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기둥 - 4
소금 기둥 - 4
  • 이영철 소설가
  • 승인 2005.08.18 14: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에요.”

진희는 다 마신 커피잔을 탁자 위에 놓고 일어섰다.

“가지.”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실행만이 남아 있었다.
거리는 한산했다.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L호텔에 도착하면 시간이 남을 거 같았다. 옆에 앉은 진희의 모습이 낯설어보여 자꾸만 시선이 갔다. 그녀의 평소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완벽한 변신이었다. 짧은 머리의 가발도 그렇고, 진한 화장으로 전혀 딴 사람처럼 변해있었다.

“불쌍한 영감탱이…….”

차가 L호텔을 바로 앞에 두고 신호등에 걸렸을 때, 진희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늘 납치하기로 한 이만덕 회장을 두고 한 말이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겨우내 입은 칙칙하고 무거운 색의 옷을 벗고, 얼굴 표정도 그만큼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비가 한바탕 쏟아질 거 같군.”

태진은 침묵을 깼다.

“선생님을 만난 건 운명이었어요.”

진희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
“우연같은 필연…….”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해?”

태진은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그만큼 진희의 말이 진지했고, 지금 상황에 걸맞지 않는 엉뚱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너무 예민하게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듣기에 따라서는 상당히 의미를 담은 말로 들렸다.

신호가 바뀌었다.

차가 앞으로 튀어나갔다. 따라서 대화는 거기서 중단됐다. 두 사람은 호텔 지하 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더 이상의 대화는 나누지 않았다. 지하 이발소와 곧바로 통하는 주차장은 적당히 비어 있었다. 차를 이발소로 들어가는 길목 옆에 세웠다. 태진은 다시 한 번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변장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가능한 한 카메라에 얼굴이 노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아직 오지 않은 거 같아요.”

진희 역시 챙이 넓은 모자를 눌러쓰고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카메라에 노출되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지.”

태진은 차에서 내려 이발소와 통하는 계단으로 갔다. 아직 일을 시작하기 전인데도 가슴이 뛰었다. 누군가 숨어서 두 사람의 수상한 행동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주의 깊게 지하 주차장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사람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신경과민이었다.

“내가 봐도 진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겠어.”
“그건 선생님도 마찬가지예요. 치렁치렁한 긴 머리, 굵은
뿔테 안경, 얼굴을 온통 뒤덮은 덥수룩한 수염이 마치 헤비메탈 가수를 연상시켜요.”
“멋있어?”
“반할 정도로요.”

진희의 말에 태진은 소리내어 웃었다.

극도의 긴장을 잊기 위해서였을까. 그들은 별것도 아닌 말에 함께 웃었다.

태진은 생각했다. 진희가 아무리 강심장이라 해도 자신처럼 떨릴 것이라고. 한 순간 삐끗 일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끝난다. 앞으로의 인생은 예측이 불가능했다. 어쩜 평생을 교도소에서 지내야 하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도 몰랐다.

“이 시간쯤이면 올 때가 됐는데…….”

진희는 손목시계를 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태진은 문득, 소영이 떠올랐다.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막바지 촬영을 하느라 카메라 앞에 서 있을까. 아니면, 잠시 휴식 시간에 담배를 피우고 있을까.

보고 싶었다. 뜨겁게 키스하고 싶었다. 아니, 서로 몸을 불태울 듯이 부둥켜 안고 침대 시트가 땀에 흠뻑 젖도록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녀의 콧소리 섞인 들뜬 신음을 듣고 싶었다. 태진은 소영이를 생각하다 순간적으로 눈물이 핑 돌았다. 어쩜 오늘 일이 잘못돼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방정맞은 생각이 빠르게 뇌리를 스쳤기 때문이었다. 태진은 그런 불길한 생각들을 지우기라도 하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그때였다.
“왔어요!”

진희의 낮지만 절제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태진은 소영이 생각에 젖어있다 번뜩 정신이 들었다. 몸을 숨기고 주차장을 보았다. 이 회장을 태운 검정색 벤츠가 미끄러지듯 들어와 빈 주차 공간에 멈추어 섰다. 진희가 조사한 대로 이 회장과 운전기사 단 둘뿐이었다. 운전기사는 차에서 잽싸게 내려, 이 회장이 타고 있는 뒤쪽 문을 열었다.

