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독립선언서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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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독립선언서의 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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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린(崔麟)을 잊고 3.1절을 말할 수 없다

기미년 3월1일에 거의(擧義)하자는 생각을 가지고 미리 계획한 지사가 있었다. 최 린(崔麟), 바로 그 사람이다.

최 린은 동학교 후신인 천도교도로 보성고등보통학교 교장이었다. 미국 대통령 월슨이 세계 약소 겨레를 해결하려고 나서자, 최 린이 <때가 왔도다.>라고 느끼고서 조선이 일본에게 떨어져 나온다는 선언을 하게 되면 미국이 뒤에서 돕기를 할 것으로 믿었다.

최 린은 이 거의(擧義)를 전국이 뒤에서 돕기를 할 것으로 확신했다. 최 린은 이 거의를 천도교(天道敎) 만으로 선언하기로 마음 먹었던 것이다. 천도교인들이 이르기를 <우리들 만으로 어렵다>고 하기에 최 린은 한 발 뒤로 물러나서 부왜인(附倭人)들을 참가시키려고 했다.

부왜인들이 거절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최 린은 친구 송진우(宋鎭禹)에게 도움을 청했다. 송진우가 최남선(崔南善)을 최 린에게 소개했다. 송진우와 최남선이 최 린에게 야소교도 가운데서 동지를 구하자는 말을 했다.

최 린은 야소교인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했다. 최남선이 야소교인 이인환을 소개했다. 야소교인들이 최 린을 보고 하는 말이<선언>을 하지 말고,독립을 원한다는 (청원서)를 내자고 했다.

(선언을 하지 않을 바에는 청원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최린이 굳게 말했다. 야소교인 오기선은 최 린 말에 불복하면서 탈퇴했다. 최 린은 강렬했고, 야소교인은 미지근했다.

기미만세의거(己未萬歲義擧)를 일으킨 최 린은 <독립을 선언하자>라고 했고, 야소교인들은 <독립을 청원하자>라고 했다. 청원할 바에는 당신네 야소교인들 하고 함께 할 수 없다고 최 린이 우겼다. 야소교인이 최 린을 따르겠다고 했다.

천도교인도 아니고, 야소교인도 아닌 최남선이 청원 쪽으로 글을 지었다. 글 제목은 <독립선언>으로 되었으나, 글 내용은 <독립청원> 쪽으로 됐다. 청원쪽으로 되다가 보니 감동을 주지 못하는 글로 됐다.

기미년 만세의거가 종교 대표자가 모여서 일으켰다는 설은 사실과 다른 거짓말이었다. 기미만세의거는 최 린이 일으킨 의거였다. 최린은 동학교 후신인 천도교인이었다.

한룡운은 동학교도로 일하다가 불교도가 되어서 승려로 되었다. 최 린은 동학교도로 일하다가 그 동학교가 이름이 바뀌어서 천도교인으로 된 것. 일본땅 동경에서 두 사람이 알게 된 사이였다.

최 린이 승려 한룡운에게 기별하여 서명하라고 했을 뿐, 불교 족으로 한룡운을 부른 것이 아니었다. 최 린은 유교인을 한 사람도 넣어주지 아니했다.

유교인을 넣어주면 천도교인이 주동으로 되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에서 유교인을 넣어주지 않았던 것으로 보였다. <우리들 천도교가 차지할 거룩한 겨레 업적을 유교도에게 넘겨 줄 수가 없다>는 것이 최 린이 지니고 있었던 계략으로 보였다.

최 린이 동지 규합에 모였던 장소는 1차가 손병희 집(4회)이었고, 2차가 최 린 집(3회)이었고, 3차가 김성수 설립 학교, 중앙중학교 숙직실(4회)이었고, 4차가 김성수 별집(2회)이었고, 5차가 최 린 집(3회)이었다.(나라잃은시대 동아일보)

동지 규합에 나선 최 린이 송진우 .최남선을 찾아서 자기 집으로 초청했다. 송 . 최 가운데 어느 사람이 최 린에게 말하기를 <일본 귀족 박영효 . 윤치호...를 넣어서 일본사람들을 깜작 놀라게 하자>라고 했다. 최 린이 승낙하고는 각각 분담을 시켰습니다 윤치호 . 박영효가 모두 거절하더라고 최 린에게 보고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최 린이 <그러면 우리들 끼리 하자>라고 했다. 최린의 제안에 최남선이 곧장 답하기를 <나는 속으로는 돕되 겉으로는 빠지련다> 라고 하자, 송진우 역시 <나도 속으로는 돕되 겉으로는 빠지련다>라고 했다.

