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의 허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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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 김시습의 허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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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맞먹은 오세공자

재주가 넘쳐서 그릇 밖으로 흘렀으며
스스로 거두어 모으기조차 어려웠네.
그가 받은 끼는 너무 가볍지도 않고
너무 무겁지도 않은 멋진 것이었으니.

- 율곡의 김시습전 중에서 -

김시습(金時習 1435-93)은 청한자(淸寒子) 등의 호가 몇 개 있었는데, 그중 매월당(梅月堂)이 오늘날 그를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설잠(雪岑)은 승려로서 그의 법호(法號)이다. 매월당은 60에 가까운 필생에 아무런 벼슬도 달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공문에는 처사(處士)로 기록되어 있다.

1455년(세조 1) 숙질 사이에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왕위찬탈사건은 21 살 된 매월당이 "지난 과거를 깨끗이 지우고(format)" 새롭게 판을 짜는 계기가 되었다. 불의로 임금 된 자는 한낱 권력의 노예에 불과했고, 다섯 살 때 처음으로 스승으로 모셨던 이계전(李季甸)이 그 권력 앞에서 보여준 비굴함은 그의 속을 완전히 뒤집어놓았다. 대가의 가르침은 어디로 갔는가?

매월당은 태어난 지 여덟 달만에 말보다 먼저 글을 알았다. 이듬해 두 살 나면서 벌써 한자의 뜻이 느낌으로 모두 통했다. 혹시 공자(孔子)가 다시 나타난 것이 아닐까? 때때로 익힌다, 즉 시습(時習)이란 그의 본명도 논어의 첫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세 살이 되자, 말을 더듬거리며, 이제는 7언구 등의 율시(律詩)까지 짓게 되었다. 하, 신동(神童)이 출생했다.

소문이 쫙 퍼지고. 영상(領相) 허조(許稠)가 마침내 다섯 살 꼬마를 찾아왔다. 몇 마디 주고받자 바로 무릎을 쳤다지. 대감이 늙을 노(老)를 주자,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요(老木開花心不老)” 하고 받아넘겼던 것이다. 학문에 남달랐던 세종대왕이 자기 치세에 나타난 오세공자(五歲孔子)에 대하여 크게 기뻐했음은 덧 말이 필요 없겠다.

매월당을 궁궐에 불러서 지금의 비서실장격인 박이창(朴以昌)을 통해 테스트하게 했다. 아동의 학문은 마치 백학이 파란 하늘 저 끝에서 춤추는 격이다(童子之學白鶴舞靑空之末), 박이창이 감탄하며 꼬마를 칭찬했다. 그러자 어린 매월당은 바로 대를 맞춰 다음과 같이 읊었다고 한다. 임금의 덕은 마치 황룡이 푸른 바다 그 속에서 나르는 격이다(聖主之德黃龍翻碧海之中).

어리나 당찬 모습이다. 주눅 들거나 머뭇거림이 없다. 그때 세종의 친전(親展)은 아닌 듯하지만,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마음으로 담담하게 제왕(帝王)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매월당의 영혼은 어릴 때부터 하늘에 닿아있었던 것 같다. 정신적으로는 이미 왕과 맞먹고 있었다. 즉 그는 주인이었다.

매월당은 18세(단종 1)에 과거(科擧)에 한번 응시한 듯 하다. 그의 실력은 본과에서 장원급제해도 남았을 터인데, 왠지 초시(初試)조차 불합격의 아픔을 맛보았다. 그 이유에 대하여 아직까지 밝혀진바 없지만, 심사관이 원했던 충신이란 틀에 박힌 답안이 아닌 것만큼은 분명하다. 제출한 답지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신하(臣下)가 아닌 왕상(王上)이 아니었을까.

답답했을 것이다. 벼슬하고 출세하려면 자기까지 속여야 했다. 그러나 천재의 생명은 솔직함에 있었다. 매월당이 진실을 버리면 미치거나 아니면 바보가 될 뿐이다. 그 결과는 맛을 잃은 소금처럼 밖에 버려져서 뭇사람의 발에 밟히는 일만 남는다. 세조의 거사는 매월당에게 차라리 기회였는지 모른다.

매월당은 이후 스님 설잠으로 변신한다. 그러나 척불(斥佛) 정책을 폈던 집권층 양반에게 불승은 여덟 천민 중의 하나였고, 불교는 좌도(左道) 또는 공염불이나 외는 허학(虛學)에 불과했다. 허학이란 그 시대의 지배이념이던 성리학(性理學)에 거스르고 쓸모없는 배움이란 뜻이다. 게다가 설잠은 술, 고기, 때로 여자까지 밝힌 땡초였다. 퇴계는 그를 그냥 괴짜로 평가했다.

매월당은 팔도를 돌며 탁발하다가 경주 금오산에서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창작했다. 그리고 만년에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했다. 후학들은 그를 가리켜 생육신(生六臣) 중의 하나로 편성하지만, 사실은 온몸으로 유불도(儒彿道)를 하나로 회통(回通)케 한 구도자요 자유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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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선 2006-06-12 23:00:28
사람에게 옥석을 가리는 방법이있었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을잠시해본다.진정한 한 시대를 살다간 인물중에 인물이었다고 생각이든다 김시습이 바라다본 세상은 어떠했을까? 그가 진정 권력에 마음에있었다면 이 시대는 그를 달리해석했을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넓게 바라보고 싶은생각이 드는건 왜일까?
교수님의 칼럼 잘 잃고 많은것을 배웠습니다.

권정태 2006-06-13 16:10:00
이런 생각이 듭니다.
매월당은 그 시대에서 더이상 배울게 없었지 않았나.
배울게 남아있다고 한다면, 사람의 이기심 속 허구를 배워야 했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래서 허학을 더 중요시 했을런지...
제가 그가 아니라 모르겠지만, ^^
지금 매죽헌에게 수능을 보게 한다면, 그는 몇점을 받고 나올런지 궁금하네요.

교수님의 칼럼을 읽으면, 생각이 생각에 꼬리를 무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감사히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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