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이 담기지 않은 도자기는 생명력 잃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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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이 담기지 않은 도자기는 생명력 잃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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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명장 단아 박광천 선생....<2>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도자의 새로운 장르개발

▲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 ⓒ뉴스타운
“난 분명히 도예분야서 최고가 되고 말 것이야”

찬바람이 매섭게 불어치던 1979년 말 단아 선생은 중대한 결정을 내린다. 고암도예에서 기초적인 도예기법을 익힌 그는 결국 고향인 여주로 가는 차에 몸을 실었다. 머리는 복작했지만 자신의 결정이 조금이라도 후회가 되지 않기 위해 수없이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았다.

“난 분명히 도예분야서 최고가 되고 말 것이야. 그래야 아버지께서 날 원망하지 않을 것이야. 어렵게 지내 온 수년간의 객지생활이 분명히 약이 될 것이야.”

전형적인 농사꾼이었지만 자녀교육에 있어서는 엄격하기 그지없었던 아버지는 예상외로 반갑게 맞아 주었다. 집에서 쉴 시간도 없이 그는 여주에 내려 온지 얼마 안 돼 해동도예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단청문화와 동양화, 한국화의 대가인 인도 이인호 선생(문화재 화공 164호)의 제자가 돼 사사를 받았다.

“저의 스승님은 저에게 개인 사사를 해줄 정도로 공을 많이 들였고, 심지어는 돌아가시기 1년 전 저에게 기록할 것을 가지고 오라고 해 스승님의 그림에 숨겨져 있는 암호까지 모두 가르쳐 주셨다. 이는 훗날 스승님의 작품에서 가짜가 나올 것에 대비하신 것이다.”

3년 전 세상을 떠난 스승 이인호 선생은 유달리 단아 선생을 챙겼다. 그의 혜안에 일찌감치 단아 선생이 도예가의 명장이 될 것임을 예측했던지 모든 것을 그에게 전수해 주었다.

스승의 수하에서 화공으로 10여 년간 내공을 쌓아 온 단아 선생은 도예 실력이 완벽히 무르익을 무렵 스승의 허락 하에 1989년 개인 요장을 마련했고, 이듬해인 1990년 홀로 독립했다.

이후 자신만의 도자기를 만들기 위해 ‘전원도예연구소’를 설립하고 조상들의 숨결이 숨 쉬는 전통의 맥을 잇는데 전력을 쏟아 부었다. 하루에 한 두 시간을 자면서도 그는 혼이 담긴 도자기를 만드는데 있는 온 힘을 다했다. 그의 노력은 아름다운 결과를 창출해냈다. 지성이면 감천이 아니라 신이 그에게 내려준 끼와 재능이 백분 발휘되면서 명작다운 명작을 찾아낸 것이다.

“저는 혼이 담기지 않은 도자기는 생명력을 잃은 것이라고 판단, 그런 도자기에는 반드시 망치를 가한다. 만드는 과정이 힘들다고 혼이 빠진 작품을 잡고 있으면 전통은 영원히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이 저의 고집이다”는 단아 선생은 목소리는 부드럽지만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단아 선생은 그렇다고 전통만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잇는 전통을 오롯이 지키는 한편으로는 전통과 현대를 융합한 차별화된 작품세계 구현에도 앞장서고 있다.

“전통은 숭고한 조상들의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주는 것이며, 전통과 현대를 융합한 차별화된 작품세계는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고 있는 글로벌 시대 한국의 도자기가 선두에 우뚝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 진사 쌍태동 ⓒ뉴스타운
자신만의 예술세계 빛을 발하다

그는 ‘전원도예연구소’를 설립한 이후 ‘전원민속도예 작품은 우리민족의 대표적 예술품인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를 전승하여 제작되어진 도예작품’ ‘전원민속도예에서 제작되어진 각종 도자기는 전통소지 및 유약을 사용함으로써 한국의 전통적 특성과 개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 전통예술 작품’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런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예술세계를 실천했다. 그 스스로가 흙과, 물과, 불에 진실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는 창대하게 나타났다. 각종 예술대전에서 큰 상을 휩쓸었다.

