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걷는다 에서 -
중국 사람들은 황하와 장강 유역에서 농사짓고 정착한 민족이다. 그런데 그들은 줄곧 세계문화의 중심이란 자존심을 지켜왔다.
시안(西安)은 중국역사에서 13왕조의 수도가 들어섰던 도시로서 예전에는 장안이라 불렀다. 당대(唐代)의 여걸 측천무후와 양귀비가 천하의 권력을 휘둘렀던 곳이다. 기원전 2세기경, 서양의 로마와 동양의 장안은 중앙아시아를 로타리로 삼아 문화를 교류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낙타와 말을 적절히 이용하여 실크로드(silk road)를 열었다.
한(漢)나라의 고민은 북방 오랑캐 흉노였다. 만리장성도 보기만 거창했지 마구 뚫렸다. 황녀와 공물로 달래 보았지만 흉노의 기마군대는 바람처럼 달려와서 약탈을 일삼았다. 한 무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흉노를 협공하고자 장건을 특사로 서역에 보냈다. 연합군 편성을 제안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역, 즉 중앙아시아가 세계교역의 십자로로서 의미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이후 중원의 자존심을 철저하게 짓밟았다. 11세기부터 14세기 명(明)나라 건립될 때까지 송(宋)나라는 거란족의 요(遼), 여진족의 금(金), 몽골족의 원(元)에게 계속 군신의 예를 지켜야했던 것이다. 1128년 두 황제를 볼모로 잡힌 후 마침내 장강 아래로 도읍을 가까스로 정하니 소위 남송(南宋)이었다. 춘추전국 시대 최남단 월(越)나라의 중심지였다.
당시에 주전파이던 장군 악비(岳飛)는 주화파인 재상 진회의 견제를 받고, 금나라의 요구에 따라 아들과 함께 처형됐다. 그리고 북방 영토의 포기는 물론 금을 섬기며 조공을 바친다는 굴욕을 자청했다. 이후 악비는 영웅으로, 진회는 반역자로 평가되었다.
그런데 2003년 12월 중국은 갑자기 민족영웅 논쟁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일부 언론들이 “악비는 외국 침략에 대항한 인물이 아니므로 더 이상 민족영웅이라 할 수 없다”고 보도하면서 파문이 일어났다. 중국은 역사전쟁을 통하여 민족의 만리장성을 허물고, 50여개 민족으로 이뤄진 현대 중화민족의 통합성 및 정체성을 새롭게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역사상 서장, 운남, 몽골, 신장에 관리를 두고 직접 치리한 것은 원나라 이후부터이다. 악비가 활약하던 당시 중화민족은 일체화되기 전이었으나, 정착민과 유목민이 융합된 지금 악비는 통합민족의 영웅 보다 그냥 정착민의 영웅 정도라는 주장이다. 이른바 신악비론이다. 그렇다면 진회는 중화민족 대가정의 가치를 일찌감치 꿰뚫어 본 민족영웅이 된다.
유목 이동민족은 농경 정착민족에 대하여 직각만큼 다르다. 우선 유목민은 고향이 따로 없다. 토지소유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문자가 없어서 과거기록이 무시된다. 종교에 자유롭고, 현실타개에 창의적이다. 무겁고 덩치 큰 물건은 가능한 버리고 속도를 중시한다. 가혹한 자연에서 생존하기 위하여 집단의식이 개체이득보다 앞선다. 수직적 권위가 없고 수평적 협조를 한다. 종합해서 생각해보면 유목민은 오늘날 네티즌과 많이 닮았다.
베이징(北京)은 금나라 이후부터 중국의 수도로서 오늘까지 그 품위를 지켜왔다. 그렇지만 베이징의 의미는 농경민과 유목민의 컨버전스, 즉 융합이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원나라 때의 역참(驛站)으로 연결된 실크로드는 그 융합의 효과를 절정으로 이끌었다. 문화와 종교의 교류는 물론 비단, 도자기, 차, 향신료 등의 교역품 수송 역시 안전과 신속을 겸하게 된 것이다.
중국은 유인 인공위성 선저우(神舟) 6호의 발사 성공으로 국가적 자존심과 국민적 통합 열기가 한층 고조되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2010년 상하이 엑스포, 그러다가 북한을 동북 4성이라 주장할까봐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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