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 월드컵 결승에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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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 월드컵 결승에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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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월드컵 기행] ⑩ 1974년 서독 월드컵

 
   
  ▲ 서독 월드컵 포스터
ⓒ fifaworldcup.com
 
 

월드컵으로 인해 더 빠르고 무섭게 성장한 축구는 세계 공통어라는 영어 못지않은 세계적 힘을 과시하며 그 위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지난 멕시코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최초의 3회 우승을 달성하며 초대 월드컵 트로피인 줄리메컵을 영구히 가져갔지만, 이탈리아의 조각가 실비오 가자니가가 디자인한 새로운 'FIFA 월드컵 트로피'는 여전히 수많은 나라의 꿈이자 희망이었다. 어느덧 40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월드컵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제10회 1974년 서독 월드컵

▲ 개최 배경

전 대회의 개최국인 멕시코가 여러 가지 면에서 월드컵을 개최하기에는 모자란다고 하던 세계의 우려를 일축하고, 개최권을 따낸 가장 큰 이유는 월드컵에 앞서 올림픽이라는 세계대회를 개최한 경험이 있어서였다. 이 당시 월드컵을 위해 드는 여러 가지 신축 공사비용과 준비 과정은 엄청난 경제적 투자를 필요로 했으며, 이런 투자를 할 수 있는 국가는 사실 몇 되지 않았다.

이에 FIFA는 올림픽과 세계규모의 대회를 유치한 국가들이 월드컵을 개최하면서, 경제적 손실을 최소화하고 월드컵 효과를 최대로 할 수 있는 국가들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헌데, 당시 FIFA의 이런 개최국 선정 이유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68년 멕시코 시티에서 열린 FIFA 총회에서 서독은 1972년 뮌헨 올림픽의 개최에 힘입어 바로 월드컵의 개최까지 차지하는 영광을 안게 되었는데, 이 또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며 뭔가 개운치 못한 뒷맛을 안겨주었다.

그 이유는 바로 FIFA가 지난 대회에서 멕시코를 개최국으로 선정하며 물의를 빚었던 각종 로비 의혹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올림픽을 개최한 나라를 찾는다는 FIFA의 이유는 너무 초라한 것이었고, 계속 그러한 이유로 개최국을 선정하겠다고 한 것은 지난 멕시코 때의 치욕을 덜어내기 위한 임시방편으로밖에 비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런 FIFA의 방침으로 가장 큰 이득을 본 것은 서독이었다. 세계 대전의 도발국이란 오명 아래 FIFA로부터 눈치를 받던 서독의 월드컵 개최는 최소한 20세기 내에서는 힘들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FIFA는 자신들이 내세운 그러한 원칙을 강조라도 하듯이 1972년 뮌헨 올림픽을 개최한 서독을 개최국으로 선정했고, 서독은 평화의 제전인 올림픽에 이어 월드컵마저 개최함으로써 전쟁 도발국이란 아픈 과거를 어느 정도 씻어낼 수 있었다. 

 
   
  ▲ '토탈 싸커'로 세계 축구계를 흔들던 네덜란드 대표팀
ⓒ fifaworldcup.com
 
 

▲ 월드컵 뒷얘기

영웅 vs 영웅

펠레의 은퇴로 세계 축구를 호령했던 남미는 그 영향력을 점차 잃어가고 있었다. 적어도 마라도나(아르헨티나)와 지코(브라질)가 등장하기 전까지 세계 축구의 정상은 유럽이었다. 당시 유럽은 걸출한 스타들이 활약하며 세계 축구계를 지배했는데, 별 중의 별은 서독의 '카이저' 프란츠 베켄바워와 '득점 기계' 게르트 뮐러, 그리고 네덜란드의 '축구 천재' 요한 크루이프였다.