△1994년 제12회 한국예술대제전 금상 수상 △1994년 제12회 신 미술대전 대상 수상(국회 상공위원장 상) △1995년 제12회 한국예술대제전 종합대상 수상 △1995년 한국 예술 문화협회 작가상 △1995년 제13회 신미술창작대전 최우수상 수상 △제13회 한국예술대제전 종합대상 △1996년 한국예술 문화상 수상 △2001년 일본문화진흥회 국제도예연구대상 수상 △2008년 제6회 뉴스매거진 제정 인물대상(민속예술대상) △2010년 인도네시아 문화부 장관 표창장 △2012년 자랑스런 국민대상 도예명장대상 수상 △2013년 여주시 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이런 가운데 그의 작품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위해 국내외 각종 전시회를 통해 빼어난 작품들을 선보였다. KBS불우이웃돕기 서·도화전(KBS), 한국미술연구회 회원전(신미술관, 세종문화회관), 한국 우수작가 초대전(LA방송전시관), 한국 문화원 신청사 1주년 기념 초대 작가전(일본), 고려대학교 명장 도예전, 한국 석봉미술협회 원로 및 초대 작가전, 서울미술관 초대작가 작품전, 서울 닭문화관 특별기획전(투계도 영구전시). 뉴질랜드의회 초대전 등에 참여했다.

단아 선생의 작품들은 첫 공정부터 마무리까지 모든 단계를 수공으로 하고 있다. 그에게는 수작업만이 작품에 진정한 혼을 불어 넣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특히 단아하고 담백한 맛과 멋을 생명으로 하는 백자에는 단아 선생의 진실성과 정성어린 노력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그의 대표적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상감철화화장토 투계’ ‘청화 백자 투계’ ‘상감철화화장토’ ‘싱감철화화장토 백화민화도용춤’ ‘상감철화화장토 십장생’ ‘상감철화화장토 취매도’ ‘백자청화 연문호’ ‘백자투계용춤’ ‘백자청화 달마호랑이’등의 작품에는 단아 선생의 힘찬 붓놀림이 생명력을 불어 넣었음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다. 깊은 산 속과 여주 일원에서 채취한 태토와 철토 등을 재료로 삼아 상감기법과 산수화, 사군자 및 문인화 등 추상화된 초문, 죽문, 용문, 당초문 등이 자유분방하게 표현돼 있는 상감철화화장토는 스승인 이인호 선생의 사사로 절제된 미학의 완성이 담겨 있다. 이 때문에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기운을 갖고 있다. 그는 2013년 3월11일 도자의 본가 여주군 제3대 도예명장이라는 영예로운 자리에 올랐다.

▲ 가마에 불을 지피고 있는 모습 ⓒ뉴스타운
‘진사’의 오묘함에 빠져버린 명장

예술의 경지에 도달한 붓놀림, 섬세함의 경지에 도달한 손놀림, 불꽃의 아픔까지 읽어내는 화부의 혜안까지 두루 갖춘 단아 선생이 애지중지하는 작품 중에는 진사가 많다.

진사는 동화라고도 하는데 이 기법은 세계최초로 우리 선조가 사용한 기법이다. 산화동을 이용하여 그릇 표면에 그림을 그리는 기법으로 도자기를 완성하고 나면 붉은 색을 띄게 된다. 섬세한 빛깔과 문양은 현대 과학도 재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다고 그윽한 빛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단아 선생이 구사하는 진사기법은 산화동에 여러 가지 유약을 혼합해 만든 것(노하우라 밝힐 수 없음)을 바른 후 가마 속에 넣고 오로지 휘몰아치는 장작의 불꽃으로 문양을 만들어 내는 기법이다.

단아 선생이 진사기법으로 만들어 내는 작품은 세상에 단하는 밖에 없는 것들이다. 재현이 불가능 한데다 사람의 힘으로는 따라할 수 없는 문양들을 불꽃이 만들어낸다.

“사실 산화동으로 그림을 그리는 기법은 재현이 가능할 수 있겠지만 불꽃에만 의존하는 기법은 작품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재현이 불가능 하다”는 그는 “사람이 그릴 수 없는 문양을 보면 감탄한다”고 말한다.

진사기법으로 구워낸 작품은 단아 선생의 말대로 각양각색이다. 문양의 오묘함은 물론 형상화된 문양이 세상과 닮은 것들이 많다. ‘쌍태동’ ‘사막’ ‘사랑’ ‘천사’등 보는 각도, 보는 사람에 따라 갖가지 문양을 연출해내는 도자기의 매력은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든다.

