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롱불로 깜빡거리는 삶
호롱불로 깜빡거리는 삶
  • 이종찬 기자
  • 승인 2003.03.13 18: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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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로 보는 세상 2> 김상훈의 '호롱불'

석유를 그득히 부은 등잔은
밤이 깊도록 홰가 났다
끄으름을 까-맣게 들어마시며
노인들의 이야기는 죽구 싶다는 말 뿐이다

쓸만한 젊은 것은 잡혀가고
기운 센 아이들 노름판으로 가고
애당초 누구를 위한 농사냐고
이박사의 이름을 잊으려 애썼다

곳집에 도적이 들었다는
흉한 소문이 대수롭지 않다
삼백석이 넘어 쌓여 있다는 곡식이
그들의 아들이 굶어 죽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었던 까닭이다

암탉이 알을 낳지 않고
술집이 또 하나 늘었고
손주 며느리 낙태를 했다고
등잔에 하소해 보는 집집마다의 늙은이
잠들면 악한 꿈을 꾸겠기에
짚신을 삼아 팔아서라도
부지런히 석유만은 사 왔다



 

 
   
  ^^^▲ 양동민속마을지금도 저 초가집 속에는 호롱불이 깜빡거리고 있을까
ⓒ 경주시^^^
 
 


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호롱불을 켰을 것입니다. 내가 살던 고향마을은 4자와 9자가 붙은 날마다 제법 큰 장이 서는 면 소재지였습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까지 있는 제법 큰 면소재지인데도 불구하고 우리 마을에서도 70년대 초가 되어서야 겨우 전기란 게 들어왔습니다.

그 이전에는 밤마다 그을음이 시커멓게 올라오는 호롱불을 켰습니다. 석유내음이 알싸하게 코 끝을 찌르는 그 호롱불 밑에서 형님이 물려준 책등과 모서리가 다 닳은 책으로 공부를 했습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뚝뚝 부러지는 까만 연필심에다 침을 묻혀가며 책속의 내용을 공책에 옮겨적기도 했습니다.

밤이 깊어지면 할머니의 호랑이 담배 피우던 그런 시절에 나오는 도깨비 이야기를 듣다가 어느새 잠이 들곤 했습니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가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문득 일어나 보면 그때까지도 등불 옆에 길게 드리워진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그림자, 그 그림자 속에서는 세상살이에 대한 이야기 소리가 도란도란 들려오곤 했습니다.

"에구! 내가 너무 오래 살았어. 이 놈의 목숨은 명줄도 길어. 얼른 죽어야 할 텐데…."
"산수골 진해댁 아들은 어제 군인들이 잡아 갔대요. 사상이 이상하다나 어쨌다나"
"듬정댁 아들처럼 노름판에 미쳐서 다니는 것보다야 낫것지"
"에휴! 뼈 빠지게 농사를 지으면 뭘해요. 알짜배기 곡식은 정부에서 다 빼가는데."
"이박산지 뭔지 미국에서 편안하게 공부한 넘이 우리 실정에 대해 뭘 알것어. 미국에서는 박산지 몰라도 우리 나라에서는 벅수지. 벅수 말이야"

그랬습니다. 아랫목에 놓아둔 동그란 요강에 오줌을 누면서도, 다시 이부자리로 들어와 눈을 감고 있어도,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한숨 섞인 이야기는 끝이 없었습니다. "곳집에 도적이 들었다는/흉한 소문이" 심심찮게 들려도, 군내 창고에는 "삼백석이 넘어 쌓여 있다는 곡식이" 있어도 "그들의 아들이 굶어 죽는데는/아무 소용이 없었" 습니다.

그렇습니다. 곳간에 곡식이 삼백석이 아니라 일만석이 쌓여 있으면 무얼하겠습니까.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을요. 곳간을 털었다는 그 도적은 또 누구이겠습니까. 배고픔에 시달려 굶어 죽어가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곳간을 털 수밖에 없었던 바로 우리들의 이웃이었습니다.

얼마나 먹을 게 없었으면 "암탉이 알을 낳지" 못했을까요. 마을에서는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허기와 울분을 달래주는 "술집이 또 하나 늘었고/손주 며느리" 는 자식 키울 자신이 없어 "낙태를 했다고/등잔에 하소해 보는 집집마다의 늙은이" 한숨소리뿐입니다. 하지만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잠들면 악한 꿈을 꾸겠기에/짚신을 삼아 팔아서라도/부지런히 석유만은 사 왔다" 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그랬습니다. 밤을 새워 깜빡거리는 호롱불이 희미하게 사그라들 때면 그제서야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헛기침을 두어 번 하신 뒤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셔서 마당으로 내려섭니다. 그런 날 아침에 코가 맥맥해서 일어나 보면 코 밑이 온통 굴뚝처럼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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