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그 날 저 산 너머 하늘가엔 무지개를 걸어 놓아주십시오. 빗속의 지상을 떠나 저 하늘 아름다운 산 너머로 총총히 발걸음을 옮기겠습니다.
- 신부 이정우의 시, 죽음을 기억하라 중에서 -
가위, 바위, 보, 이것은 양자간 또는 다자간의 승부를 빨리 결정할 수 있는 좋은 게임이다. 가위바위보 보다 어릴 적에 동네골목에서 놀면서 “짱껭뽕!” 하던 소리가 지금까지 귀속에서 맥놀이 친다. 좀더 커서는 가위바위보를 응용한 “묵지빠”로 일대일 승부를 겨루며 놀던 생각도 떠오른다.
가위-바위-보 삼자 사이는 우열이 없고 함께 평화관계를 유지한다. 뱀 세 마리가 삼각형을 이루며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긴장된 순간의 형상이라 할까. 그러나 일단 뱀 한 마리가 갑자기 삼각의 고리에서 이탈하게 되면 바로 양자관계의 사이로 좁혀지고, 이때 승패는 뚜렷하게 갈라진다.
보한재 신숙주(1417-75), 매죽헌 성삼문(1418-58), 매월당 김시습(1435-93) 세 사람은 15세기에 혜성처럼 나타나서 가위바위보의 한 각을 차지한 인물이다. 출세로 보면 보한재가 매죽헌을 이겼고, 절개로 보면 매죽헌이 매월당을 이겼고, 자유로 보면 매월당이 보한재를 이겼다. 그러나 셋이 함께 모이면, 즉 입체적으로 보면 삼자간의 승패를 가늠하기 어려워진다.
전자회로의 꽃은 증폭기이다. 엔지니어가 어떤 특정한 증폭기를 설계할 때 크게 이득(Gain), 대역폭(Band-width), 시장성 이상 세 가지를 절충해야 한다. 그런데 한 증폭기에서 이득을 높이(낮추)면 주파수의 대역폭이 좁혀(넓어)진다. 이득과 대역폭의 곱(GBP)이 일정하다는 것은 하나의 법칙이다.
결국 “GBP=일정”이란 증폭기의 공식이 모든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인가? 삶이란 오지랖의 넓이는 누구나 같다고. 이 말이 굵(가늘)고 짧(길)게 산다는 것과 통하는 듯싶다. 또 이렇게도 될까, 자기를 세우(버리)면 주변을 잃(얻)는다. 아무튼 삶이란 자아와 주변과의 끝없는 타협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삶이란 경주에서 종착 테이프를 끊을 때의 내 모습은 어떤 꼴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안작성이 삶의 마지막 과제이다. 테이프 넘어 밑 모르는 나락으로 떨어져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것인지, 아니면 테이프 자체가 찬란한 무지개의 다리가 되어 무궁한 나라로 이어지는 것인지.
“내세에 대하여 꿈꾸는 것은 자유다”, 혹자는 이렇게 빈정거릴 수 있다. 그러나 지상에서 측정 가능한 실공간을 3차원이라 한정했을 때, 실측 불능의 허공간은 4차원으로 잡을 수 있다. 실공간에 대한 허공간의 존재가 양자역학에서 상식이듯 인간의 언어는 내세에 대한 명백한 증거품이다.
百歲標余壙 목숨 다하자 제 무덤에 이르렀고
當書夢死老 꿈꾸다 늙어죽었다고 쓰시겠지요.
庶幾得我心 어느 정도 내 마음을 파악했으나
千載知懷抱 천년 지나야 품은 뜻이 알려지리.
매월당이 삶의 마감을 준비하며 쓴 “나의 삶(我生)”의 끝 네 마디이다.
매월당은 만수산의 무량사(萬壽山無量寺, 충남 부여)에서 죽었다. 이 절의 금당(金堂)은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이다. 그는 그곳의 부도탑(浮屠塔)에 사리 한점(현재 부여박물관에 안치)을 남겼다. 매월당이 죽기 위해 남쪽으로 간 까닭은 산과 절 그리고 전(殿)의 명칭에서 분명하게 대답하고 있다.
매죽헌의 주검은 거열형(車裂刑)으로 5분6열 당했다. 현재 남아있는 무덤은 세 곳이다. 사육신 묘(서울 노량진), 노은단(魯恩壇, 충남 홍성), 성삼문 묘(충남 논산), 각 곳에 그의 어느 부분이 묻혔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오늘밤은 누구의 집에서 자야하나? 매죽헌이 죽기 전 자문(自問)한 말이다.
보한재는 언어의 천재였음으로 내세를 직감하고 있었을 것이다. 인생이 이렇게 그치고 마는가? 임종에 이르러 답답해진 그는 이렇게 독백했다. 보한재의 묘(의정부 민락동)에서 동쪽으로 수리봉(537m)이 보이고, 그 너머 건너편에 광릉이 있다. 광릉은 그가 생전에 줄섰던 세조의 무덤이다.
뉴스타운
뉴스타운TV 구독 및 시청료 후원하기
뉴스타운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