이중 단아 선생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단연 진사쌍호 ‘쌍태동’이다. 생명의 근본이라 불리는 태동의 문양이 작품 두 곳에 쌍둥이처럼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어머니 뱃속의 태아처럼 생긴 문양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단아 선생은 쌍태동이 만들어진 날의 꿈 이야기를 이렇게 틀어 놓았다.

“너무도 신기한 일이었다. 이날도 여느 때처럼 목욕재개 후 가마에 고사를 지내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데 이상하게 까치가 계속 따라다니며 울었다. 좋은 징조라며 집사람이 이번에는 정성들여 고사를 지내자고 제안했다. 막걸리도 여느 때보다 많은 7병을 마련했다. 평소 같으면 가마 앞에만 뿌리던 막걸리를 이날은 가마 주변을 돌아가며 정성스럽게 뿌렸다. 고사를 끝내고 박스를 깔고 잠시 쉬는 동안 나모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그 순간 꿈을 꾸었는데 뭉게구름이 떠 있는 하늘에 해와 달이 같이 뜨는 것이었다. 깜짝 놀라 잠에서 깼는데 그 꿈이 참으로 신기했다. 태몽 같은 꿈이어서 혹시 부정을 탈까봐 집사람에게도 예기하지 않고 가마에 불을 지폈다. 불을 지핀지 이틀, 불을 식히기 위해 또 사흘을 기다린 끝에 꺼낸 도자기에서 신의 역작인 쌍태동이 발견된 것이다.”

이 같은 소문이 전해지자 전국에서 도자기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모두 신기해했고 일부는 자신에게 팔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단아 선생은 팔지 않았다. 그 역시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작품을 얻은 만큼 수 억 원을 준다 해도 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 학생들에게 도예 강의를 하고 있는 모습 ⓒ뉴스타운
“후계자가 되겠다” 자청한 아들의 고마움

나이 50대 중반이 넘어가면서 단아 선생에게도 한 가지 고민이 생겼다. 자신도 이인호 선생에게서 사사를 받은 만큼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몰려왔다.

그동안 많은 제자를 가르쳐 봤지만 자신처럼 혼자서 전과정을 소화해 낼 수 있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대장은 대장대로, 화공은 화공대로, 조각은 조각대로, 화부는 화부대로 각자의 능력을 조합해 도자기를 만들 수는 있지만 여기에는 혼을 실을 수 없다는 맹점이 있었다.

고민이 깊어가던 때 큰아들 수동씨(33)가 아버지의 고민을 알았는지 후계자가 되겠다고 나섰다. 예상치도 못했던 일이었다. 아들은 대학에서 에니메이션을 전공한 IT전문가여서 설마 했는데 생각보다 적극적이었다.

아들 수동씨는 이후 여주대학 전통도예과를 졸업하고 도예에 대한 지식을 익힌 뒤 상명대학교 세라믹디지인과에 들어가 디자인에 대한 학문까지 두루 섭렵했다.

졸업 후에는 공식적으로 아버지가 아닌 도예명장 박광천의 사사가 됐다. 수동씨는 유니아트센타 도예강사를 거쳐 현재 도예연구가로 활동하면서 단아 선생의 모든 것을 전수받고 있다. 또한 설래(仙來, 올바르게 빚는 마음)라는 상표로 상품개발 및 디자인 연구에도 몰두하고 있다.

“아들은 디자인을 전공한 탓에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는 작품세계를 구현하고 있다”는 단아 선생은 “다행히 아버지의 피를 입증하듯 아들 역시 예상외의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칭찬했다.

수동씨가 빚어낸 찻잔, 연적, 주전자 등은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킨 작품들로 디자인 전문가의 솜씨가 그대로 녹아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단아 선생은 아들이 연구해 낸 새로운 작품들이 서구에 빼앗긴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돌려 놓는가 하면, 세계 속에 우뚝 서는 명품으로 사랑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단아 선생은 제자이자 아들인 수동씨에게 자신의 모든 기법을 전수해 대를 잇는 도자기 가문의 전통을 유지하겠다고 다짐했다.

세계적인 작품 만드는데 남은여생 쏟아 붓겠다.

단아 선생은 몸으로 체득한 실력에 이론을 겸비하기 위해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서예문화 최고위 과정을 수료한데 이어 2009년 황실문화재단으로부터 명인증서를 수여했다.