최남선은 <학자가 되고 싶기에 그렇다>라고 했고, 송진우는 <학교 교장이기에 그렇다>라고 했다. 최남선이 내조자로 남겠다고 하니, 최 린이 <독립선언서>를 지으라고 했다. 최남선이 최 린을 보고 <그대가 주동자이니가 그대가 짓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라고 하니, 최 린이 답하기를 <나는 요사이 너무 분주 하여 붓을 잡을 겨를이 없네>라고 했다.

중국땅 상해에 <임시정부>가 생겼다. 일본사람들은 가정부(假政府) 라고 했다. 1919년 박문의 수양달 배정자(裵貞子)가 려운형(呂運亨)을 죽이려고 했다.

려운형은 해삼위(연해주)에서 배정자의 손에서 빠져 나와 전차에 올랐다. 천진(天津)에서 뛰어 내렸다. 그 뒤 1929년 7월에 상해 야구장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들어 갔다. 박문의 수양딸 배정자는 경남 밀양 고을 사람이다.

박문의 수양아들 이동치호(윤치호)는 아침에 동쪽일본국을 바라보고 절을 올렸다고 한다. 일본국이 전쟁에게 이겨달라고 비는 절이라고 했다. 이름인즉 동방요배(東方遙拜)였다고 한다.

려연구(呂燕九)가 지은 <<나의 아버지 려운형>>애 나오는 말이다.내가 아버지를 따라 중앙고보뒷산 솔밭에 아침운동 나갔는데, 윤치호 등 친일 거두 서너 명과 맞닥드렸다.

그네들은 매일 이렇게 아침마다 모여서 동방요배(東方遙拜) 의식을 가졌다. 윤치호가 아버지를 보고 <몽양도 우리와 같이 참가하시지>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말하기를 <절은 아무데나 대고 하는 것이 아니야. 자네들이나 하게>라고 했다. <나라를 빼앗긴 것 만도 원통한데, 나라를 빼앗은 적국의 우두머리 한테 절을 하다니, 말이나 될 법인가> 였다 라고 했다.

[최린의 기구한 일생]

최린 [崔麟, 1878~1958]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의 주역
창씨명 佳山 麟. 1878∼? 1934년 중추원 칙임참의.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이사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 회장

변절의 극치

"기미독립선언을 주도한 피고가 왜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는가?"
재판장 서순영(徐淳永)이 매섭게 추궁하였다.
"기미년 당시 일제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고 해서 그들은 그 후 나를 주목하고 위협하고 또 유혹하여 끝내 민족을 배반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오직 죄스럽고 부끄러울 뿐이다."

피고는 목멘 소리로 대답하고 머리를 숙여 버렸으며, 방청석도 침통한 분위기였다. 이윽고 답변이 계속되었다.

"내가 택할 수 있는 길은 세 가지뿐이었다. 첫째는 망명하는 길이요, 둘째는 자살하는 길이며, 셋째는 일본 군문(軍門)에 항복하는 길이었다. 첫째와 둘째 길을 택하지 못한 것은 늙은 부모에게 불효할 수 없어서였다."

우리는 일제 침략하에서의 민족해방운동으로 흔히 3·1 운동을 꼽고, 이를 준비했던 인사들을 "민족대표"로 기억하고 있다. "민족대표" 33인 가운데서도 천도교측 인사로서 3·1 운동 준비를 실질적으로 주도했던 사람으로 최린을 떠올리게 되는데, 위의 글은 3·1 운동으로부터 꼭 30년이 지난 1949년 3월10일 반민특위 재판정에서 최린 자신이 친일행각을 구차하게 변명하던 모습이다.