두 사람은 그들의 작은 행동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노려보았다. 이 회장은 오늘이 바로 자신에겐 운명의 날이라는 것도 모른 채, 거드름이 잔뜩 밴 몸짓으로 비대한 몸을 이끌고 차에서 내렸다. 운전기사는 그 앞에서 비굴할 정도 몸을 낮추고 있었다.

“앞으로 두 시간 후에 나올 거예요.”

진희가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두 사람은 이 회장을 앞질러 지하 계단을 통해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앞으로 두 시간 동안 쇼핑도 하고 커피숍에서 한가롭게 보낼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목표물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정확히 사냥하는 일만 남았다. 표범이 단숨에 내달아 일격에 사냥감을 쓰러뜨리듯 해야 했다. 사냥감을 향해 내닫기까지는 여유롭게 힘을 비축하며 충분한 휴식을 취하듯, 두 사람도 사냥을 앞두고 여유를 찾고 싶었다.

진희가 팔짱을 꼈다.

“마치 연인 같지 않아요?”
“잘 어울리는?”
“그렇게 생각하세요?”
“아닌가?”
“아니에요, 맞아요. 우린 어울리는 한 쌍이에요.”

일 층에서부터 천천히 매장을 둘러보았다.

당장 필요하진 않지만 지갑과 벨트 등 부피가 나가지 않는 물건을 샀다. 더불어 진희의 화장품 몇 가지와 스카프도 샀다. 진희는 몹시 좋아했다. 태진이 고른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두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쇼핑 나온 연인들의 모습이었다.

태진은 스카프를 두르고 거울 앞에 서 있는 진희에게 물었다.

“마음에 들어?”
“색상이 내 맘에 쏙 들어요.”
“진작 사 줄 걸.”

태진은 좋아하는 진희의 모습을 보며 덩달아 기분이 밝아졌다. 내친 김에 숙녀복 매장에 들러 봄옷 몇 가지도 골랐다. 환한 빛깔의 정장이었다.

“오늘 횡재하는데요.”
“이 정도가 횡재라면 매일 해 줄 수도 있어.”
“하여튼 고마워요.”
“별말씀을.”

그들은 L호텔 꼭대기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올라갔다.

“오늘따라 커피 맛이 각별하네요.”

진희가 따뜻한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며 말했다.

커피숍 창 밖으로는 비구름이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아침 뉴스 시간 끝에 있은 일기예보가 맞은 모양이었다. 서울과 경기도 일대에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폭우가 쏟아질 거라는.

“비가 올 거 같죠?”
“그래. 한바탕 속이 시원하게 쏟아졌으면 좋겠어.”

태진은 음울하게 가라앉은 도심을 오래도록 내려다보았다.
태진은 시계를 보았다.

이 회장이 이발소에 들어간 지 두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 몇 분 후면 오늘 사냥감인 이 회장이 나타날 것이다. 손에 들고 있는 전자 충격기를 시험해 보았다. 이상 없었다. 가방에 있는 폭 넓은 테이프도 확인했다. 주차장은 한산했다. 어쩌다 오가는 차들이 보일 뿐이었다. 일을 하기에는 최상의 상태였다.

그때였다.
이 회장의 운전기사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이미 예상한 일이었다. 이 회장이 이발소에서 나오기 5분 전쯤에 연락을 받았을 것이다. 진희와 눈을 마주쳤다. 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희가 운전기사에게 다가갔다.

“이 회장님 운전기사시죠?”
“그런데요?”

그는 낯선 여자의 물음에 ‘왜 그러느냐?’는 듯이 진희를 훑어보았다.
진희는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저는 이발소에서 이 회장님 시중을 들던 아가씬데요.”
“아, 그래요?”

운전기사는 굳어있던 표정을 금세 폈다. 그리고는 가느다랗게 실눈을 뜨고, 빠르게 진희의 옷차림과 몸매를 보며 음흉한 눈길을 주었다. 진한 화장에 야하고 요란하게 차려 입은 진희를 보는 그의 눈엔 물엿 같은 끈적끈적함이 묻어 있었다.

“회장님이 쇼핑할 게 있으시대요.”
“쇼핑요?”
“백화점 5층 신사복 코너에 들르시고, 7층에서 가구를 보
실 게 있으시다며 기사님을 오시라고 해서…….”“그래요? 거 참 이상한 일이네. 직접 쇼핑을 하시는 분이 아니신데…….”

