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이렇게 화를 낸 적은 별로 없었다. 다른 여자와 여관방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도 이처럼 화내지는 않았다. 능력만 있으면 열 계집은 못 거느리느냐. 능력되면 하시오 하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일은 달랐다. 새벽부터 일터에 나가서 밤이 늦도록 일하고 모은 돈을 허락도 없이 썼다는 것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해 준 것이 하나도 없다는 울분을 토해낸 것이다.
“우리 너무 오래 살았다고 생각지 않아. 시집와서 한 번도 앉아서 밥을 먹은 적이 없어. 당신도 생각해봐. 시어머니가 나한테 어떻게 했어. 맹장수술하고 몸이 허해서 당신이 사골을 사 왔을 때도 내가 먹는다고 끓인 사골을 수체구멍에 넣지를 않나, 옷을 빨아 빨래 줄에 널어놓으면 때도 안 빼고 널었다며 물에 다시 담그지를 않나, 당신과 내가 잠자는 것이 샘이 나 방문 앞에 지키고 있다가 결국은 각 방을 쓰게까지 하지 않나. 시어머니 죽고 난 다음부터 당신은 사업인가 뭔가 한다면서 집에 돈 한 푼 갖다 준 적이 없잖아. 먹고 살만 하면 또 사고를 치고… 당신 뒷바라지만 한 지 20년이야. 이젠 나도 내 것이 중요하고, 내가 벌어 내가 쓰고 싶어. 우리 부부라는 것이 이해될 때까지 떨어져 살아봐요. 내게 당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내가 당신을 찾아갈 것이고, 당신이 내가 필요하다면 당신이 찾을 때까지 떨어져 있어 봐요.”
아내의 결심은 대단했다. 옛날처럼 달콤한 말로 설득하기 어려울 듯했다.
“좀 생각해보자.”
훈이는 이렇게 말한 뒤에 밖으로 나왔다. 마땅히 갈 곳도 없어 한강고수부지를 걸었다. 강물은 말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를 생각해야 했다. 벤치가 있는 곳에 연인이 나란히 앉아 입에 것을 서로 내어 먹고 있었다. 부부는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하며 눈을 돌렸다.
‘일단 떨어져 있어 보자.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해 보자. 그리고 아내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빌고 들어가자. 그러나 나에게는 꽃보다 아름다운 연지가 있다.’ 생각하니 별로 서럽지 않았다. 해가 어둑어둑 저물어 가고 땅거미가 길게 늘어설 때야 훈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와 아내가 있어야할 부엌에는 밥 먹은 그릇들이 설거지통에 수북이 쌓여있다.
여느 때 같으면 팔을 둥둥 걷고 수세미에 참그린을 듬뿍 묻혀 씻었을 테지만 가방에 옷가지를 챙겼다. 당장 입을 옷 몇 벌과 세면도구만 챙겼다. 갈 곳이라고는 고시원 밖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값도 저렴하고 직장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조용한 고시원이 있었다. 말이 고시원이지 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아침은 솥에 밥이 있기에 반찬만 가져가면 먹고 싶은 대로 얼마든지 먹을 수 있어 좋았다.
혼자 겨우 누울 수 있는 침대 하나와 책꽂이가 달린 책상이 전부였다. 청소를 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냄새가 나고, 전등불을 켜지 않고는 잠시도 앉아 있을 수 없는 한 평 남짓한 방에 가방을 던져 놓고 침대에 누웠다.
얼마까지 있겠다는 보장도 없다. 아직 연체 한 번 해보지 않은 카드가 생활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든든한 구석이 있었다. 연지를 만나 이혼하기로 했다고 말하면 좋아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자 입가에 미소가 절로 흘러나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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