이 날의 공판을 지켜봤던 한 기자는, 공교롭게도 법정 정면에 엄숙히 걸려 있는 독립선언서가 최린을 모욕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고 썼다. 독립선언의 주역으로서 일제 법정에 서서 당당하게 열변을 토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그가 친일파로 법정에 끌려나와 고개를 떨구던 모습을 두고 흔히들 험난했던 근대사의 격랑 속에 끝내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훼절했던 한 인간의 말로를 운운하게 된다.

독립선언의 주역과 친일파라는, 서로 극과 극을 달리는 두 모습만을
현상적으로 대비시켜 보면 그의 개인적 삶은 분명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변절의 극치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자라온 환경과 살았던 시대의 역사 속에서 그의 삶의 궤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를 반드시 변절이라고 부를 수도 없을 듯하다. 오히려 독립선언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예외적인 현상이었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시세의 변화와 출세에 민감한 중인집안의 청년정객

최린은 1878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집안은 중인 출신으로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고 한다. 이 때는 안으로 봉건사회가 해체되어가고 있었으며 밖으로는 개항과 함께 서구문물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당시 중인들은 오랫동안 양반들로부터 억압을 받아온 까닭에 봉건체제의 변화, 나아가 조선왕조의 변혁을 갈망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시세의 변화와 출세에도 극히 민감한 양면성을 갖고 있었다. 최린 역시 이러한 양면성을 갖고 있었으며, 특히나 출세에 대한 집념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점은 그의 삶의 행로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그는 어린 시절 고향에서 한학을 배우고, 1896년 당시 개화파 정권에 줄을 대고 있던 아버지의 권유로 19세에 함경남도 관찰부 집사가 되었다. 그런데 이 해 10월 새로 부임한 관찰사 서정순(徐正淳)이 갑오개혁의 신제도를 실시하여 순검(巡檢)을 "인민보호관"이라고 하면서 도내 유지의 자제들을 모집하였다.

순검이 무슨 대단한 벼슬자리인 줄 알고 응모했던 그는 미관말직임을 알고 곧바로 박차고 말았다. 젊어서부터 유난히 야심이 컸던
그가 궁벽한 지방 감영의 미관말직에 만족할 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1901년 상경하여 벼락출세의 길을 찾으며 전전긍긍하다가 1902년 활빈당과 일심회에 가담하게 되었다. 당시 활빈당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를 추종하는 불평객들의 집단으로 부호들의 재물을 탈취하여 박영효의 정치자금을 마련하고자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곧 해산되고 말았다.

이무렵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도 조선 정부로부터 임관통지가 없어 귀국하지 못하고 불만만 쌓아가던 일단의 청년장교들이 있었는데, 일본에 망명해 있던 유길준이 이들을 국내에 있던 불평 정객들과 연결시켜 대한제국 정부를 전복하고자 일심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였다.

야심 많던 최린은 오세창,유동근 등과 함께 여기에 가담하게 된다. 그러나 곧 발각되어 조택현,장호익, 김형섭 등 주모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최린은 체포를 모면하고 일본군의 도움으로 부산을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였으니, 일본이라는 나라로 정치적 도피를 할 수 있었던 경험을 한 셈이었다.

이듬해 최린은 일심회사건 연루자들에 대한 특사령이 내리자 귀국하여 개화파의 주선에 의해 외부주사에 발탁되었다. 그 후 1904년 26세의 늦은 나이로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어 다시 일본에 건너가 도쿄부립제일중학을 거쳐 메이지대학 법과를 다니면서 일본을 통해 서구의 근대문물을 익히게 되었다.

이 때 그는 같은 중인 출신으로 3·1 운동에서부터 친일행각에 이르기까지 비슷한 정치적 궤적을 그렸던 최남선*을 같은 황실유학생으로 처음 만나게 되었고, 1920년대 이후 정치적 보조를 같이하게 된 김성수, 송진우, 장덕수* 등보다는 한 발 앞서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09년 귀국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서 최린은, 충청도 부자 이상헌으로 이름을 바꾸고 망명해있던 손병희를 만난다. 그의 일생에 있어 중요한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그가 손병희를 알게 된 것은 일심회 일로 같이 활동했던 천장욱이라는 사람의 소개에 의한 것으로 짐작되는데, 이후 손병희를 자주 만나면서 장차 그가 천도교에 입도할 수 있는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귀국하여 정계 진출을 모색하였으나 이미 국운이 기울어 "한일합병"과 함께 모든 정치단체가 해산되는 상황이었다.

