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을 담아 국보급 도자기를 굽는 명장 중의 명장
혼을 담아 국보급 도자기를 굽는 명장 중의 명장
  • 안용흥 기자
  • 승인 2014.09.10 15:5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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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예명장 단아 박광천 선생 <1>조상의 숨결 간직한 전통의 맥 잇는다

▲ ⓒ뉴스타운
조선말기 대표적 화가 오원 장승업과 정유재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백제의 도공명인 이삼평의 혼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도예명장이 있으니 그가 바로 단아 박광천 선생(61)이다.

붓끝을 타고 스며드는 형형색색의 맑은 혼은 시대를 넘나들고, 손끝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도자의 자태는 그가 바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명장 중 명장임을 사실로 증명하고 있다.

신이 모든 사람에게 한두 가지씩의 재능을 주었다면, 단아 선생에게는 열 가지 재주를 준 것 같다. 마치 도예의 전통을 잇도록 신이 그에게만 유일한 재능을 준 것 아닌지 궁금하다.

대장에서부터 화공, 조각, 화부에 이르기까지 그의 손때와 혼은 온전히 도자기에 스며있다. 그렇기에 그의 손에서 탄생한 아름다운 작품들은 하나같이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듯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고고한 자태들을 뽐내고 있다.

질 좋은 흙을 찾는 것부터 가마에 불 때는 것 까지 그는 혼자서 땀을 흘린다. 화공 따로 조각 따로 대장 따로의 작품이 아니라 모두 그의 손끝에서 시작해 손끝에서 끝을 맺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도자기를 빚는 일에는 어떠한 조그마한 실수라도 용납하지 않는다.

“혼을 잃은 도자기는 생명력을 상실한 것”이라는 단아 선생의 손길은 세상 밖에서는 한없이 따뜻하지만 도자기를 빚는 순간만은 얼음장만큼 차갑게 느껴진다.

어쩌면 그는 도자기에 미쳐 있는 사람이다. 세상 그 무엇을 준다 해도 도자기 사랑만은 놓지 않을 것 같은 그가 40년이 넘는 도예가의 외길인생을 살아 온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 ⓒ뉴스타운
그림이 좋아서 도자기가 좋아서 시작한 이 길에서 그는 인간의 가장 고귀한 순수성을 알았고, 우리민족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오롯이 담아낼 수 있다는 것에서 도공의 삶을 사명처럼 받아 들였다.

배부른 예술보다는 배고픈 예술가를 고집하는 그의 순수함은 도자기를 닮은 듯 해맑기까지 하다. 이 때문에 그는 흙을 잡고, 붓을 잡고, 장작을 잡으면 세상 모든 고뇌를 내려놓는다.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흙과, 물과, 불에 피 끓는 혼을 불어 넣어야 그 끝에서 조상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생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전통을 고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도예작업장이 자동화 기계화되면서 마치 천편일률적 상품을 찍어내듯 한 모습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인류 최고의 종합예술품이 도자기다”

세상 수많은 예술품들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도자기를 빚어내는 일은 인류최고의 종합예술품이라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단아 선생은 “도공의 숨결 따라 혼을 불사른 결과는 흙과 물과 바람이 불의 오묘한 조화를 통해 예술적 감각이 어우러진 신의 예술을 창조하는 것”이라며 “이것이 인류최고의 종합예술품이라는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못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100개의 작품에서 단 한 점의 작품을 건지기 위해서라면 가차 없이 99개의 작품을 망치로 깨버리는 도공의 고집스런 면모도 잃지 않고 있다. 아무리 아름답고, 아무리 흠잡을 데가 없다 하더라도 도공의 혼이 스며있지 않으면 그 작품은 불가마를 나오는 순간 생명을 다한다.

“도자기에도 사주팔자가 있는 것 같다”는 그는 “망치를 맞고 깨질 것인지, 아니면 고귀한 자태를 뽐내며 세상 사람들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을지는 가마를 나온 순간 운명이 정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공은 어느 작품 할 것 없이 모두에 혼을 불어 넣지만 불가마를 거치면서 도자기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린다. 아무리 오랜 시간, 아무리 정열을 쏟아 부어도 가마 속의 불은 도공이 알지 못하는 실수까지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때문인지 단아 선생은 화부까지 본인이 직접 하고 있다. 도자기를 빚는 전 과정에서 가마에 불을 때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흙으로 도자기의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바르는 과정에서 흘린 땀도 결국 가마 속의 불이 좌지우지 하는 것만큼 조금도 소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 ⓒ뉴스타운
단아 선생은 가마에 불을 지필 때면 반드시 목욕재개한 후 정성을 다해 고사를 올린다. 도자기에 쏟아 붓는 정성만큼 고사에도 정성을 다한다. 그도 그럴 것이 도자기를 굽을 때의 날씨는 예상치 못한 환경을 만들고 이 때문에 작품을 망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흙과, 물과, 불은 참으로 오묘한 것 같다. 쏟아 부은 정성과 예술혼은 반드시 준만큼 돌려준다. 그러기에 도공들은 온 힘을 다해 작품을 만들고, 그 결과에 반드시 순응한다.”

그가 작품 속의 혼을 강조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전통은 단순이 빛깔과 문양이 비슷하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숨결이 살아 숨 쉬어야 한다는 고집스런 신념 때문이다.

혼이 살아 있는 예술품을 고집하기에 그는 모든 작품 속에 도공으로서 또 작가로서의 진실성과 정성을 담는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도예명장의 위용 보다는 순수한 인간의 내면 중시”

단아 선생은 도예의 본가 여주군이 선정 한 제3대 도예명장(2008년 5월7일)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 도예가들 중 독보적인 재능을 갖추고 있는 명장이다. 대장에서 화부까지 혼자서 모두 해내는 타고난 재능을 갖추고 있다.

