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의 눈물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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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의 눈물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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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차거!”

태진은 얼굴에 와 닿는 섬뜩한 감촉 때문에 눈이 번쩍 떠졌다. 제쳐진 커튼 사이로 눈부신 햇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햇살 속에 소영이 역광으로 서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호호호, 엎어져 잠자는 모습이 꼭 애기 같아요. 베개에 침
까지 흘리고…….”

그녀의 손에는 아직 채 녹지 않은 얼음 조각이 들려있었다. 그리고 겨우 여자의 은밀한 곳을 가리는, 속이 거의 훤히 비치는 얇은 팬티 한 장만 걸치고 있었다. 집 안 가득 시원한 콩나물 국 냄새가 코 끝을 간지럽혔다. 언제 일어났는지 아침 준비를 끝낸 것 같았다.

“왜 벌써 일어났어? 더 자지 않고.”

태진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낭군님 아침을 굶길 수는 없잖아요.”

소영이 옆에 앉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한 끼쯤 굶으면 어때서 그래.”
“안 돼요. 식사는 꼭 제때 찾아 먹어야 해요. 한번 식사를 놓치면 평생 그 밥은 찾아 먹을 수 없잖아요.”

듣고보니 옳은 말이었다.

한 번 때를 놓친 식사를 어떻게 찾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소영이와 자신이 다른 점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분위기에 젖어 사는 감성적 스타일라면, 소영이는 적극적인 사고로 뭔가를 찾아 부딪치며 사는 행동적 스타일이었다.

“감기 들면 어쩌려고 옷도 안 입었어?”
“차라리 지독한 감기라도 걸렸으면 좋겠어요.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가 돼, 며칠만이라도 편하게 누워있어 봤으면 좋겠어요.”
“맞아. 소영인 너무 지쳤어. 이젠 휴식이 필요하다고.”
“이번 작품만 끝나면 아무것도 안 하고 한 달만이라도 쉴까봐요.”
“마음먹기에 달렸지. 내 생각에도 좀 쉬는 게 좋겠어.”

태진은 소영의 어깨를 감싸안았던 손을 돌려 젖가슴을 더듬었다. 어젯 밤 몇 번이나 탐했던 곳이건만 새삼스러웠다. 샤워까지 마쳤는지 머리카락에서 향긋한 내음이 났다. 소영의 입술이 태진의 입술을 찾았다. 길고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두 사람은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 예뻐. 소영인 정말 예뻐.”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남녀란 한몸이 되기 전과 후가 이렇게까지 서로 대하는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단 말인가. 내 사람이라는 느낌. 내 여자라는 사랑스러움. 내 여자를 모두 알아버린 듯한 편안함. 이 모든 것이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던 거추장스러웠던 마음의 벽들을 모두 깨부수었다. 태진은 소영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탐스러운 젖가슴을 거칠게 물어뜯었다.

“아, 아파요.”

아직도 어젯밤 몇 번이나 겪은 열락의 순간들의 미진함이 남아서 일까. 태진의 남자는 거침없이 화를 냈다. 손바닥만한 헝겊 조각인 소영의 팬티를 서둘러 벗겨내렸다. 이제 그들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 소영이도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태진의 남자는 완벽하게 제 기능을 되찾았다.

또다시 불꽃과 해일 같은 순간들이 지나가고, 두 사람은 벌거벗고 누운 채 여유롭게 담배를 물었다.

“샤워부터 하세요. 땀을 많이 흘렸어요.”

소영의 손은 태진의 가슴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있으나마나한 젖꼭지를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촉촉하게 젖어 잘 익은 머루 같은 소영의 눈동자가 너무나 아름다웠다. 태진은 아직도 지금 옆에 누워있는 소영이가 자신의 여자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시간들이 지나면, 신기루 같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아닐까 하여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소영이가 정말 내 여자가 된 거니?”
“몇 번이나 온몸으로 직접 확인했잖아요. 욕심꾸러기 같으니라고…….”

소영이 만지작거리던 태진의 젖꼭지를 세게 비틀었다.

“아얏!”
“호호호, 쌤통이다.”
“난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제가 선생님 것이 된 것이 아니라, 선생님이 제 것이 된 거예요. 이 민소영의 포로가. 알겠어요, 낭군님?”

소영이 짓궂게 웃으며 태진의 귀를 잡아 흔들었다.

왜일까? 무엇 때문일까?

태진은 그 순간, 어머니가 아들 같은 젊은 사내를 집 안방으로 끌어들여 짐승처럼 헐떡이며, 울부짖으며 부정한 짓을 저지르던 장면이 환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것은 다시는 꾸기 싫은 악몽이었다. 생각조차 하기 싫은 더러운 기억이었다. 어린 그에게 여자에 대한 혐오증을 남겨준 여자. 그런데…… 그런데 왜 이 순간에 어머니에 대한 환영이, 기억이 떠오르는 것일까. 까마득히 잊어버린 줄만 알았는데, 그토록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했는데…….

