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의 눈물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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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어의 눈물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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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종 캐스팅 심사에서 이형석을 뺀 것은, 내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었어. 정말야. 믿어 줘. 당신들이 뭘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건 오해라고.”
“뭐, 오해라고? 이 새끼가 누굴 핫바지로 아나? 좋게 대해선 안 될 악질 새끼구만.”

태진은 으름장을 놓으며 녀석의 말을 건너짚었다. 분명히 그 정도에서 물러설 녀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녀석은 자기 드라마에 탤런트들을 캐스팅할 때, 검은 돈이 거래된다는 것이었다. 알 만한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얘기였다.

“좋아.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솔직하게 남자답게 말하지. 이형석이 대신 신인인 이진만을 넣고 매니저로부터 천을 먹었어. 하지만 그걸 나 혼자 다 먹은 건 아니라고. 조연출, 카메라 부장, 조명팀장하고 넷이서 강남역에 있는 '‘불새’에서 술값으로 다 날렸다고. 정말야. 내 호주머니에 들어간 건 한 푼도 없어. 정 의심스러우면 나머지 세 사람에게 물어보면 알 거야.”

녀석은 어설프게 숨기려들다가는 더 호되게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자진해서 금액까지 불었다. 새파란 신인을 주연급으로 캐스팅하고 받은 금액치고는 너무 적었다. 아무래도 냄새가 났다.
태진은 탁자에 늘어놓은 고문 기구 중에서, 손잡이가 플라스틱으로 된 전기봉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트랜스 다이얼을 돌려 전압을 교류 50볼트에 맞췄다. 이 정도면 견딜 수 있을 만큼 짜릿짜릿하리라.
전기봉을 녀석의 오른쪽 젖꼭지에 댔다.

“으으윽…!”

녀석은 몸을 바르르 떨며 이를 악물었다. 물까지 뒤집어쓴 상태여서 전기가 잘 통하고 있을 터였다.
“야, 이 새끼야.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지껄이는 거야? 주연으로 캐스팅하면서 천밖에 안 먹었다고? 뭐, 그것도 너같이 더러운 새끼가 같이 술 마시는 데 다 썼다고? 이 새끼야, 지나가는 개가 다 웃겠다.”

태진은 전기봉으로 녀석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쫙 훑었다.

“…… 말 할게…… 오천 받았어. 이번에도 거짓말이면 날 죽여도 좋아.”
“새끼, 이제야 좀 인간다워졌군. 그러니까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하니? 어차피 불지 않고는 넘어갈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지? 그럼 사천은 챙겼다는 얘기군. 내 말이 맞아, 틀려, 새끼야?”
“…… 맞아.”
“또?”
“…….”
“다 불게 될 거라고 했지? 고생하고 불 거야?”
“도대체 너희들 정체가 뭐냐?”

녀석은 이런 상황에서도 그게 몹시 궁금한가 보았다. 보통 강심장이 아니었다. 웬만한 놈 같으면 그 정도 당했으면 똥오줌 못 가리고 줄줄 불 텐데, 아직도 짱구를 돌리며 앞뒤를 재고 있었다.

“니 생각에는 여기가 어디고, 우린 뭐하는 사람 같냐?”
“…….”
“너 같은 새끼 하나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흔적도 없이 처리해도 괜찮은 곳이라는 정도만 알려주지. 그건 그렇고, 10초의 시간을 줄 테니까 빨리 불어. 자, 지금부터 카운트 다운에 들어간다. 텐… 나잇… 에인… 세븐….”

일정한 간격을 두고 수를 하나씩 줄여갔다.

“…… 김해미에게서 일억, 사정숙에게서 팔천, 박찬길에게
서 오천…….”

녀석은 카운트 다운의 수가 셋 남았을 때, 줄줄이 불기 시작했다.

“날짜와 장소도 말해야 할 거 아냐, 새끼야!”

태진은 전기봉으로 배를 푹 찔렀다.

