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묘(東廟)의 관운장과, 어느 취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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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묘(東廟)의 관운장과, 어느 취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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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타운

동묘(東廟:서울시 종로구 숭인동 238-1번지)는 중국 촉한(蜀漢)의 장수인 관운장을 모신 사당이다. 관운장은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신의 있는 장수중의 하나로 중국인들은 그를 두고 관왕(關王)으로 추존하고, 관제(關帝)로 까지 호칭하며 숭배한다. 관운장이 왜 한국 땅에 관왕묘(關王廟), 즉 동묘(東廟)에서 한국인으로부터 숭배를 받아야 하는 수호전신이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머리 좋은 중국 정치인들이 한국에 또 하나의 사대주의를 강요하는 정책에서 한국인들로 하여금 관운장을 숭배하게 하는 소위 강대국의 음모라고 나는 정의한다.

관운장은 의형제요, 주군인 유비(劉備)를 만나기 전에는 시골 마을에 아이들에게 초급 천자문을 가르치는 작은 서당의 훈장으로 호구지책(糊口之策)을 삼는 힘 좋은 젊은이였다.

당시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으로 한제국(漢帝國)이 위기에 처했을 때였다. 유비는 고향인 탁군 탁현 누상촌이라는 마을 집에서 돗자리를 짜서 생계를 유지하는 데, 황건적을 타도하고 한제국을 도와야 한다는 명분으로 관운장과 장비의 3인이 의기투합하여 도원(桃園)에서 의형제의 결의(結義)를 했다.

의형제의 순서로 나이는 관운장이 많았다. 하지만, 유비가 전한(前漢) 제6대 경제의 9남 중산정왕 유승의 후예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이를 떠나 유비를 주군이요, 형님으로 모시는 의형제의 서열을 정했다.

가세가 몰락하여 돗자리를 짜서 호구지책을 삼아야 하는 유비, 천자문을 가르치는 훈장인 관운장, 돼지 등 도살업을 해서 호구지책을 삼는 장비가 단결하여 마침내 천신만고 우여곡절 끝에 촉한(蜀漢)을 건국한 이야기는 고금을 통해 젊은이들이 좋아하고, 따라 하기를 좋아하는 의형제간의 신의(信義)의 모범이라 하겠다.

하지만 내가 분석 할 때에는 유비, 관운장, 장비는 출중한 병략가(兵略家)는 되지 못했다고 논평할 수 있다.

그 주장의 근거는, 관운장 등은 천하통일을 하지 못하는 한계의 능력 속에 관운장과 장비는 비명횡사를 당해야 했고, 유비는 무명의 사졸들의 해골을 산처럼 만들어 촉나라를 건국 했지만, 반세기도 못 채우고 멸망하고 마는 사전에 유비의 태부족한 병략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이 없었던 것이다. 머리 좋은 제갈공명도 한고조에게 한 제국을 만들어준 한신(韓信) 장군에는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작은 군사(軍師)였을 뿐이다.

도대체 한국 땅에 관운장은 왜? 언제부터 한국인들이 바치는 숭배의 헌사(獻辭)와 향화와 주육과 과일, 떡 등 공물(供物)을 받게 되었나?

그것은 분석하고 보면 중국 정치인들이 신하국(臣下國)으로 대하는 한반도의 나라들에 강요하는 또 하나의 사대주의였다. 예컨대 중국 정치인들은 한반도 출신의 불세출의 명장에 대해 숭배하는 것을 고의적으로 전면 금지하고, 오직 중국 장수들을 군신(軍神), 전신(戰神), 수호신(守護神)으로 숭배하기를 강요한 것이다.

관운장에 대한 숭배하는 묘(廟)가 건립된 것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돕기 위해 파병한 명군(明軍)의 장수들이 은밀히 명황제의 칙명을 받아 선조(宣祖) 임금에게 요구하여 관운장의 묘(廟)가 건립된 이유이다.

