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 즉 혈장(穴場)은 땅 속의 지기(地氣)가 모이는 곳으로 나뭇가지의 열매와 비유하기도 한다. 그래서 명당은 나무의 큰 가지에 열매가 맺지 않듯 가는 가지에, 즉 산맥의 끝부분에 많다고 본다. 명산 또는 큰 산맥 바로 곁에 명당이 없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어떻든 혈장은 가지 끝으로 흐르던 맥(지시)이 뭉친 열매에 비유한 다면 한 가지에 많은 열매가 달리면 그 열매 크기가 작아지듯 혈정도 땅의 지기를 여러 갈래로 나눠 받으면 좋지 않다고 보는 것이 풍수지리의 논리다.
특히 열매가 맺히는 가지 바로 위에 상처를 내면 그 열매가 부실해진다. 묘 주위에 다른 사람이 묘를 쓰면 좋지 않게 본다는 말이다.
마치 열매 도둑맞듯이 명당의 지기를 방해받아 자손들의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고까지 비약시키기도 한다.
60여년 전의 일이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 하산리에 사는 신재지씨는 같은 면내에 사는 성산리의 신선묵씨가 자기 선조의 묘 가까운 땅을 새로 사들여 그곳에 묘를 쓰려 하자, ‘조상의 묘 가까이 타인의 묘를 쓰면 자손이 번영하는 것을 방해할 뿐 아니라 재앙을 받는다’라는 이유를 들어 후손들을 모아 회의를 했다.
회의 결과, 신선묵 씨에게 묘를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그러나 상대도 자기 선조의 묏자리에 대한 생각은 마찬가지여서 그 요구를 묵살했다. 이에 화가난 신재지 씨 친족 150여명이 신선묵씨 집에 찾아가 협박했다고 한다. (경성일보 1927년 3월 2일자 보도)
풍수지리가 미신이냐 아니냐를 논하기 이전에 우리 선대들은 풍수의 논리를 지금의 과학만큼이나 믿었다는 사실이다.
또 경성일보 그해 7월 16일자에는 강원도 평창군 서화면에 사는 한문선생 김덕경씨는 자기 아버지가 병석에 누운 것이 12년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산소 탓이라고 생각, 묘를 속히 이장하지 않으면 생명이 위독하다고 믿어 당국의 허가도 없이 묘를 발굴, 이장했다는 내용이 보도되어 있다. 당시는 일제하에 있었기 때문에 장지를 공동묘지 이외에는 쓰지 못하도록 관장하고 있었다. 공동묘지는 우리 고유전통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산물이라 여겨 이때부터 흉지로 인식되어 왔다.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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