녀석은 처음부터 다시 자세히 불기 시작했다. 참으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녀석에게 있어 방송국 월급은 껌값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 더러운 돈으로 그렇게 밤이면 밤마다 최고급 술집에서 술을 마셔대고 여자들을 만났던 것이다. 녀석이 말하는 것은 모두 비디오 테이프에 담기고, 고성능 마이크를 통해 녹음까지 되고 있었다. 한참을 줄줄이 알사탕처럼 늘어놓던 녀석의 말이 끝났다.

“그런데 미안해서 어쩌지? 우리가 네 녀석에게서 알고자 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거든. 다시 말하면 넌 핀트를 잘못 맞춘 거지. 지금까지 한 네 녀석의 고백은 양념 정도로 봐주기로 하지. 자, 지금부터 또 잘 생각해 봐. 왜 네 녀석이 이 곳까지 끌려와 이렇게 당해야만 할까를. 우린 우리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너를 전기 통닭구이를 만들어 줄 생각이니까. 알아듣겠어?”

태진은 전기봉을 다시 댔다.

이번에는 짧게, 길게, 불규칙적으로 녀석의 겨드랑이를 집중 공격했다. 신체 중에서 은밀한 부분이 전기에 더 약하다는 것을 책을 통해서 알고 있었다.

진희가 태진으로부터 전기봉을 건네받고는 녀석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이건 50볼트밖에 안 돼. 다음은 60볼트, 다음은 70볼트……. 우리가 원하는 대답이 나올 때까지 10볼트씩 계속해서 올릴 거야. 참고로 말해주겠는데, 이 전기봉은 200볼트까지 올라가지. 아마 200볼트까지 올라갈 때쯤이면, 모르긴 해도 넌 온 몸의 피가 바싹 타들어 죽어 갈거야. 말린 해삼처럼 아주 고통스럽게.”

태진도 한 마디 덧붙였다.

“머릿속에서 자갈 굴러가는 소리가 들리도록 회전시켜야
할 걸.”

태진은 진희가 녀석을 다루는 것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한 번도 이런 일을 한 적이 없는데도 프로처럼 말과 행동을 하기 때문이었다.

“다음!”

진희가 단호하게 외쳤다.

“호, 혹시…….”

녀석은 서두만 꺼내놓고 망설였다.

“분명히 말했지? 난 성미가 급하다고. 네 녀석이 성질을 돋구었기 때문에 10볼트 올리겠어!”

진희는 트랜스의 다이얼을 돌려 계기판 바늘을 60에 맞추었다. 전기봉을 5초 정도 녀석의 가슴에 댔다. 녀석은 또 자지러졌다. 전기봉을 떼고 진희가 다음 말을 재촉했다.

“아직 다 주지 않은 노름 빚 때문에……”
“틀렸어! 이제 70볼트야!”

전기봉이 녀석의 몸에 닿고, 자지러지고…… ‘틀렸어!’ 라는 진희의 외침소리와 함께 또 전압이 올라가고, 또 자지러지고…… 녀석은 오줌까지 지리고 있었다. 녀석의 입술은 허옇게 부르텄다. 그러나 진희의 다그침은 속도를 더욱 높여갔다. 전압은 어느 새 120볼트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때까지도 녀석은 계속해서 헛다리를 짚었다.

“넌 어쩜 한 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전기 통닭구이처럼 노릇노릇하게 잘 구워질지도 모르겠어. 전압이 점점 올라가면서 심장이 불에 닿은 담배갑 셀로판지처럼 오그라져 붙어 죽겠지?”

태진은 녀석을 향해 이죽거리며 비웃었다.

“힌트, 힌트를 줘 봐!”

그런 와중에서도 녀석은 짱구를 굴리고 있었다.

“그래? 원한다면 주지.”

태진은 녀석에게 다가가, 지난 밤에 진희가 했던 것처럼 오른손 가운뎃손가락을 동그랗게 오므렸다가는, 축 늘어져 있는 고환 중에서 오른쪽 것을 향해 힘껏 튕겼다.

그 순간 녀석은 입을 쩍 벌리고,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쇠고랑에 팔목이 묶인 채 펄쩍펄쩍 뛰며,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식은땀을 흘렸다.

“이게 힌트야. 알아듣겠어?”

태진은 번데기처럼 바짝 오그라든 녀석의 남자를 보며 말했다.

