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이 소풍을 가거나 청춘남녀들의 데이트 장소로까지 변해 버린 서울 근교의 왕릉도 잘 관찰하면 많은 역사적 교훈과 우리 조상들의 사상적 근간을 알 수 있게 한다.
왕릉에 대한 기록은 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등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런 것들은 당시에는 일반에게 알려지지 않은 궁내 비밀문서였다. 그런데 이 기록에 따르면 왕릉은 하나같이 무덤의 깊이를 십 척으로 했다는 것이다.
흔히 일반 서민들 사이에서는 지방마다 다르긴 하지만 무덤, 즉 광중을 팔 때 ‘상투끝이 보일락말락할 때까지 파라’는 속설을 들먹인다. 이것을 감안하면 일반의 무덤이 다섯 자에서 여섯 자 사이인데 비해 왕릉은 거의 배에 가까운 깊이인 셈이다.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시신이 추운 겨울에도 얼지 않게 함은 물론 뱀, 개구리 등 충(蟲)염과 나무뿌리 등 목(木)염이 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지만 사실은 땅의 기 중 왕기(王氣)는 열(十)의 위와 아래를 막은 형태이어서 열 자 깊이에 왕비가 있다고 해석하고 이를 믿어왔던 것이다.
이 극비(?)의 내용이 일반인들에게 알려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온 것은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무덤을 그 비방대로 써 왕기를 타고 태어나는 사람들이 많아져 통치상 혼란이 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왕릉 치산에 참가했던 지관들은 불문율로 이 왕릉의 비밀을 지켜왔다. 그 사실이 새어 나가면 천기(天機)누설로 처벌을 받게 될까 두려웠던 것이다.
왕릉 입구의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돌길을 무심히 걸을 때 옛날 사람들은 돌길 하나 제대로 못 깔았나 하는 의문을 갖는 사람도 있다. 자세히 보면 돌길은 중앙을 경계로 왼쪽 길이 약간 얕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높은 쪽은 신도(神道), 얕은 쪽은 임금이 걷는 어도(御道)이다. 즉 하나는 임금도 감히 걷지 못하는 신(혼)이 다니는 길이다. 그리고 정자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오른쪽에는 두 개가 있는데 왼쪽에는 하나밖에 없음을 발견할 수 있다. 동쪽에서 올라와 서쪽으로 내려가는데 오른쪽에 화려하게 장신된 계단은 역시 신이 사용하는 계단이다. 신은 올라간 뒤 제각에서 능으로 올라가 버리기 때문에 서쪽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두 개일 필요가 없다.
[김호년 선생의 우리강산 풍수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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