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의 눈물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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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의 눈물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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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에 죽지 않을까?”

차는 시내 중심을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쉽게 죽지도 못해요. 몇 시간 내에 병원에 가서 응급 조치를 받으면 괜찮을 거예요.”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방배동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진희는 비 내리는 창 밖을 보며 침묵 속에 뭔가 깊은 상념에 젖어있었다. 무슨 생각을 저렇게 골똘히 하고 있는 것일까.

녀석이 사는 방배동의 언덕길은 이미 인적이 끊겨 있었다. 지나가는 차도 없었다. 비에 젖은 보안등만이 빗속에서 제 빛을 잃고 있었다.

“거의 다 왔어.”

태진은 주의 깊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담이 높은 집들이 중세기의 성처럼 굳게 문이 닫힌 채 적막에 싸여 있었다. 차창을 때리는 비 소리만이 자욱할 뿐이었다. 녀석의 집 앞에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려 다시 한 번 주위를 살펴보았다. 고요했다. 두 사람은 트렁크를 열고 마대를 녀석의 집 대문 앞까지 옮겨 놓았다. 그리고 초인종 버튼을 눌렀다.

“상수니?”

절제된 듯한, 그러나 약간은 들뜬 허스키한 여자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기다리던 짐이 왔으니 잠깐 나와주시죠.”

만약에 대비해 진희가 말했다. 녀석의 집에 혹시 방송국 사람들이 와 있어 태진의 목소리를 알아들을까 봐서였다.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기다리던 짐이라뇨?”
“글쎄, 나와보시면 알아요.”

두 사람은 재빨리 차에 올라 액셀러레이터 페달을 힘차게 밟아, 질풍처럼 언덕길 아래를 향해 질주했다. 언덕길을 다 내려올 때까지 사람도 차도 마주치지 않았다. 첫 합작품치고는 완벽한 성공이었다.

“지금쯤 난리가 났겠지?”

이제 녀석은 벌거벗겨진 채로 가족들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질 것이다. 하지만 녀석은 쉽게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발설하지 못 할 것이다. 따라서 어쩌면 가족들과 그만 아는 것으로 끝날지도 몰랐다. 태진은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웃지 않으려 해도 한번 일기 시작한 웃음은 쉽게 멈춰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재밌어요?”

진희는, 핸들을 잡고 킥킥거리는 태진을 돌아보며 묻고는 이내 차창 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한 잔 할까?”

차가 돈암동 사거리를 지나 아리랑 고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차창 밖에 시선을 주고 있던 진희가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들었어? 한 잔 할 거냐고?”

태진은 큰 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진희는 여전히 차창 밖에 시선을 두고 대답했다.

“뭘로 할까? 샴페인도 한 병 터뜨려야겠지?”
“좋아요.”
“난 오늘 너무 기분이 좋아. 진흰?”
“좋아요.”

진희는 마치 ‘좋아요’라는 말밖에 모르는 앵무새처럼 똑같은 대답만 반복했다.

태진은 조금 전까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도 소풍을 가는 어린애처럼 들떠 있었고, 진희는 반대로 차분했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너무 태연했다. 어쩜 이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마치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태진은 진희가 보여준 일련의 행동들을 보며 오랜 훈련과 실전을 거친 숙달된 조교 같은 솜씨같다고 생각했다. 어찌 보면, 모든 일은 그녀의 계획하에 주도되고, 자신은 단지 그녀의 하수인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집에 도착했다.

태진은 먼저 지하실로 내려갔다. 허전했다. 마치 뭔가 꼭 제자리에 있어야 할 것이 없어진 것처럼. 아직도 지하실엔 녀석의 체취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땀 냄새와 피비린내와 오물 냄새가 한데 어우러진 복합적인 냄새였다. 그를 매달았던 쇠고랑도, 침대의 수갑도 주인을 잃고 허전하고 을씨년스럽게 남아 있었다. 뒤따라 내려온 진희도 지하실에 있는 사물 하나하나에 눈길을 주고 있었다.

거실로 올라갔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진희 앞에 놓인 잔에 위스키를 반 쯤 따랐다. 태진의 잔은 진희가 채웠다. 그들은 잔을 부딪쳤다.

“건배.”
“건배.”

태진은 단숨에 잔을 뒤집어 꿀꺽 삼켰다. 독한 알코올이 식도를 따라 위에까지 싸하게 신열처럼 번져갔다. 이번에는 태진이 자신의 잔에 직접 가득 따라 또 단숨에 털어넣었다.

“나도 한 잔 더 주세요.”

진희가 잔을 내밀었다. 어느 새 그녀의 잔도 비어 있었다. 잔을 채워주었다.

“허전하죠?”

진희가 태진의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마치 그녀는 태진의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처럼 정확하게 꼬집어 냈다. 태진은 굳이 숨기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어?”
“얼굴에 쓰여 있어요.”
“내 얼굴에?”
“네.”
“독심술도 하나보지?”
“다음 일을 빨리 추진하고 싶다고…….”
“정말?”
“그래서 이 허전함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진희는 미소를 머금었다.

태진은 그런 진희의 코를 손으로 꼭 쥐고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

“여우 같으니라고.”
“그러는 선생님은 늑대?”

이번에는 태진이 소리내어 웃고 말았다.

“오늘 밤엔 취하고 싶어.”
“자신의 존재를 잃을 정도로요?”
“우리 같이 취해 볼까?”
“굳!”

두 사람은 잔이 비워지기가 바쁘게 서로의 잔을 채워주었다. 위스키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태진은 취기가 왈칵 몰려오며, 우울하던 마음이 비 온 뒤 구름 사이를 뚫고 내리쏟는 햇살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춤 출까?”
“춤?”

