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재미없었던 월드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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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월드컵 기행] ⑭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上)

 
   
  ▲ 제14회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축구공으로 하나가 되는 월드컵은 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정치적 대립과 이념의 싸움에서도 자유로웠다. 제2차 세계대전때는 중단되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세계인을 '축구'로 통일시켰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첨예한 대립을 펼쳤던 1980년대에도 월드컵은 계속 됐으며, 공산주의가 붕괴되고 탈냉전기에 들어서며 혼란스러웠던 1990년대에도 월드컵은 꾸준히 진보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초월했던 축구와 월드컵은 그렇게 발전하고 있었고, 더 과학화되고 더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사 속에서도 월드컵은 축구공 하나로 그 자리를 확실하게 지키고 있었다.

◆ 제14회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上)

▲ 개최 배경

1980년대 세계는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미국과 공산주의를 주창하는 구소련이란 양대산맥의 지배 속에 있는, 이른바 냉전체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분쟁의 중심엔 항상 두 나라가 끼어 있었다. 미국과 서유럽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 체제와 소련과 중국이 버티는 공산주의 체제는 첨예한 대립을 펼치고 있었다.

이는 스포츠에도 영향을 미치게 돼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불참하자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 국가들은 1984년 LA 올림픽에 대거 출전하지 않았다.

평화와 화합의 제전이라는 올림픽이 이념 갈등으로 반쪽 대회로 전락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월드컵만은 그렇지 않았다. 모든 것이 '흑과 백'의 논리로 좌우되던 당시에도 월드컵은 이념적, 정치적 논리에 휩쓸리지 않으며 한껏 자유를 누렸다.

1984년 미국 LA에서 열린 FIFA(국제축구연맹) 총회에서는 제14회 대회의 개최국을 선정하게 돼 있었다. 이탈리아와 소련을 비롯한 6개 나라가 월드컵 개최 신청서를 내고 치열한 유치 전쟁을 치렀다.

이탈리아는 지난 1934년 열렸던 2회 월드컵에서 '월드컵을 정치적인 목적(파시즘)을 위해 사용했다.'라는 아픈 과거를 씻기 위해 월드컵 유치를 신청했다. 소련은 조금씩 붕괴돼 가는 정치적 이념과 신념을 방어하고, 공산주의의 힘과 우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월드컵 유치 전쟁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소련은 1984년 LA 올림픽 불참이 부담이 돼 월드컵 개최에 실패하게 된다. 명예 회복을 다짐하며 깨끗하고 정치적 색이 개입되지 않는 대회를 주창했던 이탈리아가 반사이익을 얻으며 1990년 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이로써 이탈리아는 1934년 제2회 대회 이후 56년 만에 월드컵을 개최하는 영광을 안았고, 멕시코와 더불어 월드컵을 두 번이나 개최한 나라로 월드컵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 월드컵 뒷얘기

-가장 재미없는 월드컵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1990년 이탈리아 대회는 '가장 재미없었던 월드컵'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는 특급 스타의 부재와 냉전체제 붕괴로 혼란스러웠던 국제정세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뭐니뭐니해도 수비 위주의 축구가 팬들의 흥미를 반감시켰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최전방 공격과 최후방 수비 간의 간격이 25~30m를 넘지 않으며 상대를 강하게 조이는 '압박축구'가 대세였다. 화려한 개인기와 스피드는 힘과 조직력에 밀렸고, 잉글랜드 서독 이탈리아 같은 대부분의 유럽 강호들이 이런 '압박형 수비 축구'를 구사해 골로 죽고 사는 축구의 흥미를 떨어뜨린 것이다.

실제로 서독과 잉글랜드, 아르헨티나와 이탈리아가 맞붙은 4강 경기가 모두 승부차기로 승패가 결정됐다. 서독과 아르헨티나의 결승전에서도 1-0 ,그것도 페널티킥으로 승부가 갈려 화끈한 골과 함께 명승부를 기다렸던 많은 축구팬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압박'에 울었던 스타들

'실점하지 않으면 지지 않는다.' 이탈리아가 신봉하는 카데나치오를 거의 모든 참가국들이 선보인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공간을 허락하지 않는 빡빡한 압박축구에 희생된 많은 축구스타가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 했다.

'위트레흐트의 백조' 마르코 반 바스텐과 '검은 튤립' 루드 굴리트가 이끄는 네덜란드가 16강에서 주저앉고 말았고, '득점 기계'라는 찬사를 받았던 브라질의 카레카와 베베토도 8강전을 치르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또 '골이 있는 곳에 그가 있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천부적인 득점력을 보이며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5골을 넣은 스페인의 부트라게뇨도 단 한 골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훌리건 원천 봉쇄 작전

대회를 준비하던 이탈리아 월드컵 조직위원회의 가장 큰 고민은 경기장도 아니었고 관련 시설 문제나 경제적인 부분도 아니었다. 평화로운 월드컵을 꿈꾸었던 그들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영국의 악명높은 훌리건이었다.

'파시즘'으로 얼룩졌던 월드컵의 오명을 씻기 위해 노력했던 그들에게 훌리건의 폭동과 난동은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것이었다.

그들이 생각해낸 묘책이 있었으니 바로 훌리건들을 고립시키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잉글랜드가 속한 F조의 경기를 사르디니아라는 섬에서 치르도록 했다. 훌리건의 난동 사태가 일어나더라도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을 빠져나오지 못해 경찰에게 잡힐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위험요소를 간파했는지 우려했던 훌리건의 난동은 없었고, 잉글랜드의 경기는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축구는 더 이상 유럽과 남미의 것이 아니야~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개막전에서 세계 축구계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일어났다. 로저 밀러가 이끄는 카메룬이 마라도나가 버티는 '디펜딩 챔피언' 아르헨티나를 1-0으로 꺾는 대이변을 연출했기 때문이었다. 1950년 월드컵에서 미국이 잉글랜드를 제압하고 1966년 월드컵에서 북한이 이탈리아를 꺾었던 것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월드컵 3대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카메룬의 이변은 이변으로 끝나지 않았고 8강까지 진출해 세계에 아프리카 축구의 힘을 보여줬다. 여기에 이집트도 가세해 세계를 놀라게 했으며, 북중미의 코스타리카도 조별 리그에서 유럽의 강호인 스웨덴과 스코틀랜드를 연파하며 16강에 진출해 제3세계 국가들의 축구 실력을 입증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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