한때, 어린 자신의 손을 잡고 눈 쌓인 한적한 고궁을 걸으며, 뜨거운 군밤을 까서 입에 넣어주며 옥잠화처럼 청초한 웃음을 웃던 모습이 겹쳐 떠오르는 것일까. 자신의 숟가락 위에 생선의 가시를 발라서 올려주며 행복한 웃음을 웃던 모습이 왜 이토록 예리한 면도날에 손가락을 베듯 명징하게 떠오르는 것일까.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응? 아, 아냐. 아무 것도…….”

태진은 불에라도 덴 듯 화들짝 놀라며 어머니에 대한 기억에서 벗어났다.

“사실은 나, 아까부터 배가 고프단 말예요.”
“그래? 그럼 진작 말하지 않고.”

태진은 이불을 걷고 벌떡 일어서다가 멈칫했다.

아아, 그것은 이 세상의 어떤 꽃보다도 아름다운 한 떨기 꽃이었다. 침대 시트 위에 깐 커다란 순백의 타월에 묻어있는 선분홍 혈흔. 그것은 태진에게 어떤 드라마틱한 작품의 클라이막스보다도 더 감동적인 충격이었다.

태진은 벌거벗은 채 욕실로 갔다.

헝겊 조각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이지만, 이제 소영이 앞에서는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소영과는 단 하룻밤을 같이 지냈을 뿐인데 그렇게 달라져 있었다. 남녀가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는다던 옛 사람들의 말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욕실에 있는 커다란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머리카락이 설거지통에 처박힌 수세미처럼 엉망으로 헝크러져 있고, 코 밑과 턱에도 하룻밤 사이에 자란 수염이 거무스름하게 돋아 있었다. 소영은 이미 칫솔에 치약을 묻혀 놓고, 욕조 가득 뜨거운 물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녀의 이런 작은 마음 씀씀이가 태진을 감동시켰다. 돈이나 명예, 어느 것 하나 부족할 것이 없는 그녀였다. 보잘것 없는 자신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런 그녀가 자신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도 과분한 것이었다.

욕실 문이 열린 것은, 입 안 가득 치약 거품이 나도록 양치질을 할 때였다. 소영이도 벌거벗은 상태였다.

“치약과 비누와 샴푸가 선생님 취향에 맞을지 모르겠어요.

새 것으로 준비는 했지만…… 맞지 않더라도 이해해주세요. 다음에는 선생님이 집에서 쓰시는 것으로 모두 바꿔 놓을 테니까요.”

“!”

태진은 칫솔질을 하다 말고 소영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에 느꼈다. 그녀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 숨어 있음을. 그녀가 자신과 하룻밤을 보낸 것은, 지금 그녀가 톱 탤런트 위치에 있도록 도와준 은혜에 대한 보답이 아니라는 것을. 더더구나 일시적인 감정에 따라 자신을 유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소영이 진정으로 자신을, 이태진이란 인간 자체를 깊이 사랑하고 있음을.

처음이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토록 소중한 사람이 될 수도 있구나라는 느낌을 갖기는. 태진은 눈물이 핑 돌았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세상을, 사람들을 냉소적인 눈으로만 바라보고 상대했었다. 누구와도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고치 속의 번데기 처럼 마음의 문을 닫고 혼자만의 생활을 이어왔었다. 그런 목석 같은 가슴에 소영이 불화살을 쏘아 넣은 것이다.

태진은 놀랐다. 아직도 자기에게 눈물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에 완전히 메말라 버린 줄만 알았던 눈물이 아직도 남아 있다니. 그것도 소영이를 만나 불과 하루도 지나기 전에, 식탁과 욕실에서, 두 번씩이나 눈물이 고이다니.

“우, 세요?”

소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태진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 아냐. 눈에 치약 거품이 튀었나봐.”
“꼬맹이처럼 칠칠맞기는.”

소영인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킬킬거렸다.

태진은 당황하여 얼굴을 붉혔다. 돌아서서 눈물을 훔쳐냈다. 그녀에게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부끄러움이나 자존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조차도 모르게 지금의 이 순간들의 기억을 오래도록 마음 깊은 곳에 홀로 간직하고 싶어서였다.

“빨리 양치질을 끝내세요. 제가 등을 밀어드릴게요.”

소영은 욕조에 받아둔 뜨거운 물을 태진의 머리에서 발끝까지 끼얹으며 비누를 찾아 들고 있었다. 태진은 또 콧날이 시큰했다. 아무래도 울보가 틀림없었다. 그동안 울 기회가 없었을 뿐.

행복한 아침 식사였다.

커피도 마시고 비디오도 보고 음악도 들으며 온종일 함께 있었다. 그녀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기 위해 전화기 코드를 뽑고, 휴대폰까지 꺼버렸다. 함께 있는 동안에 소영은 몇 번이나 태진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당차고 열정적인 연기만큼이나 뜨거운 피를 가진 여자였다. 태진은 소영이와의 결합이 거듭될수록 점점 깊이를 알 수 없는 그녀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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