그러자 그는 종교단체인 천도교가 바로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펼칠 수 있는 입지가 되리라 판단하고 1910년 천도교에 입도하여 곧 손병희의 측근이자 일급 참모로 활약하게 되면서, 이후 천도교는 일생 동안 그의 활동기반이 되었다.

당시 손병희의 주위에는 천도교를 정치활동의 발판으로 활용하고자
했던 권동진, 오세창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가 3·1 운동의 준비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도 손병희의 측근에 있으면서 권동진, 오세창 등 천도교 간부들과 함께 1차대전 후 변화하는 세계정세의 흐름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선언의 주역, 흑막 속의 자치운동 주모자로

손병희를 위시한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의 천도교 지도부가 1차대전의 종결과 함께 정치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18년 말경부터라고 한다. 그러나 이들이 처음부터 독립운동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세계적으로 풍미하고 있는 민족자결주의의 물결 속에서 잘 하면 일제통치하에서나마 자치(自治)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도쿄에 건너가 일본 정계 요로에 이를 교섭하는 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9년 초 도쿄 유학생을 비롯하여 해외 각지에서 독립운동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최린은 국내외의 혁명적인 분위기에 고무되기 시작하였으며 또 이러한 시세의 흐름에 뒤떨어져서는 사후 판세가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전개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 이르게 된다. 그리하여 재빨리 독립선언을 발표하는것으로 방향을 선회한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짐작되듯이 3·1 운동 시기에 최린이 일제에 대결하는 자세는 결코 투철한 것이 아니었다. 최린은 3·1 운동의 재판정에서"한일합병"에 대해 "조선이 병합된 것은 러일전쟁의 당연한 결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며, 또 당시 조선의 정치는 지독한 악정이어서 도저히 조선의 안녕·행복을 유지·증진하기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에 병합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피치 못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진술하였다.

"민족대표"최린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안타깝게도 일제가 조선을 "병탄"하면서 선전했던 내용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만큼 그의 생각은 일제의 침략논리에 세뇌되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 현재의 조선인의 지모와 실력으로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재판장의 물음에 "일본 정부의 도움을 얻으면 독립국으로 설 수 있다"고 대답하였으니, 이 말은 곧 일본의 도움이 없으면 독립국으로의 유지가 어렵겠다는 뜻이 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의 독립사상의 실체가 어떤 것이었는가를 짐작하게 되는데, 총독부 당국은 그 점을 이미 간파하여 독립선언으로 성망(聲望)을 얻은 그를 본격적으로 회유하여 자신들의 품안에 끌어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최린은 3·1 운동으로 3년형을 선고 받았다. 그런데 총독 사이토(齊藤實)를 비롯한 당국자들은 최린을 "문화정치"에 이용하고자 1921년 12월에 가출옥시켰다. 이후 그는 이광수의 [민족개조론]을 천도교에서 발행하는 {개벽}에 게재하는 등 일제 당국자의 "문화정치" 이념에 충순하기 시작하여 민족주의세력의 타협화를 유도하는 "문화운동", "자치운동"에 앞장 섰다.

1920년대 사이토 총독의 통치정책에 호응하여 벌였던 그의 활동 가운데 가장 집요하게 전개되었던 것이 바로 자치운동이었다. 그는 1924년 초 {동아일보}의 송진우, 김성수 등과 함께 자치운동을 추진하기 위한 단체인"연정회" 결성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광수의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경륜]에 비난이 쏟아지자 일단 이를 유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1926년에들어 사이토 총독의 정치 브레인이었던 아베(阿部充家)의 간여 아래 송진우,김성수, 최남선 등과 다시 자치운동조직인 "연정회"의 부활계획을 주도하였으며, 해외 민족주의세력의 후원을 얻기 위해 외유의 길에 올라 이승만, 안창호, 장덕수 등을 만나 교섭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많았던 천도교를 분열시키고 그 가운데 신파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자치운동 분쇄를 위해 결성된 신간회에 참여한 구파측과 정치적으로 대립하였다. 또 민족주의자들이 상당수 망라되어 조직했던 "조선농민사"를 자치운동의 기간부대로 삼고자 이를 천도교 신파측의 천도교 청년당의 산하단체로 편입시켜 버렸다.

