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찾아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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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찾아 오디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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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와 여자 사이에 전쟁이 이어지고

나는 그 영혼이 상처를 받았을 때에도 깊이를 잃지 않고, 또한 사소한 일을 위해서도 죽을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한다. 그런 사람은 기꺼이 그 다리를 건너갈 것이기 때문이다.
-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

오디세이아(Odysseia)는 그리스어로서 “오디세우스(Odysseus)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기원전 8세기경의 작가 호메로스(Homeros)가 기원전 13세기경 애게해(Aegean Sea)를 무대삼아 일어난 트로이전쟁을 바탕으로 구성한 서사시이다. 오디세이(Odyssey)는 오디세이아의 영어이며, 율리시즈(Ulysses)는 오디세우스의 라틴어로서 철자가 다르나 같은 사람의 이름이다.

일리아드(Iliad)와 오디세이아는 한 짝으로 미녀를 놓고 호걸들이 한판승부를 벌리는 것이 공통점이다. 일리아드는 아카이아(그리스지역) 연합군이 아킬레우스를 중심으로 트로이(소아시아지역)를 십년 만에 멸망시킨다는 전쟁담이다. 그런 반면, 오디세이아는 트로이를 계략으로 멸망시킨 이타카의 영주 오디세우스가 종전 이후 10년 만에 귀향하면서 겪는 모험담이다.

오디세우스는 칼립소라는 요정에게 억류되어 십년쯤 지났을 시점에 겨우 풀려나온다. 이때 이타카 본토에서는 주인 없는 그의 아내 페넬로페를 노리고 사방에서 몰려온 구혼자들이 그의 왕궁을 더럽히고 있었다. 이때 거지로 변장한 오디세우스는 남편이란 기득권을 행사하지 않고도 경쟁자들과 활쏘기 무술로 겨루어 당당하게 승리한다. 이어 저들 모두를 시원하게 처단한다.

한 남자(이하 나)는 왜 특정한 여자에 집착하는가? 연어의 회귀본능, 그 여자의 몸에서 어릴 적 고향의 냄새가 묻어있기 때문이 아닐까. 고향이 무엇인가? 내 땅이다. 이곳에는 나만의 하늘이 열려 있다. 고향은 나의 맨 얼굴이 부끄럽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곳이다. 여기에 발을 담그면 고독은 저 너머로 몰락하고, 이전에 몰랐던 새 기쁨으로 돌기가 솟구치는 곳이다.

다른 곳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었다. 나는 그 빈틈에서 붕 떠서 헤매고 다녔다. 특히 모친의 자궁(matrix)은 내가 겪어본 바로써 고향의 원형일지 모른다. 허나 그 매트릭스는 그늘 아래 쉬는 소파에 지나지 않는다. 그 너머로 햇볕을 가려주는 등나무 숲이 우거져 있다. 이곳에 내 유전자 코드가 등재된 심플렉스 공간이 대문을 열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내가 나라는 특성을 가진 정보가 내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마다 박힌 유전자에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아있다는 것은 지나친 낭비가 아닐까. 만약 나를 복제한다면, 나는 지상을 나 홀로 다 메우고도 남을 자원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아니, 내 몸 개체는 엄청난 가치를 지닌 부동산인 것이다! 그뿐 아니라 3일마다 끊임없이 재활용(recycle)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것으로.

세계에서 제일 갑부라는 빌게이츠가 얼마 전에 자선사업에 전념하기 위해서 화려한 직장과 직책에서 은퇴를 선언하여 범인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사실 유전자의 측면에서 봤을 때 그 역시 겨우 밥이나 먹고 사는 격이다. 더 늙기 전에 “나를 찾아나서는 것”이 화급한 당면과제였을지 모른다.

나(自我), 빌게이츠보다 더 비싼 내 몸을 거느리고 있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동서고금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일 뿐이지만, 나는, 물론 누구나, 시공(時空)을 넘나들 수 있는 단위로서의 개체이다. 나는 생각으로, 꿈으로 허(虛)공간을 가로 지날 수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나의 세계를 그림 그리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여기에 가치를 추가한다.

15세기에 이르러 인류는 “나”를 새롭게 찾아내었다. 그것은 곤충의 탈바꿈 같았다. 알에서 유충이 2차원 변환이라면, 고치에서 성충은 3차원 변환을 의미한다. 즉 르네상스는 종교에 격리(isolated)된 나를 발견하였고, 비잔틴제국의 멸망은 동서문화의 융합(convergence)을 열었다. 그리고 신대륙에로의 지리적 탐험(exploration)은 새로운 땅으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한반도 역시 15세기는 무지개 같이 찬란한 시대였다. 신숙주의 한글창제를 통해 “소중화(小中華)”의 틀을 깼고, 성삼문을 통해 “뜻의 초극(超克)”을 열었다. 또 김시습을 통해 “천손(天孫)” 민족의 우월성을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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