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않는 새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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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않는 새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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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먼저 깨어난 사람은 태진이었다.

소영이는 얌전하게 잠들어 있었다. 피곤한지 약간 벌린 입 사이로 잘 익어 촘촘히 박힌 찰옥수수처럼 예쁜 그녀의 앞니 몇 개가 가지런히 보였다. 태진은 아무렇게나 벗어던져진 옷을 입었다. 이제 돌아가야 했다. 집에 진희 혼자 놔두고 여기서 밤을 새울 수는 없었다. 그것은 진희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허리를 구부려, 잠든 소영의 입술에 살며시 입술을 포개었다. 소영이 거슴츠레한 눈을 떴다.

“이제 가야 돼.”
“방금 뭐라고 했어요?”

소영은 잠결이라 미처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가야 한다고.”
“어딜요? 지금 몇 시예요?”

소영이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집에 가야 해.”

태진은 다시 한 번 말했다.

“꼭 가야 돼요?”

소영이 두 팔로 그의 목을 얼싸안고 눈을 맞췄다.

“미안해.”

태진은 진심이었다.

“일 때문이라면, 내일로 미루면 안 돼요?”

소영이 칡덩굴처럼 그의 목을 휘어감았던 팔을 풀며, 토라진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나도 정말 가기 싫어.”

태진은 그런 소영의 뺨을 감싸쥐고 자기 쪽으로 돌렸다.

“꼴도 보기 싫어요.”

소영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 이러지 마.”

태진은 담배를 뽑아 물었다.

소영이 몇 번 빨지 않은 그의 담배를 뺏어다 물었다. 그녀의 유난히 긴 손가락 사이에 들려있는 담배를 보다, 손톱에 칠해진 짙은 갈색 매니큐어가 참으로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조명 탓일까, 소영의 얼굴이 연분홍 봉숭아 꽃물을 들인 것처럼 보였다. 태진은 그런 소영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문득, 이 여자가, 이토록 아름다운 여자가 정말 내 여자인가 하는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소영이는 담배를 다 피우도록 말이 없었다. 이따금 눈을 가늘게 뜨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이태진 선생님!”
“?”

태진은 갑자기 소영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바람에 긴장이 됐다. 태진을 보는 소영의 얼굴엔 어떤 비장한 각오를 다진 듯한 엄숙함이 서려있었다. 덩달아 태진도 더 긴장이 됐다.

소영인 그의 이름을 불러놓고 얼굴만 볼 뿐 한동안 말이 없었다. 태진은 불안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일까.

“우리 결혼해요!”
“!”
“당장! 내일이라도 좋아요.”
“소영아!”
“진심이에요.”
“…… 결혼은 장난이 아냐.”

태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저도 알아요.”

소영이의 표정은 결연했다.

“안 돼. 그건 말도 안 돼.”

태진은 고개를 저었다.

“왜죠?”

소영이 따지듯 물었다.

“지금 소영이는 인기가 절정에 달해 있어. 결혼하면 타격이 커. 누구보다도 네가 그걸 잘 알잖아. 그런 선배들도 많이 보아왔을 것이고…… 인기란 한낱 물거품같은 거야.”
“알고 있어요.”
“아는 사람이 그래?”
“과거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져요.”
“…… 소영인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지?”

태진은 소영이가 순간적인 감정에 휩싸여 결혼이란 말을 내뱉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일었다. 이 세상의 수많은 남녀가 순간적인 격정에 휩싸여, 분위기에 젖어 쉽게 내린 결정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날들을 번민하고 괴로워하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소영이와 자신 사이에서만은 그런 잘못을 범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진정으로, 소영이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진은, 소영이가 자신으로 인해, 한 순간의 잘못된 결정으로 인해, 많은 날들을 고통 속에서 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전 선생님에 대해서 몰라요.”
“…….”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선생님은 제가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열 배, 아니 백 배, 천 배 더 저를, 이 민소영이를 사랑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다는 거예요.”
“!”
“그건…… 느낌이에요. 인간이 인간을 대함에 있어 느낌보다 정확한 것은 없어요. 전 그 느낌을 믿어요.”

태진은 소영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인간 관계에서는, 더욱이 사랑하는 연인들에게는, 이 세상의 어떤 과학적인 수치나 근거나 이론보다 느낌만큼 더 정확한 것은 없었다.

“솔직히, 나도 소영이 너를 사랑해. 하지만…….”
“하지만 뭐요?”
소영이 그의 말을 되받았다.
“…… 부담스럽기도 해.”
“…….”

이번에는 소영이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한참 후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태진은 지금 소영이가 자신의 말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고개를 끄덕거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묻고 싶지는 않았다.

“나 갈게.”

태진은 긴 침묵 끝에 일어섰다.

현관까지 따라나온 소영이 문을 열고 나가는 태진의 등에 대고 말했다.

“고마워요, 선생님.”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태진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그러나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돌아보면 도저히 정릉 집으로 갈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밖에는 여전히 천둥과 번개가 굶주린 맹수처럼 으르렁거리고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차에 올라 차창으로 소영의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아!

소영이었다. 놀랍게도 소영이는 베란다에 서서 그렇게 쏟아져 내리는 폭우를 온몸에 맞으며 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과 얇은 원피스가 바람에 깃발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태진은 한동안 시동도 걸지 않은 채 앉아 있었다. 그냥 이대로 다시 소영이의 집으로 뛰어가고픈 충동과 덩그렇게 큰 집에 이 회장까지 납치해 놓은 상태에서 홀로 있을 진희 생각에 갈등을 느꼈다.

태진은 시동을 걸었다.

차를 출발시키기 직전, 베란다를 올려다보았다. 소영이는 그때까지 베란다에 서서 자신의 차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태진은 눈을 질끈 감고 가속 페달을 힘차게 밟았다. 그리고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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