이런 최린은 1930년대 초까지 사이토 총독이나 사카다니(阪谷芳郞) 등 일본정계의 거물들과 교류하면서 집요하게 자치운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자치운동이란 실질적으로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용인하는 것으로 독립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최린 자신도 아베와의 대담에서 밝혔듯이"조선은 독립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가 끝끝내 자치운동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했던 것은 그의 권력욕 때문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며, 그런 점에서 자치운동은 가장 그다운 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베에게 "나도 민중의 신임(?)만 얻으면 반드시 조선의회의 한 사람이 되기를 사양치 않겠다"고 말한 대목이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다시는 민족자결주의에 속지 않겠다"던 가야마 린(佳山 麟)

사이토 총독의 조종하에서나 가능했던 최린의 자치운동 행각도 만주침략이 터지고 일제의 파쇼화정책이 노골화되면서 설 땅을 잃게 되었다.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동원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그를 이용하려는 일제의 회유가 본격화되었고 그의 출세욕은 아무런 저항없이 이를 받이들이게 했던 것 같다.

1934년 4월 중추원 칙임참의가 되어 세인들의 이목을 끌더니 11월에는 내노라하는 친일파 박영철* 등과 함께 "시중회"(時中會)를 조직하여 대동방주의(大東方主義)를 내걸고 일선융합(日鮮融合)을 외치기 시작하였다. 이제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곧이어 1937년 총독부의 기관지 {매일신보}의 사장에 취임하여 "동양평화의 대정신"이라는 연제하에 내선일체로 국민적 적성(赤誠)을 발휘할 것을 외쳐댔으며, 중추원 참의 지방강연 행각에 참여하여 충성스런 황국신민이 될 것을 떠들어댔다.

1940년에는 일제가 전시체제를 한층 강화하여 결전체제로 끌어올리기 위해 내선일체와 전시경제체제의 완성을 목표로 전국의 모든 직장과 개인을 얽어넣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이사가 되었다.

1941년에 접어들자 그는 {삼천리} 사장 김동환*과 함께 임전체제하에서 자발적인 황민화운동을 하기 위해 "임전대책협의회"를 조직한 뒤 각지에서 강연행각을 벌였는데, 9월 4일 부민관에서 열린 임전대책연설회에서 "읍소"(泣訴)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조선 사람은 희생심이 부족한데 이 비상시국을 희생적 각오로 떨쳐 일어서야 할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이 해 10월 "임전대책협의회"이 윤치호* 계열의 "흥아보국단"(興亞報國團)과 통합하여 "조선임전보국단"으로 재발족될 때, 최린은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리고 12월 14일 부민관에서 조선임전보국단 주최로 열린 미영타도대연설회에서 그는 "루즈벨트여, 귀가 있거든 들어보라. 내가 윌슨에게 민족자결주의에 속아 천황의 반신(反臣) 노릇을 하였다.

이 절치부심할 원수야! 이제는 속지 않는다. 나는 과거를 모두 청산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라"라고 까지 하여 자신이 주도했던 독립선언 자체를 깡그리 부정하고 있으니, 이 대목에 이르면 그가 벌인 친일행각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가히 짐작케 한다.

그런 그였기에 일제의 패망이 눈 앞에 다가온 1945년 6월까지도 "조선언론보국회"를 결성하여 회장으로서 언론총진격 대강연회를 열어 본토결전작전에 호응할 것을 외치고 있었다.

이처럼 그의 생애는 출세에 민감한 중인 출신이라는 집안 배경과 적극적이고 야심많은 성격, 그리고 많은 신진지식인들이 세례 받았던 근대화지상주의와 실력양성론이라는 사상적 조류, 끝으로 일제의 끊임없는 협박과 회유가 교차되면서 한때는 독립선언의 주역이 되기도 하였으나 결국은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말았다.

민족반역자 최린은 반민특위에서 석방되어 서울에 칩거하던 중 한국전쟁 때 북으로 납북되어 그 후의 정확한 근황을 알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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