명군(明軍)은 서울에 두 곳에 묘(廟)를 건립하게 했으니, 남대문 밖에는 선조 31년(1598년)에 남관왕묘(南關王廟)를 세우고, 동대문 밖에 선조 32년(1604년)에 동묘(東廟) 즉 동관왕묘(東關王廟)를 건립하게 해서 한국인들에 수호신으로 숭배하고 예배하게 했다. 중국 정치인들과 장수들은 한국인을 우습고 만만하게 보아 촉한(蜀漢)의 장수인 관운장을 한국인이 맹종하는 전능한 신(神)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영리한 한국인들은 관운장을 신으로 섬기라는 중국 정치인들의 계략에 혼백을 빼앗기지는 않았다.

중국군이 한국 땅에 주둔할 때에는 조선의 왕이나 백성들은 관운장에게 공물을 바치고 예배를 했지만, 중국군이 일군(日軍)에 패주했을 때부터 약속이나 한 듯이 관운장을 찾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동묘는 소위 벼룩시장의 중심에 서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자장 싸구려 제품들, 고물들(뜻밖에 고물로 횡재할 수도 있다.)을 팔고 사는 시장판의 한쪽 귀퉁이에서 초라하게 동묘는 잔존해 있는 것이다.

나는 가끔 혼자 지하철을 타고, 동묘를 찾는다. 벼룩시장에는 헌책방이 세 곳이 있어 헌책을 찾기 위해 가는 것이다.

어느 가을 날, 관운장이 있는 동묘를 찾았는데, 관운장의 등신상(等身像)앞에 선 어느 노(老) 취객이 관운장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호통을 치고 있었다.

"관우야, 네 이놈, 네놈이 어찌 이 땅의 신 노릇을 한다는 말이냐? 네 이놈, 당장 네 나라로 꺼지지 못해. 관우야, 이 놈아…!" 80근 짜리 청룡 언월도의 고수인 관운장이 동묘에서 온갖 수모를 감내하고 있었다. 내가 들으니 관운장상 앞에서 취객들이 "물러가라!" 욕설을 퍼붓는 취객은 수다하다는 전언이다.

나는 수모를 당하는 관운장의 상(像)을 동정하며, 인천에 동상으로 서 있는 맥아더 장군을 떠올렸다. 맥아더 장군도 친북, 종북이들이 밧줄을 맥아더의 목에 걸어 쓰러뜨리려는 음모를 실행시키려 한지 오래이다.

물론, 고래고래 맥아더장군에게 욕설을 퍼부으면서 말이다. 만약 미군이 철수하면 친북이, 종북이 들 탓에 맥아더 장군은 모진 수모와 함께 동산은 파손될 수 있다. 작금에 맥장군의 상이 아직도 존재하는 이유는, 첫째, 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둘째, 맥아더장군에 감사하는 보수 우익의 한국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라 나는 주장한다.

여러분이 동묘에 벌어지는 벼룩시장을 보면 한국의 또 다른 일면을 목격할 수 있다. 돈다발을 들고 휴일이면 외국으로 놀러가는 한국인들이 존재하는가 하면, 옷 하나에 2천원짜리로 호객을 하고, 2천원짜리 옷을 사려고 남녀들이 다투는 모습은 믿기지 않는 한국사회의 단면이다. 동묘 앞의 벼룩시장은 한국경제가 세계 10위권에 진입했다고 자랑하는 것과는 천양지차(天壤之差)를 절감하게 하는 명소이다. 나는 벼룩시장의 서민들을 지켜보며 국민복지는 더욱 증액되어 마땅하다고 주장하게 된다. 박대통령은 이 세상 누구보다 국내 서민복지예산 증액에 나서는 것이 역대 어느 정권보다 국민을 사랑하는 정치를 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실천에 나서기를 촉구한다.

끝으로, 나는 동묘의 관공을 위로하고 싶다. 어느 달 밝은 밤,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중국 정치인들 탓에 동묘에 관운장의 혼령이 거주하게 된 사연인데, 한국의 일부 취객들이 찾아와 무슨 분풀이인지, "떠나라!"라는 냉정한 말과 욕설을 들어야 하는 관공(關公)을 위로하기 위해 나라도 길일을 택해 혼자 찾아 나서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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