이러한 과정은 그가 후진양성과 함께 봉사활동에도 열과 성을 다하기 위함이었다. 단아 선생은 그동안 여주도자기 협동조합에서 8년간 이사직을 맡아 활동하는 등 지역 내 도자기 예술 발전을 위해 기여했으며, 조합차원서 운영해 온 ‘도공제’행사를 20여 년 동안 치르는데 선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요즘도 시간이 허락하는 한 여주도자기 협동조합에서 개최하는 학생 및 일반인들의 도자체험장에 직접 나가 시연 및 강의 등의 봉사를 하고 있다. 또 세계적인 축제가 된 여주도자기 축제 때마다 명장의 실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단아 선생은 국민들에게 간곡하게 목소리를 높인다. 도자기에 있어서도 우리가 전통을 무시하고 너무 빠르게 서구문화에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전세계적으로 한국의 전통 도자기의 우수성을 인정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정작 전통 도자기가 위대한 문화유산인지도 모른 채 고작 300년 역사도 안 된 유럽산 도자기들에 마음을 빼앗겼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또 “이름난 도자기 대기업들이 전통 도자기는 외면한 채 수십 년 동안 양식기만 만들어 돈벌이에만 급급하고 있는 모습”이라며 “이러다간 투철한 장인 정신으로 한국의 전통 도자기의 명맥을 잇는 사람들이 바보소리 들을까 걱정”이라고 덧붙인다.

그러나 단아 선생은 “앞으로 남은여생 명장의 호칭에 걸 맞는 세계적인 작품을 만들기 위해 힘쓸 것”이라며 “이런 일이 몇몇의 뜻만으로 되는 것이 아닌 만큼 정부의 관심과 배려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단아 선생은 앞으로 오랫동안 틈틈이 준비해왔던 한반도 곳곳의 명소를 모두 도자기에 그림으로 그려 넣는데 매진하겠다고 한다. 즉 본인이 직접 스케치 해 그린 실경을 도자기에 그려 넣어 역사에 남기겠다는 것이다. 그림과 도자기의 모양에 지역 특성은 물론 지리적 특성까지 불어 넣어 보겠다는 단아 선생은 그동안 준비해온 몇 점의 도자기를 내 보였다.

모두가 대작이자. 경이롭다. 아마도 화선지에 그림을 그렸다면 그는 이미 한국을 대표하는 화백이 됐을 것이 분명하다.

이런 그가 유독 닭 그림을 좋아 한다. 특히 한국의 토종닭을 많이 표현한다. 그 이유는 닭의 벼슬이 장원급제를 뜻하기 때문이란다. 이 때문인지 투계 그림은 실제를 방불케 한다. 털이 날리는 모습까지도 섬세하게 표현할 정도다.

“사실 뒤늦게 알았지만 할아버지가 그림에 남다른 소질을 가졌다고 하니 그 DNA가 모두 저에게 전이된 것 같다”는 단아 선생은 “그림이나 도자기를 빗는 일이 나이를 먹어가면서 빛은 더 발할지 몰라도 선배들을 보면서 힘에 부친 나머지 작품의 소형화를 부채질 하고 있는 것이 아쉽다”고 표현한다.

그가 40여년을 넘게 도공으로 살아오면서 가장 미안한 사람은 역시 부인이다. 예술가는 가난하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로 부인 고생 많이 시켰다며 눈시울을 적신다. 자신의 오늘이 잊기까지 부인의 내조는 딱히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크고 또 넓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인은 이런 남편을 백번 이해하고 있다. 그가 도예 명장을 넘어 대한민국의 대표적 인간문화재로서 세계유산에 기록될 만큼의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인 윤영애 여사는 “남편은 저와 결혼 한 것이 아니라 도자기와 결혼했다고 봐야한다”며 “남편이 도자기를 사랑하는 만큼 그 가치와 노력이 제대로 평가받는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다.

‘성실하고 진실 되게 살자’라는 문구를 좌우명으로 삼아 온 단아 선생의 행동거지에서 풍겨나는 성실과 진실의 색채는 금방 가마를 빠져나온 청자처럼 맑은 빛을 발산하고 있다.

그가 도예 명장을 넘어 인간문화재의 반열에 올라서기를 기대하는 부인의 소망이 우리 모두의 바람으로 와 닿고 있다. 단아 박광천 그는 신이 내린 예술가라는 평가가 지나치지 않은 사람인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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