“자, 다음!”

진희는 녀석이 숨 돌릴 틈도 없이 다그쳤다.

녀석은 완전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 자신을 납치해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하지 않나, 때론 담배도 물려주고 밥도 주면서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지 않나,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헷갈리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제 130볼트야!”

진희가 다시 전기봉으로 녀석을 지져댔다.

“자, 이제 140볼트!”
“할게, 말 할게. 제발…….”

진희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담배를 꼬나물었다.

“혹시, 차경애 때문에…….”
“계속해!”

이번에는 태진이 소리쳤다.

이제야 녀석의 입에서 본론적인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녀석의 입에서 튀어나온 차경애는 텔레비전에 단역과 조연으로 몇 번 얼굴을 비치다 단 한 번 주연을 맡고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진 애였다. 그러고 보니 차경애가 유일하게 주연을 맡았던 드라마는 녀석이 연출을 맡은 것이었다. 그 당시 방송가 참새 떼의 입방아에 의하면, 그녀는 방송가의 걸레로 소문이 자자했다. 걔하고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연예인이나 방송 관계자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난 잘못이 없어. 그 애가 자진해서 날 유혹했어…….”
“새끼, 너 뜸 들일 거야?”

태진은 녀석을 윽박질렀다.

“사실 그 애하고 잔 사람은 나만이 아냐.”

녀석은 거기에서 잠시 말을 멈췄다.

“…… 나중엔 아예 나더러 동거를 하자고 매달렸지만, 난 그런 애하고 살림을 차릴 수가 없었어. 그래서 싫다고 했을 뿐이야. 그게 전부야.”

태진은 녀석이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는 걸 본능적으로 냄새 맡았다.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더 있을 텐데. 네 녀석이 우릴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판단 착오야. 우리도 너를 죽이고 싶지는 않아. 우린 너를 살려줄 수도, 죽일 수도 있어. 그건 전적으로 너의 솔직하고 성실한 답변에 달려있어.”

태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녀석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정말 나, 나를 살려주겠단 말 입니까?”

녀석은 말까지 더듬으며, 어느 새 존댓말로 바꿨다. 끝도 보이지 않던 깜깜한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한 줄기 빛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표정도 밝아졌다.

“난 거짓말 안 해. 대신, 거짓말하는 건 절대 용서 못 하는 성미지.”
“알았습니다. 솔직히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물 한 잔만…….”

녀석은 태진의 부드러운 말투에 용기를 얻었는지 건방지게 물까지 부탁했다. 태진은 갑작스런 녀석의 태도 변화에 웃음이 나왔지만, 유리컵 가득 물을 따라 입에 대 주었다. 녀석은 게걸스럽게 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웠다. 전기 고문의 고통 때문에 허옇게 부르튼 입술엔 피가 배어 있었다.
“고맙습니다.”

녀석은 눈이 가려 보이지 않는데도, 소리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이기까지 했다.

“새끼야, 너에게 그런 인사 받자고 인정을 베푼 건 아냐.
어서 다음이나 말해.”
“정말 죄, 송합니다만…… 담배 한 대만…….”

태진은 어이가 없었다.

진희도 태진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넉살좋고 교활하고 머리까지 핑핑 돌아가는 놈이었다. 조금 풀어주는가 싶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태진도 담배 한 대의 소중함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아는 사람이었다. 녀석이 저지른 짓은 밉지만, 담배 한 대 피울 정도의 여유는 주고 싶었다. 두 팔목을 채운 쇠고랑에서 오른손을 풀어주고 담배를 주었다. 그리고 태진도 한 개비 피워 물었다. 녀석은 담배를 소중한 보물 다루듯이 조금씩 아껴가며 그렇게 맛있게 피울 수 가 없었다. 담배 한 개비가 타는 것은 몇 분 되지 않는 시간이지만, 녀석은 그 시간 만큼은 아주 평온하고 행복한 표정이었다.

“자, 이제 시작하자.”

태진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풀어주었던 녀석의 팔목을 다시 채웠다.

