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앞에 놓은 평석을 왕릉에서는 혼유석, 일반은 상석(床石)이라고 하듯 왕릉과 민가의 묘제는 다른 점이 많다.
우선 민가에서는 산소에서 제사를 지낼 때 무덤위쪽에 올라가 산신(山神)에게 먼저 제를 올린 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지만 왕릉인 경우는 왕이 이 땅의 주인이고 최고 일인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사를 지낸 뒤 왕릉 밑 오른쪽에서 산신제를 지낸다. 또 왕릉이 민간묘와 다른 것 중 하나는 비석의 위치이다. 왕릉은 정자각 오른쪽에 신도비라는 이름의 비각이 있지만 민가의 묘에는 묘 바로 앞 오른쪽에 비석을 세운다. 비석의 앞면을 표석(表石)이라고 하고 뒷면을 이면이라 하지 않고 음기(陰氣)라고 한다.
돌을 깎아 글씨를 새겨서 세운 돌이라는 뜻의 비(碑)는 모난 것을 비(碑)라고 하고 모서리를 둥글게 한 것을 갈(碣)이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거의가 사람의 공덕을 중심으로 죽은 이의 평생 사적을 기록하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왕릉의 신도비에는 앞뒤에 명문만 있을 뿐 양옆은 아무 글씨도 새기지 않는다. 이 역시 일반 비석과는 다른 점이다. 신도비는 우리나라 조선조에서는 2품 이상의 품관이라야 세울 수 있었다.
묘비와 신도비의 이름은 다르지만 그 본질은 같아서 모두 동남방에 세우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그리고 묘의 명칭도 능(陵)과 묘 외의 원(園)이라는 것이 있다.
능은 왕이나 왕후의 산소를 말하지만 원은 왕세자, 세자빈, 세자손, 왕세손, 빈과 왕의 사친(私親)의 산소를 말한다.
묘는 그 밖의 왕족과 보통사람의 무덤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건원릉이라고 하면 조선 태조의 산소이고, 소령원이라고 하면 영조의 사친 최씨의 산소이며, 성묘라 하면 광해군의 생묘 산소를 말한다. 그런데 원에다 비를 세웠다 해도 원비(園碑)라고 하지는 않는다.
이런 묘제는 엄격해서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능은 처음엔 지금의 정동에 있었다. 능의 이름은 정릉. 그런데 방번, 방석의 난으로 두 아들이 죽자 정릉이 묘로 강등되고 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으로 천장되었다. 나중에 다시 정릉으로 승격되었으나 강등될 때 능 봉분 주위에 둘러쳐진 난간석은 철거되어 수표교 난간석으로 이용되었다. 이수표교가 1958년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현재의 장충단으로 옮겨져 지금의 정릉엔 난간석이 없다.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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