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유, 물보라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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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유, 물보라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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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의 캠브리지 복귀와 매월당의 수락산 환속

 
   
  ^^^▲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通篇奧義 似仙道佛法而非 當時新羅 姑無仙儒佛之浸來
하늘로 통하는 길은 선도와 불법과 비슷하나 같지 않았다.
당시 신라에는 침투해 들어온 선, 유, 불이 아직 없었다.

- 김시습의 징심록 추기 중에서 -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 이하 루디)은 비엔나에서 대부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그의 궁전 같은 집에는 그랜드피아노만 일곱 대가 있었고, 작곡가 브람스와 말러가 저녁 음악모임에 자주 찾아왔었다. 어머니가 바라는 바와 달리, 루디는 자라면서 기계를 잘 만졌고, 19세 때 영국의 맨체스터에 가서 3년 동안 항공기 프로펠러의 설계에 매진했다.

수리해석에 탁월한 재능이 있음을 발견한 지도교수는 루디를 캠브리지의 러셀에게 소개했다. 러셀은 당대 수리철학의 대가였다. 그러나 겨우 3학기를 마치자 루디는 노르웨이로 피신하면서 그들의 도제수업은 끝나고 만다. 나중에 러셀은 술회했다. 루디는 비상한 정열과 통찰력을 지닌 천재이며, 그를 알게 된 것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적 모험 가운데 하나였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이 터지자 루디는 오스트리아 군대에 의용 입대하였는데, 마치 죽고자 애쓰는 사람처럼 전투에 몰입하여 오히려 장교로 승진되었다. 또 그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았는데, 모두 기부해버리고 죽을 때까지 거지처럼 살았다. 그렇게 하는 것이 어떤 사실, 예를 들어, 죽음이나 삶의 의미를 획득하는데 더욱 쉬웠기 때문인 듯싶다. 즉 민감한 반응이다.

논리철학 논고, 루디가 전투 중에 틈틈이 메모해두었던 원고를 전후에 간신히 출판한 책제목이다. “세계는 사실의 총계이지, 사물의 총계가 아니다.” 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하여 침묵해야 한다.” 70여 쪽밖에 안 되는 얄팍한 분량이었는데, 철학계를 태풍처럼 강타했다. 바로 비엔나학파의 바이블로 받들어졌다. 루디는 철학적 문제를 한칼에 해결했다고 자만했다.

그리고 루디는 산골 초등학교에 파묻혀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때 그의 이론이 현실적용에서 허점이 있음을 깨닫는다. 루디는 캠브리지로 돌아왔다. 마치 “신은 죽었다”고 외치며 짜라투스트라가 산에서 내려온 것 같이. 철학적 탐구, 그의 사후 학생들에게 남긴 노트에서 추출된 책이다.

위 그림은 유명한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이다. 이 그림에 정답은 없다. 있다면, 그냥 그것(it), 아니면 나씽(nothing) 정도일까. 그런데 마법에 걸린 듯 자꾸 현상을 꿰뚫어 보고 싶다. 그림에 나타난 그대로의 현실적 특징과 차이점은 놓치고, 그림의 바탕에 숨어있다는 “본질”만을 찾으려 애쓴다. 결국 우리(철학자)는 의미 있는 것처럼 가장된 무의미만 남발한다.

매월당은 김시습(1435-93)의 아호이다. 그는 이십 세를 넘기면서 죽을 떼까지 한반도 동서남북 어디든지 발길 닿는 대로 탕유(宕遊)했다. 그런 가운데 두 번 정도 예외로 다년간의 거주지라고 할 수 있는 시기와 장소가 있었다. 그중 한번은 30대에 경주 남산에서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창작할 때였고, 그후 40대에 환속하여 서울 수락산에서 손수 농사지으며 생활했을 때였다.

매월당은 평생 벼슬하지 않고, 기저층의 백성으로 남아있었다. 당시 스님의 사회적 신분은 불가촉천민의 대명사였던 백정과 동급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여(無餘)의 길손으로 오히려 이를 유쾌하게 즐겼다. 그리고 내면에 공존하는 다면인격의 넘치는 끼를 시어(詩語)로 승화시켜 작품 속의 여러 인물들에게 분담시켰다. 이것이 우리나라 소설의 효시 금오신화의 배경이다.

부도지(符都誌)는 신라 때 충신 박제상(363-419, 본관 영해)이 남긴 우리 한민족의 기원과 분화 및 경로에 관한 비기(秘記)이다. 이것은 원래 징심록(澄心錄) 15지 가운데 제1지에 불과하나, 오늘날까지 종가를 통하여 전달된 내용으로는 유일한 사본이다. 여기서 부도란 단군조선의 수도를 가리킨다.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의 복계산(福桂山 1057m)에는 매월대 바위 옆에 매월대 폭포가 물보라를 뿌리고 있다. 매월당은 이곳에서 어릴 때부터 이웃으로 친하게 지냈던 영해 박씨 후손들과 함께 피신했던 것 같다. 인근에 그들의 충절을 담은 구은사(九隱祠)가 남아있다. 그는 이때 징심록 추기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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