“…… 솔직히 그 애는 창녀나 다름없었습니다. 아니, 화대를 많이 받는 창녀였습니다. 인물 반반하고 텔레비전에서 얼굴 좀 알려진 것을 미끼로, 뚜쟁이의 소개를 받아 돈 많은 놈들과 잠자리를 같이하고 화대를 챙기기에 바빴습니다. 저도 정확한 것은 모르지만, 꽤나 많은 액수를 받는 것은 확실했습니다. 악착같이 그 짓을 해 모은 화대를 굴려서 불린 재산이 상당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 애가 뭐가 아쉬워 밤잠도 못 자고 강행군을 해야 하는 탤런트 짓을 하겠습니까?”

태진은 의자에 편하게 앉아, 잘도 나불거리는 녀석의 입을 보며 물었다.

“그 애를 먹은 시점이 언제야?”

“아까도 말했지만, 제가 원한 게 아닙니다. 정말 그 애가 절 먼저 유혹했습니다. 솔직히 잘못 먹은 죄로 발목이 잡혀 딱 한 번 주연으로 캐스팅하긴 했지만, 걘 연기력이 너무도 형편없었습니다. 기본이 안 돼 있는 애라고 보면 됩니다. 난 걔하고 촬영내내 엄청 고생을 했습니다. 다음 작품에도 주연으로 써달라고 어찌나 떼를 쓰던지…… 하지만 솔직히 걔도 저한테 몇 번 주고 손해 본 것은 없습니다. 내 작품에 주연으로 출연한 이후로 화대가 몇 배로 뛰었다고 들었습니다.”

녀석은 마치 자랑하듯 말했다.

“그렇다면 넌 왜 우리가 널 잡아온 걸 차경애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했지?”
“그건…… 걔가 다음 작품에도 왜 자기를 주연으로 써주지 않느냐고 하도 귀찮게 따라다니기에 사람 많은 곳에서 큰 소리로 창피를 줬더니…….”
“뭐라고 했는데?”
“‘야! 연기가 뭔지 좆도 모르는 주제에 무슨 주연을 시켜달라고 빚쟁이 조르듯이 귀찮게 하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그게 전부야?”
“걘 그 날 이후로 방송국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혹시 그 앙심으로…….”

녀석은 거기까지 말하고 말꼬리를 흐렸다.

“좋아. 솔직히 말한 걸로 인정하지. 그러나 그 애 때문에 끌려온 것이 아니다. 다음.”
“다음이라면?”
“너 또 내숭깔래? 전기 통닭구이가 되고서야 말할 거야? 알아서 기라고. 걔 말고도 또 있을 텐데. 우릴 속이려고 하지 마. 네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으니까.”

시계를 보았다.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좀 쉬었다 하고 싶었다. 어차피 오늘 하루에 끝낼 일이 아니라면 점심도 먹어야 했다.

“잠시 쉴 틈을 줄 테니까. 그동안 잘 생각해 봐라. 만일 우리가 알고 있는 애들 중에서 한 명이라도 빠진 것이 확인되면, 그 시간이 바로 네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숨을 쉬는 순간이 될 테니까.”

태진은 몇 술 뜨는 듯 마는 듯 점심을 마쳤다.

몇 시간 동안 녀석과 신경전을 벌여서 그런지 나른했다. 한낮의 투명한 햇살이 넓은 베란다 통유리창을 통해 거실로 쏟아지고 있었다. 따스한 햇볕 속에 앉아있자 졸음이 밀려왔다.

“잠깐 눈 좀 붙이고 할까?”
“그러세요. 전 샤워 좀 할 테니까.”

진희는 욕실로 들어갔다.

태진은 긴 소파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 눈을 감았다. 녀석이 아직은 소영이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오후가 되면 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녀석은 사회의 암적인 존재였다. 누군가가 한 번쯤은 손을 봐줘야 할 놈이었다. 그래서 다시는 인생을 그렇게 엿같이 살게 해서는 안 됐다. 이제부터라도 그런 놈을 통해서 이 더럽고 냄새나고 타락한 세상에 메시지를 전하고, 경종도 울려야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따스한 햇볕을 온몸에 받으며, 서서히 잠 속으로 굴러떨어졌다.

