인이 자본주의 현실에서는 무력하더라도 시 속에서만은 유능해질 수 있다는, 이 새롭지 않은 아주 작은 사실 하나를..."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의 시인 하종오(49)가 4년 만에 새로운 시집 <무언가 찾아올 적엔>을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냈다.

이번 시집을 펴낸 하종오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자본주의 현실에서 한없이 무력하기만 한 자신이 스스로 시를 놓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시 속에서만은' 속물 자본주의를 자유스럽게 탈피하고 스스로 '유능해질 수 있다'고.

이 말은 곧 그가 최근 자본주의 현실과 동떨어진 듯해 보이는 강화도와 자본주의의 심장인 서울을 오가면서 "농촌과 도시", "윗세대와 아랫세대", "자기와 타인", "자연과 인간", "생과사"의 단절을 절절이 느낀 끝에 스스로 얻은 결론이다. 그래. 그래서 하종오는 어쩔 수 없는 시인이다.

이는 또한 그 스스로 시의 집을 떠나서는 도저히 이 속물 같은 현실과는 타협하지 않겠다는 자세다. 또 속물 자본주의가 아무리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단절시키고, 사람마저 "극단으로 삶의 각을 세우게" 하더라도 결국 그 자본주의 속물성의 본질을 궤뚫는 것은 결국 시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시 속에만이 무한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돋아내고/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당시 우리 민초들의 아픔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하종오 시인. 그 시인 하종오가 출판사 보도자료에 적힌 글대로 "지난 10년간 현실과 초월의 아슬아슬한 경계를 그려냈던 '님'의 세계를 벗어나" 다시 대지로 돌아왔다.

서울 콘크리트집 마당에 서 있는 산초나무 캐어
시골 텃밭가에 옮겨 심고 돌아왔다
애초에 산초나무가 왜 날 찾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밤이면 나란히 앉아 달 쳐다보며 지냈다
한철 뒤 시골 텃밭에 가서 말라죽는 산초나무 보다가
무언가 찾아올 적에는 같이 살자고 찾아온다는 걸 알아차리고는
다시 캐어 서울 콘크리트집 마당에 옮겨 심었다

표제작인 이 시에서 시인 하종오가 말하는 '무언가'는 대체 무엇인가. 도심의 '콘크리트집 마당에 서 있는 산초나무' 를 캐어 '시골 텃밭가에 옮겨 심" 을 때 시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시인은 대자연 속에 있어야 할 그 산초나무가 시멘트로 둘러쳐진 도심의 마당에 서 있는 것이 안타까웠을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산초나무를 원래 있었던 자연 속으로 되돌려 보내는 그런 심정이었으리라.

 

 
   
  ▲ 시인 하종오
ⓒ 민예총
 
 

시인은 "애초에 산초나무가 왜" 거기 서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밤이면 나란히 앉아 달 쳐다보며" 그렇게 같이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시골 텃밭에 찾아가보니 그 산초나무가 말라 죽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때 시인은 시골 텃밭으로 옮긴 산초나무에게 드리워지는 죽음의 그림자를 '무언가'라고 표현한다. 그렇다. 시인이 말하는 그 '무언가'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말하는 것 같다.

그래서 시인은 '무언가 찾아올 적에는 같이 살자고 찾아온다는 걸 알아차리고' 그 산초나무를 다시 원래 서 있던 그 자리에 옮겨 심는다. 그리고 그 옮겨심는 행위가 바로 산초나무를 죽음에서 삶으로 이끌어내는 순간이다. 또한 그 순간이 "무언가"를 알아차리는 일이며, 더불어 같이 살아가는 길이다.

처음 대자연을 떠나온 산초나무는 비록 콘크리트로 둘러쳐진 도심의 마당이지만 자신이 오랫동안 정들고 살았던 그곳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이처럼 하종오는 이번 시집에서 "농촌과 도시", "윗세대와 아랫세대", "자기와 타인", "자연과 인간", "생과사"의 단절에 대한 해답을 바로 '무언가'에서 찾고 있다.

어제는 한 두둑 일궈서 열무 상추,
오늘은 한 두둑 일궈서 고추 모종,
국거리 찬거리 다 준비하고 나니 내 텃밭도 넓다
사지삭신을 흙에 부리고 나면 하늘눈이 생겨나는가
저기 산에서 여기 나무에게로 슬며시 오는 그늘이 보인다
가지에 둥지 친 새를 따라 날아다니는 나무가 보인다
언젠가 남을 비웃던 날이 내가 땅을 치고 울 날로 보인다
수년 전엔 수직으로 보이던 내가 오늘은 수평으로 보인다

('하늘눈'에서)

그렇다. 주어진 현실을 헤쳐나가는 길은 끝없이 수직으로 상승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이 평평하게 펼쳐진 대지에 있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사지삭신을 흙에 부리고 나면 하늘눈이 생겨나는가' 라고. 그래. 수평이 없으면 수직도 없다. 따라서 수평을 제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비로소 끝없이 위로 올라가는 수직, 즉 '하늘눈'이 생겨나는 것이다.

'사지삭신을 흙에 부'린 뒤 마침내 '하늘눈'을 얻은 시인은 비로소 '산에서 여기 나무에게로 슬며시 오는 그늘'을 볼 수가 있고 '새를 따라 날아다니는 나무'를 본다. 그리고 '언젠가 남을 비웃던 날이 내가 땅을 치고 울 날'로 돌아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마침내 '수직으로 보이던 내가 오늘은 수평으로 보인다' 라는, 수직과 수평이 합쳐지는 '+'의 세계를 얻는다.

시인 하종오는 10여년 전부터 강화도에서 텃밭을 일구며 살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번 시집 곳곳에서는 시골의 흙내음과 향수 같은 꽃내음이 풍긴다. 그 흙내음과 꽃내음을 오래 맡고 있다가 문득 '초봄이 오다'에 이르면 산수유들이 '아픈지 파다닥파다닥' 거리며 '노란 꽃망울들 터뜨'리는 소리가 들린다.

밭가에 심긴 등나무는
가지를 뻗어도 휘감을 나무가 없어
서로 꼬며 꼬이며 휘어 오르다가 멎어서
사방으로 잔가지들 하늘거린다.
저 홀로 직선으로 허공을 오르지 못하자
등나무는 그 푸른 힘을 밑으로 내려 퍼뜨린다.
저 홀로 땅속에 곡선으로 휘어 뻗은 뿌리는
팔방으로 이리저리 퍼져나가다가
불쑥불쑥 밭고랑에 새 가지를 돋아올린다.
새 가지는 새순 내어 사방팔방을 더듬어보다가
휘감을 나무가 없으면 구불구불 엎드린다.
누가 밭가에 등나무를 심었을까.
저 홀로 흙바닥에 직립하지 못한 사람이었을까.
그이 온몸도 기댈 데 없어 휘었을 게다.

('살아가는 법'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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