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얼굴에 수염을 달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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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얼굴에 수염을 달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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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에세이> 할미꽃

 
   
  ^^^▲ 할머니의 고부랑 허리처럼 고개를 푹 수그린 채 피어나는 할미꽃
ⓒ 우리꽃 자생화^^^
 
 

뒷동산의 할미꽃
호호백발 할미꽃
젊어서도 할미꽃
늙어서도 할미꽃

내가 살던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야트막한 산에는 묘지가 무척 많았습니다. 특히 우리 마을의 서남쪽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의 남쪽에는 마치 혹처럼 볼록볼록 솟은 공동묘지가 있었습니다. 그 공동묘지 중간 쯤에는 우리 고조 할아버지와 고조 할머니의 무덤도 있었습니다. 어릴 적 우리는 그 공동묘지 근처에서 소를 풀어놓고 소풀을 베기도 했습니다.

우리 마을 사람들이 "앞산가새" 라고 부르는 그 공동묘지가 있는 산 주변은 대낮이라도 혼자 가면 약간 으시시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여럿이 가면 언제나 훌륭한 놀이터 구실을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밤이 오면 어른들은 그 공동묘지에서 도깨불이 날아다닌다며, 아이들에게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습니다.

지금 가만이 생각해보면 밤에 그 공동묘지에서 가끔씩 도깨비불이 반짝거렸던 것은 아마도 부엉이나 올빼미 같은 날짐승들이 날아다니며 내는 눈빛이었거나 여우와 삵괭이 같은 산짐승들이 먹거리를 찾아 돌아다니며 내는 눈빛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그 공동묘지 곁에는 우리 마을 사람들의 다랑이밭이 층층히 쌓여있었으니까요.

그 공동묘지 곁 남쪽에는 우리들 키 두 배가 넘는 탱자나무 울타리가 촘촘히 얽힌 과수원이 있었습니다. 그 과수원 안에는 주로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감나무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해마다 이맘 때면 그 과수원 안에서는 연분홍 복사꽃이 환하게 피어나 약간 어둑한 공동묘지와 묘한 대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당시 우리 마을 사람들은 묘지를 "뫼뜽"이라고 불렀습니다. 또한 그 뫼뜽 주변에는 으레 금방 깎은 할아버지의 턱수염처럼 하얀 솜털이 촘촘히 덮힌 할미꽃이 여기저기 피어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할미꽃은 이상스레 꼬부랑 할머니처럼 늘 고개를 푹 수그린 채 땅만 바라보며 그 검붉은 속내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 무슨 한이 그리도 많아 속으로 붉은 울음 울고 있는 것일까
ⓒ 우리꽃 자생화^^^
 
 

왜 그럴까요? 전생에 무슨 대죄를 지었기에 할미꽃은 땅만 바라보며 피보다 더 검붉은 울음을 속으로 속으로만 울고 있는 것일까요. 언뜻 보면 머리에 서리가 하얗게 내린 꼬부랑 할머니가 마치 무덤가에서 서럽게 곡을 하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특히 비석 옆에 피어난 할미꽃을 바라보면 꼬부랑 할머니가 비석을 부여잡고 통곡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 언뜻 바라보면 흰수건을 쓴 처녀가 무덤가에 엎드려 입가에 피거품을 내뱉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할미꽃에는 당신의 마음을 그리워 한다, 라는 꽃말이 있다고 합니다. 또 슬픈 추억, 슬픔이라는 그런 꽃말도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할미꽃에는 그 모습이나 꽃말처럼 참으로 애달픈 전설이 깃들어 있습니다.

어느 깡촌에 부모를 잃은 두 손녀를 손수 키워 시집을 보낸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기력이 점점 떨어지는 할머니는 이제 더 이상 혼자 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찌 할 수가 없어진 할머니는 마침내 시집 간 손녀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산 너머 마을에는 큰손녀가 살고 있었고, 또 산을 하나 더 너머 작은 손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죽을 힘을 다해 산을 하나 너머 큰 손녀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큰손녀는 거지 같이 초라한 모습의 할머니를 보자마자 문도 열어주지 않고 집으로 쏘옥 들어가 버렸습니다.

심뽀 나쁜 큰손녀에게 그렇게 버림 받은 할머니는 또 산 하나 너머에서 살고 있는 마음씨 고운 둘째 손녀를 찾아가기로 했습니다. 둘째 손녀가 살고 있는 마을을 가로막고 있는 산길은 몹시도 험했습니다. 할머니는 기다시피 하면서 겨우 그 산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기력이 쇠진해진 할머니는 둘째 손녀가 살고 있는 마을이 바라다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할머니를 발견한 둘째 손녀는 할머니를 자기 집이 내려다 보이는 그 마을 언덕에 고이 묻었습니다. 이듬해 할머니의 무덤가에서는 마치 할머니 모습 같은 이름 모를 꽃이 슬프게 피어났습니다.

 

 
   
  ^^^▲ 할미꽃은 무덤가 근처에서 주로 피어난다
ⓒ 우리꽃 자생화^^^
 
 

할미꽃은 미나리아재비와에 속하는 유독성 식물로 특히 뿌리에 강한 독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을에서는여름철이 다가오면 화장실 변기 속에 할미꽃 뿌리를 넣어 여러 가지 벌레가 생기는 것을 막기도 했습니다. 본초강목에는 사람 몸속에 회충이 생겼을 때 할미꽃 뿌리를 달여 먹으면 좋다고 적혀 있습니다.

"할머니가 얼굴에 수염을 달았네"
"바보! 그건 수염이 아니라 할머니의 허연 머리카락이야"

그렇습니다. 할미꽃은 속으로 울다 지치면 마침내 고개를 빳빳히 치켜들고 꼬부랑 할머니의 허연 머리카락 같은 암술을 바람에 훠어이 훠어이 휘날립니다. 마치 제 명을 못 채우고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의 뼛가루를 이 세상 곳곳에 마구 흩뿌리려는 듯이 그렇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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