태진이 잠에서 깬 것은 한 시간 후였다.

거실에도 방에도 진희는 보이지 않았다. 녀석이 있는 지하실을 모니터로 확인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창 밖을 보니, 그녀는 정원에 있었다. 아직은 새싹이 돋아나지 않아 누렇게 시들어 있는 잔디 위에서 목검을 휘두르며 몸을 풀고 있었다. 절도가 있는가 하면, 물 흐르는 듯한 유연한 동작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한동안 그녀를 지켜보았다.

“멋있어.”

태진은, 땀을 닦으며 들어서는 진희를 보며 말했다.

“처음부터 지켜봤어요?”
“아냐, 중간쯤.”
“이제 기분이 좀 산뜻하네요.”

진희는 냉장고에서 꺼내온 토마토 주스 한 컵을 단숨에 마셨다.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문득, 지금쯤 소영이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고 싶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마냥 보고 싶고, 같이 있고 싶은 것이 사랑이란 것일까.

“시작해야죠?”
“녀석도 배가 고프겠지. 밥이나 먹이고 시작하자고.”

녀석은 두 사람이 내려오는 것도 모르고 쇠고랑에 매달린 채 축 늘어져 잠들어 있었다. 지친 기색이 완연했다. 태진은 찬물 한 바가지를 떠 녀석의 얼굴에 끼얹었다.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태진은 녀석의 손을 등 뒤로 수갑을 채운 채 무릎을 꿇리고 밥그릇을 앞에 놓았다.

“먹어라.”

녀석은 잘도 먹었다. 이런 와중에도 왕성한 식욕을 보인다는 것이 씁쓸함을 주었다. 녀석의 몸은 어느 한 군데 성한 곳이 없이 피 딱지가 앉아 있었다. 허겁지겁 개처럼 밥을 먹는 모습을 보며, 문득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 죽지 않으려면 먹어라. 널 이 곳으로 끌고 올 때는 죽여버리려고 했지만 용서해 주기로 했다. 단, 죄값은 치른 후에…….”

녀석은 허겁지겁 먹던 동작을 멈추고, 태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내 맘은 그렇다 해도, 나와 같이 있는 사람이 네 녀석을 죽이자고 하면 나도 별 수 없다. 널 죽일 수밖에…… 그녀가 곧 내려올 거다. 한 마디 충고하는데,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마라. 내 말 알아듣겠지?”
“네.”

녀석은 아주 공손한 투로 대답했다.

“한 마디만 덧붙이면, 절대로 우릴 속일 생각은 하지 마라. 우린 네 녀석이 저지르고 다닌 온갖 추잡한 일을 다 알고 있다. 한 가지만 예를 들면…….”

태진은 녀석을 미행하면서 본 것 중에서, 압구정동 ‘불새’에서 만난 여자의 모든 신상과 호텔에 들어간 시간과 나온 시간, 선릉역까지 데려다준 것, 다음에 집에 갈 때는 어떤 코스로 갔는지까지 자세하게 말해 주었다. 태진의 말을 다 들은 녀석의 얼굴은 완전히 일그러졌다.

“더 얘기할까?”
“아, 아닙니다. 충분히 알아들었습니다.”
“난 너에 대한 조금의 동정심이라도 남아 있지만, 그녀는 다르다. 명심해라.”
“네, 충고 고맙게 받아들이겠습니다.”

녀석은 보이지 않는 태진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기까지 했다.

옆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진희는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느라 볼이 바람 먹은 복어배처럼 부풀어 올랐다. 자신을 납치해 지금까지 온갖 욕설을 퍼붓고, 채찍질하고, 전기 고문까지 한 태진의 말에 속아 녀석이 진정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 자체로만 보면 웃기는 얘기지만, 녀석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다. 녀석은 지금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한 최악의 순간까지 온 것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빨리 먹어라. 그녀가 오면 너 같은 놈에게 아까운 밥을 줬다고 밥그릇을 차버릴 지도 모르니까.”
“네, 알겠습니다.”

녀석은 태진의 말이 끝나기가 바쁘게 밥그릇에 코를 박았다. 웃음을 참다 못한 진희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쥐고 급하게 지하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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