특히 요한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는 풀리그로 펼쳐진 2라운드에서 아르헨티나(4-0), 동독(2-0), 브라질(4-0)으로 완벽하게 제압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서독도 만만치 않았다. 월드컵 통산 최다 골에 빛나는 게르트 뮐러와 역사상 가장 완벽한 리더로 칭송받는 베켄바워가 포진한 서독은 역시 2차 라운드에서 파죽의 3연승을 기록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그 중에서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워는 시대가 낳은 최고의 선수이자 라이벌이었다. 특히 공격수와 수비수로 경기중 자주 부딪칠 수밖에 없었던 두 선수의 대결은 결국 게르트 뮐러가 힘을 보탠 서독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두 슈퍼스타의 대결에 세계는 넋을 빼앗기고 말았다. 서독 월드컵 결승전은 진정한 영웅과 영웅이 부딪치며 최고의 경기를 펼쳐보였었다.

자이르 대통령의 국수주의가 자국을 탈락시키다.

아프리카의 소국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는 월드컵에 출전한 것만으로도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비록 첫 경기인 스웨덴전에서 0-2의 패배를 기록하긴 했지만, 당시 자이르를 이끌던 베디치 감독은 2차전인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에서 필승을 다짐했다. 헌데 공교롭게도 베디치 감독은 유고슬라비아(현 세르비아-몬테네그로) 출신이었고 이를 너그럽게 지켜보지 못한 자이르의 대통령은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 작전을 짜고 있던 그를 해임하고 만다.

감독이 유고슬라비아 출신이기 때문에, 경기에서 유고슬라비아의 편을 들것이란 어처구니 없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무력으로 자이르의 정권을 잡았던 대통령의 이 어이없는 국수주의로 인해 자이르는 유고와의 경기에서 무려 0-9이란 당시로선 보기 드문 참패를 기록하며 쓸쓸히 귀국해야 했다. 

 
   
  ▲ 서독과 네덜란드의 결승전 장면
ⓒ fifaworldcup.com
 
 

'자갈로 인플루엔자'를 아시나요?

브라질 역사상 몇 안 되는 명장인 마리우 자갈로 감독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과거가 있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한 브라질은 당연히 대회 2연패에 도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 펠레의 은퇴 선언으로 공황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자갈로 감독과 많은 국민이 광적으로 펠레의 복귀를 원했지만, 결국 펠레는 돌아오지 않았다.

펠레를 잃은 브라질은 힘겹게 예선을 통과해 국민으로부터 원성을 샀고, 여기에 펠레와 자갈로 감독이 사이가 좋지 않아 펠레가 출전을 포기했다는 소문까지 퍼지면서 자갈로 감독은 더욱 지탄을 받게 되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 브라질은 네덜란드에 0-2로 패하면서 결승 진출에 실패하고 말았고, 준결승에서도 폴란드에 패하면서 최악의 월드컵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에 수많은 축구팬은 자갈로 감독을 협박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자갈로 감독의 집을 습격하기에 이르렀다. 또, 당시엔 독감이 유행했는데 사람들은 이 독감을 가리켜 '자갈로 인플루엔자'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렇게 힘든 시기를 넘긴 자갈로 감독은 1994년 브라질 대표팀 감독직에 다시 앉아 브라질을 30년 만에 우승시키며 다시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974년 서독 월드컵은 발달하는 현대 문명과 더불어 빠른 속도로 진화하고 있는 월드컵과 축구의 놀라움을 보여준 대회였다. 이에 더 많은 나라가 월드컵에 열광하게 되었고, 이러한 무서운 열기는 곧 축구의 발전에 가속도를 붙였다.

또, 그런 힘을 바탕으로 경기 기술과 관련 인프라 등이 꾸준하게 발전한 축구는 이전보다 더 많은 스타를 배출해내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끝없는 관중을 몰고 다니게 되었다. 동시대에 태어나 최고의 자리를 다투는 라이벌들이 생겨나면서 축구의 인기를 더 치솟게 하였던 것이다. 1974년 서독 월드컵은 그런 라이벌들의 초대 경연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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