그의 작품세계와 도자기를 빚는 예술세계를 지켜본 사람들은 명장을 넘어 선 인간문화재 감이라고 격찬한다. 그가 추구하는 예술세계를 이제 정부가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지원해 전통도예의 맥을 잇는 일을 할 때가 됐다는 것이다.

보통의 도예가들이 40~50대 전성기를 보내면 체력의 한계 때문에 명인의 명맥만 유지하는 애석한 현실에 비춰볼 때 안타까운 현실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더욱이 단아 선생은 현재까지도 전성기 못지않은 예술세계를 펼치고 있다. 붓끝은 생명력과 세월이 더해져 더욱 빛을 발하고 있으며, 겸허한 삶의 자세는 외유내강의 혼까지 불어 넣고 있다.

“도예명장의 위용 보다는 순수한 인간의 내면을 작품을 통해 보여주려 노력하고 있다”는 그는 “전통의 한편으로 전통과 현대를 담아내는 시공의 역작 개발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물감은 물론 유약까지도 스스로 개발해 사용할 정도로 노력파다. 시대적 상황 때문에 보여줄 수 없었던 새로운 기법들은 개발하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다.

단아 선생이 수 십 년간 연구해 온 소지와 유약을 동시에 사용한 작품들은 그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또 하나의 도자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비색청자와 분청을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는가 하면, 백자 청자 분청을 한 작품에서 입체적으로 감상 할 수 있다.

특히 요즘 그가 푹 빠져 있는 ‘진사’ 작품들은 훗날 국보급 도자기가 될 것이라는 평가는 물론 새로운 예술세계로 인도하고 있다. 진사는 도공의 혼이 실린 작품에 가마 속의 불꽃이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작품을 녹여내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의 근본은 우리 것”이라는 단아 선생은 봉사활동과 재능기부를 통해 국민 모두의 가슴에 도자기의 순수성이 스며들었으면 하는 소박한 마음을 내비친다.

농군의 아들에서 명장이 되기까지

여주군 강천에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단아 선생은 어릴 때부터 그림에는 남다른 소질을 발휘했다. 친구들의 공책(노트)에 그의 그림이 안 그려진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런 단아 선생을 싫어했다.

“아버지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저에서 ‘환쟁이는 장차 밥을 빌어먹기가 일쑤’라면서 집에서 그림 그리는 현장을 목격하면 다짜고짜 지게짝대기로 두들겨 패기까지 했다”는 그는 “그러나 그림에 대한 열망을 접을 수 없었다”고 토로한다.

그림보다는 공무원이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매를 피해 그림을 그릴 생각에 중학교에 진학하자 말자 무작정 가출해 서울로 상경했다. 하지만 아무런 연고도 없는 서울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누구하나 알아주고 반겨주는 사람 없는 서울 거리를 한 없이 걷고 또 걸었다. 배가 고파 쓰러질 지경에 도달한 채 노숙까지 했지만 집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의 매도 매지만 서울에서 그림만 그릴 수 있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결심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거지꼴을 한 채 노숙생활이 이어지던 그에게 실낱같은 희망이 찾아왔다. 동양화 학원을 운영하던 성명미상의 한 은인을 만난 것이다.

단아 선생은 이 학원에서 잔심부름을 하면서 틈틈이 그림공부를 익혔다. 어깨 넘어 배우던 그림임에도 그 능력이 탁월함을 알아 준 원장의 배려로 체계적인 그림수업까지 받을 수 있었다.

일취월장하기 시작한 그의 그림솜씨는 12살의 어린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매·난·국·죽을 완벽히 소화시킬 만큼 사군자 기법을 빠르게 소화했다. 특히 시간이 지날수록 동양화에서 보여준 실력은 같이 그림을 배우는 동무들이 부러워 할 정도까지 됐다.

이런 그에게 도예의 길로 인도하는 운명적인 날이 찾아왔다. 1975년 어느 날 길에서 우연히 고향 후배를 만났다. 이 후배로부터 그는 인천에 있는 한 도자기 요장에서 그림에 소질 있는 사람을 구한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그는 도자기의 동네에서 태어난 직감 때문인지 곧바로 승낙했고 고암도예라는 곳으로 들어가 화공의 첫발을 내딛었다.

“그림에도 자신이 있었지만 도자기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저를 마력처럼 끌어들였다”는 그는 “이날이 나를 도예명장으로 만든 단초가 됐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화공은 만만치 않았다. 화선지에 그리는 그림과는 확연히 달랐다. 흙으로 빚은 도자기는 순식간에 물감을 빨아들여 본인이 의도하는 것과 같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도자기의 찰흙이 수분을 빨아들이는 습성을 파악한 이후부터는 자유자재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러기를 4~5년 정신없이 달려왔던 그에게도 철이 들었는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스럽기까지 했던 아버지 생각이 가슴을 짓눌러 오기 시작했다. 그리움에 몸서리치던 어느날 단아 선생은 고향으로 갈 생각을 굳힌다. 이때가 1979년이다.

▲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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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안개구리 2016-03-22 21:45:51
이삼평은 조선에 있을 때 도자의 명장이 아니었음.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그의 나이는 12세였고 가마공방에서 물나르는 심부름꾼이었다가, 일본군이 들어오자 그들을 돕다가 일본으로 간 것이지 납치된 것이 아님. 이삼평이 도공이다, 그가 도자기제작법을 일본에 가르쳤다는 것은 한국사람의 소설임. 그가 일본에 가서 열심히 일해서 카올린을 발견해서 일본이 백자를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은 사실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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