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면의 축제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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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의 축제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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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진은 김상수 PD의 일거수일투족을 체크했다.

방송국에서 본 그는 갯벌에서 먹이를 찾는 물새처럼 늘 종종걸음을 치고 다녔다. 느긋하게 앉아서 담배 한 개비 피우는 것을 보지 못했다. 방송 일이 아무리 바빠도 담배 한 개비 여유롭게 피울 시간은 충분히 있으련만, 성격 탓인지 한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았다.

출근도 다른 사람들보다 30분 이상을 빨리 했는데, 늘 같은 코스로 움직였다. 그는 버릇처럼 한 손에 대본을 쥐고 다니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여다 보고 밑줄을 긋거나 수정하곤 했다. 며칠 동안 지켜본 바에 의하면, 사생활이야 걸레 같은지 모르지만 방송 일을 대하는 그의 열정은 대단했다. 어쩌면 그의 그런 열정과 노력 때문에 다른 입사 동기생들에 비해 인정을 받고 있는지도 몰랐다.

일 주일째 미행하고 있었다.

방송국에서야 그의 뒤를 밟는다 한들 크게 신경 쓸 일이 아니지만, 방송국에서 벗어난 밖이 문제였다. 혹시라도 그가 눈치를 챌까 봐 진희와 번갈아 미행했다. 들은대로 그의 사생활은 난잡하기 그지없었다. 자신의 일에 대해서는 그렇게 철두철미한 녀석이 사생활은 왜 그토록 시궁창인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방송국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그런 식으로 푸는지는 모르지만, 술과 여자를 밝히는 것이 보통 사람의 상상을 초월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쉬지 않고 술을 마셔댔고, 어느 날엔 하루에 세 번이나 여자를 바꿔가며 호텔에 드나들었다. 보통 체력이 아니고는 엄두도 못 낼 괴물 같은 놈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어디까지가 녀석의 진짜 모습이지?”
“정말 대단하네요.”

진희도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녀석의 차는 방배동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집으로 들어갈 모양이었다. 이제 더 이상 미행할 이유가 없었다. 태진은 이제까지 그를 미행하느라 붙이고 다닌 수염과 가발, 뿔테 안경을 벗었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넘치도록 받아 그 속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몹시 피곤했다.

집에 도착한 태진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피곤하지 않아?”
“조금요.”
“먼저 씻지.”
“우선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어요.”

진희는 커피 끓일 준비를 했다.

태진은 담배를 물고 욕실로 들어갔다. 욕조에 뜨거운 물이 채워질 때까지 변기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느긋하게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았다. 낯익은 얼굴이면서도 어느 순간엔 처음 보는 얼굴처럼 전혀 낯설어 보이기도 했다. 욕조에 물이 차면서 거울에 수증기가 어렸다. 따라서 거울 속의 얼굴도 흐려져 갔다. 꽁초를 변기 속에 버리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뜨거운 물이 긴장된 근육을 풀어주었다. 이대로 꼼짝도 않고 잠시만 누워있으면 잠이 들 것만 같았다. 몸이 풀리면서, 오늘 방송국을 나서면서부터 녀석을 미행한 과정을 떠올려보았다.

김 PD는 오후 7시에 방송국에서 나와 그랜저를 몰고 여의도를 벗어났다. 그는 가는 도중에 선글러스를 썼다. 두 사람은 그의 차를 놓치지 않으려고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며 붙었다. 중간에 놓치기라도 하면 낭패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태진의 얼굴을 알기 때문에 가발과 콧수염, 안경으로 변장했다. 압구정동에 도착한 그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구름 위의 산책’이란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에는 몸매가 늘씬하고, 요란하게 차려 입고, 화장도 야하게 한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진희는 차에서 대기하고, 태진은 그의 등 뒤쪽에서 여자를 보고 앉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여자가 뾰로통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차가 막혀서.”

녀석은 처음부터 거짓말을 했다. 여의도에서 이 곳까지 오는 동안 길은 한 번도 막히지 않았다.

“핸드폰은 뒀다 뭐 해? 전화라도 해주지 않고…….”
“20분 정도 늦은 걸 가지고 뭘 그래.”

녀석은 커피를 주문했다.

여자는 금세 뾰로통하던 표정을 풀고, 미니 스커트를 입은 다리를 꼬고 앉아 익숙한 폼으로 담배를 꼬나물고 불을 붙였다. 선탠을 했는지, 갈색으로 잘 구워진 미끈한 다리가 시선을 자극했다. 잘 가꾸어진 몸매였다. 거기다 은근히 남자를 유혹하는 듯한 섹시한 분위기 탓인지, 평소의 태진답지 않게 남자가 부풀어 올랐다. 정상적인 사내라면 하룻밤 진하게 품어보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게 하는 여자였다. 녀석은 실내에서도 선글러스를 벗지 않았다.

녀석이 톤을 한껏 낮추고,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은근하고 끈적끈적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 분위기 죽여주는데.”
“엉큼하긴.”

