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사내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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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얼굴의 사내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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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렬 PD하고 카메라맨을 혼자서 테러했다고요?”

진희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당히 손을 봐줬어. 한동안 고생할 정도로만.”

진희는 탁자 위에 놓인, 태진이 테러할 때 사용한 칼을 들어 유심히 살펴보았다.

“…… 소영 씨를 진정으로 사랑하나요?”

진희는 ‘진정’이란 단어에 악센트를 주었다. 그렇게 묻는 얼굴 위로 순간적이지만 어두운 그림자가 스쳐가는 것을 태진은 놓치지 않았다.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녀로서는 의외의 반응이었다. 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상대방 물음에 침묵한다는 것은 그 물음에 긍정을 뜻하는 거라면서요?”
“누가 그래?”
“선생님 작품에 나오는 말인데 자신이 쓰고도 잊었어요?”
“…….”

태진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형광등 대신 켜둔 촛불이 바람이 없는데도 흔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태진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 진희는 녹차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고 천천히 마시고 있었다. 태진은 싫었다. 이런 어색한 분위기가 답답했다.

“서운해요.”

진희는 마시고 있던 녹차 잔을 ‘탁’ 소리가 나도록 탁자 위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시선은 중간에서 엉켰다. 진희는 아랫입술을 지긋이 깨물고 있었다.

“난 적어도…….”

태진은 그녀의 다음 말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선생님과 나 사이엔 벽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사실이 그랬고요. 하지만 이번 일 같은 경우는…….”

진희는 다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몹시 마음이 상한 듯했다. 태진은 지금 진희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에게 있어 진희는 유일한 친구이자, 여동생이자, 누님이자, 연인이자,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 진희에게 있어 자신의 존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서로가 하늘 아래 외톨이였다. 태진은 부모가 막대한 유산을 남긴 채 함께 죽었고, 진희는 어렸을 때 절에 버려졌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었다. 고속버스 안에서 운명적인 만남 이후로 두 사람은 자석의 양극이 서로 끌리듯 쉽게 가까워졌다. 암컷과 수컷이란 관계를 떠난 인간 대 인간으로서.

두 사람은 늘 같이 있다시피 하면서도 서로에게 얽매이지 않았다. 보통의 남녀가 한이불 속에서 하룻밤만 같이 지내면 연인으로 발전하는 것과 비교하면, 그들은 그렇게 많은 밤을 함께 지내면서도 아무 일이 없었다. 서로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바늘끝만큼도 간섭하지 않았다. 아주 특이한 관계였다.

정말이지 정상적인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부분이 많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그런 것들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두 사람 다 자유인이기를 원했고, 편집광적인 일면을 보이는 것조차 닮아 있었다.

“…… 나도 나를 모르겠어. 내가 왜 소영이에게만은 그렇게 깊은 관심을 갖고, 혼자서 짝사랑, 아니 상상 속의 사랑을 하며 집착하는지…… 이 세상 어떤 여자에게서도 느낄 수 없는 감정을 느끼는지…….”

두 사람은 지금까지 의식적으로 소영이에 관한 이야기는 피해왔었다. 그러나 오늘 태진은 마치 고백성사를 하듯 솔직해지고 싶었다. 자신의 감정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아니, 엄밀히 따지면 그런 감정을 속일 필요도 없었다.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든, 죽이고 싶어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이고 사생활이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진희가 자신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자신이 소영이를 죽도록 사랑하든 아니면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든의 문제가 아니라, 최 PD와 카메라맨을 테러하려 한 계획을 말하지 않았다는 그 자체라는 것을. 그 모든 걸 혼자만의 비밀로 하고, 행동에 옮긴 다음에야 말했다는 점을.

“미안해.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었어.”

그러나 그 말은 거짓이었다.

진희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한 거짓말이었다. 사실은 그들을 테러하기 전에 진희에게 도움을 청할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다른 일이라면 몰라도 소영이와 관계된 일에 진희를 끌어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혼자서 실행에 옮겼을 뿐이었다.

“속이 훤히 다 보이는 변명 하지 마세요. 제가 더 비참해지니까.”

진희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태진은 이런 경우, 여자가 눈물을 보일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한 번도 여자를 사귀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진희가 눈물을 보일 정도로 서운해하는 것을 보며, 앞으로는 절대로 그녀에게 비밀 같은 것을 갖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난 지금껏 선생님을 남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선생님도 저를 그렇게 생각한다고 믿었고요. 우린 비록 한핏줄은 아니지만, 오누이 이상으로 서로를 믿고 의지했어요. 제 말이 틀렸나요? 지금껏 저만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가요?”
“아냐, 진희 말이 맞아. 나도 진희를 친동생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어.”

태진의 말은 진심이었다.

운명적인 만남 이후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비록 잠자리에서 속살까지 섞은 사이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 이상으로 서로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육체적인 사랑을 초월한 정신적인 교감의 사랑이라고나 할까.

“앞으로 선생님이 사랑하는 소영 씨를 욕하거나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저도 함께 테러할 거예요.”
진희는 최 PD와 카메라맨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난도질한 상아 손잡이 칼을 촛불에 비쳐보며 말했다. 피 맛을 본 예리한 칼날이 번뜩였다. 마치 어둠 속에서 먹이를 노리는 야수의 눈빛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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