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군주와 대로서원의 우암 ‘송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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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군주와 대로서원의 우암 ‘송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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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 2015년‘대로서원춘계제향 봉행’행사참관기

▲ 봉행전 우암의 영정에 제물이 차려져 있다. ⓒ뉴스타운

남간사유회 송준빈(성균관 부관장)회장 등 40여명이 을미 2015년‘대로서원춘계제향 봉행’행사에 다녀왔다. 지난 11일이다. 경기도 여주 여주읍 중심가인 우암로 남한강변에 대로사라고 하여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배향한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대로사를 말할 때 개혁군주로 일컬음 받은 정조대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 행사에 참여한 이상희(전직 교장)씨가 버스 안에서 “대로사를 가는 이유와 정조대왕이 우암의 영정에다가 남긴 어제시를 낭독”했을 정도다.

정조9년(1785)대왕이 영녕릉에 참배 오셨다가 김양행 등 유신에게 명하여 건립하게 하고 대로사(大老祠)를 사액하였으나 대로(大老)는 ‘덕망이 높은 노인’ 이라는 뜻이다. 정조의 前왕인 영조의 “새로운 사당이나 서원의 건립을 금하는 금령”하에서 대로서원건립을 했을 정도로 정조대왕의 의지가 강했다. 고종8년(1871년)대원군의 사원철폐 때 우암을 제향하던 모든 사당이 사라졌으나 오직 대로사만 강한사(江漢祠)로 이름이 바뀌어 남았다.

▲ 정조11년(1787년)우암 탄생이후 세 번째 회갑연을 기념해 세운 ‘대로사비’ ⓒ뉴스타운

여기에는 정조11년(1787년)우암 탄생이후 세 번째 회갑연을 기념해 세운 ‘대로사비’가 있다. 북벌대의론을 칭송하는 내용의 비문을 정조대왕이 직접 짓고 썼다. 정조대왕은  송시열을 송자(宋子)또는 송부자(宋夫子)라 하여 국가의 스승으로 추대하고 송시열의 문집과 자료를 모아 국비를 들여 송자대전으로 간행하였다.

공자(孔子)를 '공부자(孔夫子), 맹자(孟子)를 '맹부자(孟夫子)', 주자(朱子)를 '주부자(朱夫子)'라고 부르는 데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우암 송시열을 송부자(宋夫子)라고 부른다. 기자 또한 은진송씨로 우암 자손이니 이날 “할아버지를 뵈러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조3년(기해, 1779)7월에 국조보감에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사당에 ‘대로(大老)’라는 편액을 하사하고, 어제(御製)ㆍ어필(御筆)로 된 비(碑)를 뜰에 세웠다.”고 기록돼 있다. 이렇듯이 우리나라에서 성인을 의미하는 자(子)칭호를 받은 유일한 인물로 조선왕조실록에 그의 이름이 3,000회 이상 언급된 이가 우암 송시열이다.우암 송부자를 고리타분한 유학자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다. 그것은 절대 아니다.

우암은 “남자는 하늘이고 여자는 땅,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정당화 되었던 조선 유교적 이념 사회에서 여성들에게도 인간답게 살게 해야 되고, 인간답게 살려면 자기의 몫을 다해야 되며, 예의와 염치와 도리를 알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암은 여성들에게도 문자를 가르치고 효와 충과 신의를 강조하였으며, 사자소학에서부터 사서 육경을 가르쳤다. 배움이 짧아서 혹은 오래 한학을 교육받지 못하여 한문의 어려운 뜻을 해석하지 못하는 여성들을 배려 사서 육경을 한글로 번역한 책을 만들어 여성들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이렇듯 요즘 회자되기 시작한 인권(人權)을 일치감치 실현하고 존중했던 인물이 우암 송부자다.

▲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뉴스타운
▲ 헌관들이 입장하고 있다. ⓒ뉴스타운
▲ 제향모습 ⓒ뉴스타운

이날 초헌관을 기자가 잘 아는 송유영 변호사가 했다. 그래서 더 뜻 깊은 제향이 됐다. 지금 나라가 시끄럽다. 성종완 리스트가 국가를 흔들리게 하고 있다. 여당인 새누리당은 리스트에 거론된 인물들 때문에,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노무현 대통령 당시 성종완을 두 번이나 특별사면해 준 것 때문에 다들 야단이다. 이런 혼란시기에 “왜 이렇듯 사후의 우암 송시열을 정조대왕이 챙겼을까?”라는 난제를 던진다. 다들 당시 정조대왕이 “정치력을 발휘해 난관을 헤쳐나간 상징물이자 탕평책으로 붕당정치의 폐해를 없애려한 개혁군주의 작품”이라고 이야기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 난관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를 기원한다. 고 성종완이 정치인들에게 순수한 자신의 돈을 뿌렸을 리 없다. 부정을 막으려고, 출세하려고 부정한 돈 일부를 뿌렸을 것이다. 이를 막으려다 막지 못하니 준비(?)해 놓고 죽음을 택했다. 이유는 하나다. “가족들 먹고 살게 하려고”다. 어떤 이는 이번 기회에 “경제 살리기에 앞서 개혁의 칼을 뽑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만연한 부정부패를 일소해야 경제가 살아난다.”는 논리다. 정조대왕이 왜 개혁군주로 칭송받고 사후에 우암을 위한 대로사를 세운 이유를 되새김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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