여자는 그의 말이 싫지는 않은지 녀석의 어깨를 몇 대 때렸다.

“갈까?”

녀석이 보채듯이 말했다.

“급하긴. 시킨 커피나 다 마시고 가.”

그녀는 색기가 흐르는 눈으로 곱게 녀석을 흘겼다.

어디로 가자는 것일까? 태진은 그들의 대화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나누는 대화로 봐서, 한두 번 만난 사이가 아니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눈치채지 못하게 조심하며 여자를 유심히 보았다. 다음에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여자가 말했다.

“언제쯤이나 자기 드라마에 출연시켜 줄 거야? 여름부터 출연시켜 준다더니 아직도 소식이 없으니.”
“글쎄, 조금만 기다리라니까. 다음 드라마가 시작되면 책임지고 조연으로 캐스팅할 테니까.”

두 사람의 대화로 짐작하건데, 여자는 태진이 알지 못하는 이제 갓 합격한 신인 탤런트가 분명했다. 녀석은 어느 새 햇병아리에게까지 마수를 뻗친 게 틀림없었다.

“난 자기만 믿는다.”
“알았어. 그만 보채.”

녀석은 짜증스럽게 말했다.

“보채? 정말 그딴 식으로 기분 나쁘게 말할 거야?”
“알았어, 알았어. 미안해. 이제 됐니?”
“자기 요즘 나한테 무슨 불만 있어? 아님 벌써 내가 싫증난 거야?”
“얘가 왜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고 그럴까. 예뻐, 날로 삼켜도 비린내도 안 날 정도로 넌 예쁘다고.”

녀석은 낄낄거리며, 탁자 밑으로 손을 뻗어 그녀의 허벅지를 더듬으며 능청을 떨었다. 하여튼 여자 다루는 솜씨 하나는 타고난 녀석이었다. 예쁘다는데 싫어할 여자가 있을까. 그것도 앞으로 자신의 미래를 탄탄대로로 책임져 줄 남자가 그러는데야.

그들이 카페에서 나와 곧바로 간 곳은 성수대교 근처에 있는 작지만 아담한 호텔이었다. 거리낌없이 들어가는 걸로 봐서, 전에도 여러 번 드나든 곳이 틀림없었다. 그 곳에 들어간 시간은 정확히 8시 20분이었다.

진희와 태진은 호텔 앞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그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할 일이 없어진 태진은 애꿎은 담배만 죽이고 있었다. 진희는 피곤한지 등받이에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들이 호텔에서 나온 것은 11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태진은 진희의 어깨를 흔들었다.

“여자의 립스틱 색깔이 바뀌었는데.”

태진은 호텔 입구에서 막 나오는 여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래요? 관찰력이 예리하네요. 난 미처 몰랐는데.”

태진은 여자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카페에서는 분명 짙은 갈색이었는데, 지금은 연한 핑크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머리도 호텔에 들어갈 때보다는 흐트러진 상태였다. 그들이 객실에서 세 시간 가까이 무슨 짓을 했으리라는 것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녀석은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고 뭐라곤가 속삭였고, 여자는 당근을 본 당나귀처럼 하얀 이를 드러내며 힝힝거렸다.

여자가 내린 곳은 지하철 2호선 선릉역 앞이었다.

녀석은 차창을 열고 뭐라곤가 말했고, 여자는 녀석을 향해 손가락을 까불거리고는 지하도로 내려갔다. 녀석은 음악을 틀었는지, 핸들 위에 얹은 손가락으로 장단을 맞추며 연방 고개를 끄덕댔다. 차는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 하기로 하고, 옆 차선으로 들어가 녀석의 차를 추월해 버렸다.

“하여튼 대단한 놈이야. 어떻게 매번 만나는 여자가 다 다를 수가 있지? 그리고 만나는 여자마다 다 다른 호텔로 직행을 하고. 여자마다 가는 호텔이 다르니 나 같으면 헷갈릴텐데. 자식, 머리도 좋아.”
“부러우세요?”

진희가 웃음 띤 얼굴로 태진을 빤히 보았다.

“부럽긴.”
“얼굴에 그렇게 쓰여있는데요.”
“내가?”
“네.”

진희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이런 때 보면, 진희는 영락없는 개구쟁이였다. 그러나 진희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태진도 남자였다. 비록,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남자를 달고 있다고는 하지만, 소영이 같은 여자와 뜨거운 사랑을 나누고 싶은 한 마리의 수컷이고 싶을 때도 많았다.

녀석이 만나는 여자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하나 같이 늘씬한 몸매에 섹시한 분위기를 풍겼다. 한 마디로 내용은 어쩔지 모르지만, 겉포장이 그럴 듯하게 꾸며진 쭉쭉빵빵 빠진 일류급들이었다. 태진이 봐도 심심풀이 땅콩으로 데리고 놀기엔 안성맞춤인 애들이었다. 문득, 녀석처럼 여자에 관한 한 프로인 놈들은, 순진하거나 쑥맥인 여자보다는 차라리 까질 대로 까진 애들이 데리고 놀기에 좋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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