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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여자사랑과 보한재의 나라사랑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 전도서 1장 3-4절 -

파카소(1881~1973)가 만난 여러 여인들 가운데 특히 7명은 그의 작품 변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23세 때 첫 여자를 시작으로 90세 가까이 살면서 평균 10년 주기로 새로운 애인을 두었다. 사진작가였던 “도라 마르(애칭)”는 이른바 다섯 번째 연인이다. 피카소는 입체파(Cubism) 작가로서 절정에 올라있을 때에 그녀를 모델로 삼아 여러 점의 초상화를 남겼다.

그중에 검은 고양이와 함께 의자에 앉아 있는 마르를 화폭에 담은 것(1941)이 있는데, 이 작품이 지난 뉴욕 소더비 경매(06.5.3)에서 미술품 사상 두 번째로 높은 가격인 9,520만 달러에 판매됐다. 피카소는 다작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비싼 화가 랭킹 1위에 올라 있다. 왜 그럴까. 피카소의 큐비즘이 추상화로 탈출한 20세기 화단에 나침반 역할을 담당하였기 때문이다.

“도라 마르의 초상”의 특징은 하나의 모델을 두 측면에서 따로 해체한 후 그 이미지를 다시 하나로 합성한 것이다. 말하자면 작가(즉 관찰자)는 단수지만 그의 내면에 복수의 시선이 병존하는 셈이다. 마음속에 담겨진 사물(object)은 3차원 입체인데, 주어진 화폭(canvas)은 2차원 평면이다. 큐비즘이란 이와 같이 차원이동의 카오스를 넘으려는 끈질긴 인간의 시도이다.

보한재(신숙주의 호, 1417-1475)는 물론 유가(儒家)의 전형이지만, 그의 내면에는 공자뿐 아니라 법가(法家)의 한비자까지 공존하고 있었다. 피카소의 큐비즘처럼 그의 생각과 시선은 단선(單線)이 아니라 복선(複線)으로 백업(back-up)되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치판이 급변할 때마다 그는 정치가로서 그 위기를 당당하게 대처했고, 또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었다.

강소국(强小國) 조선, 이것이 보한재의 정치노선이다. 그러나 당시 대다수의 사대부들은 강대국 중국에 치여서 소중화(小中華)만이 생존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었다. 아니다! 국가의 강약은 그 덩치에 있지 않고, 지도자의 정신에 따라 결정된다고 그는 생각했다.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漢字)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금북정맥(錦北正脈)은 충남 서산의 가야산(678m)에서 서해 바다로 틀어 굴포를 지나 태안반도를 빚어낸다. 특히 백화산(白華山 284m)은 태안의 심장과도 같은 산이다. 태안은 삼한시대에 마한 54개 연맹국 가운데 신소도국(臣蘇塗國)이었다. 소도는 매년 마을마다 제주(祭主)인 천군(天君)을 선발하여 재앙이 없기를 비는 장소이다. 신(臣)은 “엄”으로 으뜸을 가리킨다.

고려 때(1134)부터 삼남(三南)의 쌀을 서울로 운송하기 위하여 굴포 지역에서 운하(運河)를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거국적 프로젠트가 조선시대로 넘겨졌지만 결국 실패했다. 성종 때 보한재는 노구를 이끌고 백화산까지 올라와서 굴포공사를 현지 지도했던 것 같다. 그의 나라사랑이 잘 보인다.

낙조 끝에 비췬 고개 위 외로운 성 (嶺上孤城落照邊)
올라보니 다만 하늘이 바다에 떠있네. (登臨只見海浮天)
바람 도는 섬들 놀란 물결에 희미하고 (風回島嶼迷驚浪)
후미진 땅에도 백성은 연이어 살아가네.(云云地僻民居生)
포를 판지 몇 해 돼도 뚜렷하지 못하여 (淡姻浦掘幾年功)
이 산에 와도 저 일대를 끊을 수 없네. (未效山來一帶斷)
누가 이 난제를 쉽게 풀어 나와 통할꼬.(猶蓮誰能說我通)

이참에 보한재의 변절이란 허물을 한번 벗겨보자. 임금과 세자에게 유고가 있을 때 반드시 왕자가 섭정하라, 세종이 돌아가기 직전 허약한 세자를 놓고 신숙주, 성삼문 등의 측근들에게 부탁한 말씀이다(세종실록 32.1.18). 여기서 임금은 세종, 세자는 맏이(후에 문종)를 지칭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문제는 세종이 이른 “유고시 섭정할 왕자”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가?

그 왕자를 신숙주는 세종의 아들 수양대군으로, 성삼문은 세종의 손자 단종으로 판단했다. 보한재는 이후 자연사할 때까지 유장(悠長)한 삶을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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