사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진희는 재빨리 둘러댔다. 이렇게 한가하게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금방이라도 이 회장이 나타날까 봐 조바심이 났다.“하여튼 전 말씀을 전해 드렸어요.”

진희가 고개를 약간 숙여 인사하고 막 돌아서려는 순간이었다.
“잠깐만요.”

사내가 진희를 불러 세웠다.
태진은 숨어서 지켜보면서 초조했다. 만약에 대비해 튀어나갈 준비를 했다.

“왜요?”

돌아서는 진희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 이발소에서도 그렇게 옷을 입나요?”

사내의 시선이 예리하게 빛났다.
“아,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요, 잘 아시다시피 이 호텔 이발소는 고급 손님들만 드나드시잖아요. 그래서 이발소에서
한 발짝만 나오려 해도 옷을 갈아입어야 돼요. 얼굴이 알려지는 것을 주인이나 손님들이 꺼려해서.”
“아, 그래요! 그래서 실내에서도 선글러스를 썼군요. 좀 이상하다 생각돼서요.”

사내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날카롭던 시선을 풀었다.

“뭐하세요. 이 회장님이 기다리시겠어요. 성미가 불같이 급하신 분이시잖아요.”
“이크, 그렇네. 알았어요. 아가씨, 만나서 반가웠어요.”

사내는 진희를 향해 윙크하고, 태진 앞을 스쳐 지하 계단에서 위층을 향해 계단을 두 칸씩 건너뛰어 올라갔다.

“이 회장이 없는 것이 확인되면 곧바로 내려오지 않을까?”

태진은 사내가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진희에게 빠르게 다가서며 물었다.

“그럴 염려는 없어요. 이 회장이 보이지 않아도 10분 정도는 찾으러 다닐 거예요.”

태진은 진희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눈은 빠르게 주차장을 살폈다. 가까이에 사람이 있으면 낭패였다. 태진은 담배 한 대 피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하지만, 꽁초 같은 아주 사소한 단서라도 남기면 안 되기 때문에 참았다. 진희는 차 백미러로 자신의 얼굴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있었다.
그렇게 2분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와요!”

진희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태진은 바짝 긴장하며 계단을 보았다. 이 회장이 말끔하게 머리를 다듬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예상대로 혼자였다. 태진은 전자 충격기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때마침 주차장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진희가 태진에게 눈짓을 하고 이 회장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이 회장님.”
“누구신지?”

이 회장은 걸음을 멈추고 의아한 표정으로 진희를 보았다.

태진은 진희가 그에게 말을 거는 사이에 재빨리 그의 뒤로 갔다.

“절 모르시겠어요?”
“그, 글쎄…….”
“절 못 알아보시다니 정말 서운한데요.”

진희는 계속해서 이 회장의 신경을 자신에게 쏠리게 했다.

태진은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이 회장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천천히 다가간 태진은 재빠르게 전자 충격기를 그의 목덜미에 댔다.

“으헉!”

이 회장이 낮은 신음을 내며 휘청했다. 만약을 위해 한 번 더 이 회장의 몸에 전자 충격기를 댔다. 그대로 무너졌다.

“서둘러!”

태진은 낮지만 절도 있게 말했다.

우선 입에 재갈을 물리고 테이프로 봉했다. 다음엔 그를 트렁크로 옮기고, 테이프로 손과 발을 묶었다. 일 초가 급했다. 만약 이 순간에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큰일이었다. 테이프 한 개를 거의 소모시키며 그를 거미줄에 묶인 나비처럼 칭칭 동여맸다. 조금도 움직일 수 없도록. 너무 긴장한 탓인지 이마에서 땀이 솟았다. 다리도 후들거렸다. 입 안도 불 붙은 숯덩어리를 머금은 것처럼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작업 시간은 채 일 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몇 시간이 흘러간 느낌이었다.

“출발!”

태진은 트렁크 문을 세차게 닫고 운전석에 뛰어올랐다.