진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춤!”

진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오디오에 CD를 골라 올려놓았다. 잠시 후, 흐느끼는 듯한 색소폰 연주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따금 분위기를 잡고 싶을 때면 듣던 것이었다.

“진희야, 고마워.”

태진은 진희의 허리를 두 손으로 꼭 끌어안고 느린 동작으로 스탭을 밟으며 말했다. 진심이었다. 진희는 태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그가 이끄는 대로 물 흐르듯이 따라왔다. 티끌 한 점 없이 깨끗하고 평온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내 말 듣고 있어?”
“네.”

진희는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

“눈을 떠 봐.”

태진은 진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진희가 눈을 떴다. 술 기운 탓일까. 그녀의 얼굴은 홍조를 띠고 있었다.

“나를 똑바로 봐.”

태진은 진희의 허리를 당겨 밀착시켰다.

“내 눈을 봐.”

진희는 말 잘 듣는 꼬맹이처럼 무심한 눈으로 태진의 눈을 올려다 보았다.

“그 속에 누가 있지?”
“…… 나요.”
“그래, 맞았어. 지금 진희의 눈동자 속에는 내가 있고.”
“그래서요?”
“우린 지금 어떤 사이일까?”
“…….”
“어떤 관계냐고?”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요? 선생님이 저를 믿는 만큼 저도 선생님을 믿어요.”
“믿는다는 게 뭘 뜻하는 거지?”
“…….”
“때론 난 나 자신이 두려울 때가 있어. 진희를…… 사랑해버릴까 봐.”
“…….”

태진의 스탭을 따라오던 진희의 동작이 순간 우뚝 멈추었다. 태진은 진희의 어깨를 으스러지도록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 입술을 덮쳤다. 진희가 미처 피할 사이도 없이. 굳게 닫힌 입술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하지만 집요하게 공격했다. 그녀의 입술이 열린 것은 한참 후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서서 길고 깊은 키스를 나누었다. 태진의 손은 그녀의 스웨터를 밀어 올리며 가슴으로 향했다.

진희가 그의 손을 잡았다.

“안 돼요. 이 정도에서 멈춰요.”
“왜?”
“내가 선생님을 사랑하게 되면…… 떠날 수밖에 없어요.”

태진을 보는 진희의 눈동자가 파도를 타는 조각배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도 좋다면 나를 가지세요.”

진희는 꼭 잡았던 태진의 손을 놓아주었다. 그리고 무장 해제를 한 병사처럼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었다. 태진은 그런 진희를 한참 바라보다 다시 한 번 와락 끌어안았다.

“알았어. 여기서 멈출게.”
“그래요. 진정한 사랑은 한 사람에게만 주는 거예요. 선생님에게는 소영 씨가 있잖아요.”
“!”
“그 사랑을 지켜야 해요. 나도 두 사람의 행복을 원하고 있고요. 소영 씨는 선생님과 어울리는 좋은 여자예요.”
“진희!”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말하지 않아도 난 선생님의 마음을 다 알아요. 우린 이대로가 좋아요. 편한 친구 같은…….”

태진은 술이 싹 깨는 기분이었다.

“우리, 한 잔 더 할까?”
“얼마든지요.”

진희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태진도 따라 웃었다. 새 술병의 마개를 땄다. 두 사람은 서로의 잔을 채워주었다. 진희가 말했다.

“오늘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린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잖아요. 오늘 일은 시작에 불과하고요.”

그랬다.

진희의 말처럼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었다. 앞으로 인간 이하의 짓을 하고 다니는 연놈들을 샅샅이 찾아내 제거해서 이 사회를 깨끗하게 정화시켜야 했다. 어두운 곳에서, 냄새나는 곳에서, 은밀한 의식을 행하듯 음탕한 방법으로 자신의 욕정을 불 태우는 인간들을 찾아내야만 했다. 이 일은 두 사람이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나서서 해야만 할 일이었다. 그건 신성한 일이었다. 타락과 더러움으로 얼룩져 가는 세상을 구하는 일이기도 했다. 태진은 김상수 PD 일을 처리하면서 가슴 뿌듯한 사명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번 일을 하면서 느낀 건데, 우리에겐 허점이 많았어요. 앞으론 보다 더 계획적이고 철저한 준비와 대비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맞아. 나도 그런 생각을 했어.”

진희의 말이 맞았다.

앞으로 계속해서 이 일을 추진하려면 보다 완벽한 준비가 필요했다. 그리고 미흡했던 점은 검토하고 보완해서, 이 땅에 다시는 그런 추악한 인간들이 발 붙이지 못하도록 경종을 울려야 했다.

그러나 오늘 밤만은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자축하고 싶었다. 모든 일은 맨 처음 시도가 어려운 법. 한번 일을 저지르고 나면 다음은 처음보다 쉽고, 그 다음은 더 쉬운 것이 세상의 이치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가장 어려운 관문 하나를 통과한 셈이었다.

태진은 위스키를 병째 들고 꿀꺽꿀꺽 삼키기 시작했다. 숨이 목까지 차 올라올 때까지, 술병의 술이 바닥을 드러낼 때까지. 병에서 입을 떼었을 때는, 집 안의 사물들이 만화경을 보듯이 여러 개로 겹쳐 보이기도 하고, 요술방의 거울을 보듯이 찌그러져 보이기도 했다. 앞에 앉아 있는 진희의 얼굴도 초점이 맞지 않았다.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서다 그만 그 자리에 푹 고꾸라지고 말… 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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