진희도 재빨리 옆에 탔다. 차가 막 주차장에서 빠져나갈 때, 잇달아 석 대의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잠시만 꾸물거렸어도 이들의 눈에 발각되었을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주차장에서 빠져나온 태진은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물었다. 거리에는 굵은 빗방울과 함께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었다. 길가에 서 있는, 이파리가 아기 손바닥만큼 돋아난 가로수들이 비바람을 맞으며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태진은 차가 광화문 교보빌딩 앞을 지날 때에야 비로소 입을 열었다.

“성공이지?”
“네, 완벽했어요.”

진희가 미소 띤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설마 죽진 않았겠지?”
“개에게 몇 번이나 실험해 봤잖아요. 지금쯤 깨어나고 있을지도 몰라요. 사람이 개보다는 강할 테니까. 죽어도 별수 없지만…….”

진희가 내뱉듯이 말했다.

“지금쯤 운전기사는 이 회장을 애타게 찾고 있겠지?”
“비상이 걸렸을지도 모르죠. 이발소에 나 같은 아가씨가 없다는 것이 확인됐을 테니까요.”
“깨어났다면 영감탱이가 잔뜩 겁을 먹고 있겠죠?”
“지난번 김 PD처럼 바지에 똥이나 안 쌌는지 몰라.”

이 회장은 입에 테이프를 몇 겹이나 붙인 채,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끙끙대고 있었다. 그를 트렁크에서 내려 공처럼 바닥에 굴렸다. 그리고 이 회장을 묶은 테이프를 나이프로 잘랐다. 그는 일어서지도 못하고 콘크리트 바닥에 누워 살찐 애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똑바로 서, 이 새끼야!”

진희가 발로 그의 엉덩이를 내질렀다.

이 회장은 코방아를 찧었다. 일어서는 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살찐 볼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똑바로 못 서!”

다시 진희의 발이 버둥거리고 있는 그의 가슴에 비수처럼 무섭게 파고들었다.

그는 한참을 버둥대다 겨우 몸의 균형을 잡고 일어섰지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안락한 회전의자에 앉아 수많은 사람 위에 군림하던 모습이라곤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살찐 돼지처럼 추해 보였다. 진희가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테이프를 확 잡아 뗐다. 테이프에 그의 송충이처럼 짙고 굵었던 눈썹이 잔뜩 묻어났다.

그는 아직도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지 불안한 눈망울을 초점도 없이 굴렸다.

“이리 와!”

진희가 그의 어깨를 세차게 낚아챘다. 그리고 그의 손목에 쇠고랑을 채운 다음에 입에 물려 있는 테이프를 뜯어냈다.

“다, 당신들은 누구요?”

그가 위엄을 찾으려 안간힘을 쓰며 물었다.

“우리? 급할 거 없어. 차차 알게 될 거야.”

진희가 코웃음을 쳤다.
“목적이 뭐요? 돈이오?”
“…….”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누군가가 시킨 거요?”
“…….”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뭐요? 당신들이 나를 납치한 목적이?”
“조용히 해, 이 색마야!”

진희의 주먹이 그의 불록 나온 똥배에 둔탁한 소리를 내며 정확히 꽂혔다.
그는 불에 닿은 벌레처럼 버둥댔다. 이따금 숨을 내쉬기는 하는지 끽끽댔다.
“한 번만 더 주둥이를 놀리면 입을 짓이겨버릴 거야!”
태진이 들어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비가 참 추상적으로 내리네요.”
비 내리는 창가에 앉아 두 사람은 위스키 한 잔씩을 들고 있었다. 성공을 자축하는 축하주였다. 그들은 또 성공한 것이다. 그것도 완벽하게.

번개가 크게 일었다.

나무 뿌리 같은 번개의 줄기가 어딘가에 내리꽂혔는지,
“우르르― 꽝!”
잠시 후 요란한 천둥 소리가 뒤를 이었다.
진희가 태진의 어깨에 몸을 기대어왔다.
태진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변장한 가발이나 수염도 채 떼어내기 전이었다. 진희의 이마에 입술을 댔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촉감이 입술을 타고 전해져왔다. 이대로 그냥 한숨 푹 자고 싶었다.
그때였다.

정적을 깨고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기 시작했다.

‘누굴까? 혹시?’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눈길을 마주쳤다. 한번 울리기 시작한 전화벨은 계속해서 천둥 소리보다 크게 두 사람의 고막을 때렸다.

“삐리리릭… 삐리리릭…….”


[계속]

 

핫이슈포토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