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 청산은 역사적 비극의 되풀이
친일파 청산은 역사적 비극의 되풀이
  • 최익주 칼럼니스트
  • 승인 2004.12.01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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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청산보다 친일 청산이 선행되어야

중국의 무협지나 무협영화는 부모의 원수를 앙갚음하기 위해 원한을 대물림해서 피비린내 나는 보복과 교활한 권모술수가 행해진다. 이는 씩씩한 젊은이들이 자기 사회에 진지하게 참여해서 건전하게 이끌면서 미래를 더욱 밝게 만들어가지 못한다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닌다. 때문에 결말은 확인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뻔하다.

이처럼 무협영화는 팔팔한 젊은이들이 오직 개인과 가정의 비극에 인생을 내맡긴 채 악감정으로 일관한다는 점에서 중국의 후진적인 역사나 국민성을 대변해준 셈이다. 만일 세상이 실제로 무협영화처럼 전개된다면 누군가에 의해서 한번 불상사가 발생되면 원한과 보복의 칼부림 속에서 싸움과 살육을 정의와 의리로 착각해서 당당하게 피해와 고통을 주고받게 된다.

인류는 쓰라린 과거에도 불구하고 현재를 건전하고 아름답게 꾸미면서 더욱 노력함으로써 미래를 향해 부단히 전진해왔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과 국가들은 이처럼 평범한 상식을 현실에 적용하지 못하거나 아예 망각해버린다. 그래서 우리도 과거사를 차원 높게 해결하지 못하고 벌써 수십 년째 원론적인 수준에 머물면서 비슷한 논쟁으로 대립하며 분열해왔다.

물론 아무리 해묵은 과거사라 하더라도 국가적인 문제나 역사적인 사건들은 기어코 해결해야 한다. 과거사가 똑바로 정리되어야만 비극적인 과거에 종지부를 찍고 미래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과거사가 잘 정리되어야만 서로 용서하고 반성하며 새롭게 출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해방 후부터 최근의 "친일파 청산"까지 주장과 논쟁이 반복될 뿐이었다. 때문에 친일파 청산을 위한 시도와 논쟁들 역시 결국 일제시대의 친일파만큼이나 비열한 작태를 연출할 수밖에 없는 모양새로 바뀌어가고 있다.

특히 친일파 청산이 수십 년째 실패를 거듭했거나 아예 시작조차 못했을 정도로 난해하다는 사실은 거의 인식조차 못할 정도로 쉽게 생각해왔다. 다시 말해서 막연하게 친일파 청산을 주장했다가 무위로 끝남에 따른 사회 혼란과 국론 분열을 책임지거나 고민하고 반성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원래 합리적인 정책이나 운동은 반대나 유혹이나 저항에 부딪쳤을 때 더욱 탄력을 받아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하지만 국민을 상대로 광범위하게 공감대를 얻어서 출발하지 못한 운동, 정책, 규정은 한계에 부딪치면 쉽게 중단되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

또한 요즘과 같이 실정의 반복 속에 위기와 고통의 연속인 속에서 국민의 관심과 사회분위기를 과거로 끌어감으로써 무협지 수준의 보복이 전개되는 것은 비열할 뿐 아니라 반인륜적이고 반민족적인 역적 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든 친일 행위가 없었다고 해서 친일과는 무관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친일을 할 수 있는 기회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많은 백성들이 일본인이나 앞잡이들에게 비위를 맞추고 굽실거렸거나, 무서워서 피해 다니며 고개도 들지 못했거나, 이중 삼중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는 그들 중 일부는 앞잡이 노릇을 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누군가가 친일 행위를 했다고 해서 그대로 친일파로만 몰아버릴 수도 없는 것도 사실이다. 이처럼 친일파 논쟁은 복잡하고 미묘하기 때문에 친일 청산을 사람을 위주로 추진하는 것은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이제 100년에서 60년 동안 해결되지 못한 친일파 청산에 대한 나름대로의 견해와 해법을 피력하고자 한다.

친일 행위의 원인과 책임은 개인보다 먼저 국가(조정)에 있다. 친일파 청산이든 친일 청산이든 똑바로 이해하고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일본 침략 당시 우리 조정(나라)의 상황이 먼저 확인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이전의 사회적 실상이 서민의 입장으로 확인되어야 한다. 그런 이후 개인적으로 저질러졌던 친일 행위를 따지는 것이 순서다. 당시의 우리 상황을 살펴보면

빈곤과 무지와 차별로 얼룩진 시대였다. 일본이 침략하기 훨씬 전에 백성의 삶은 비참함 자체여서 고통과 불행의 극치에 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서민들이 나라로부터 보호받지 못한 채 극심한 착취와 차별 속에 도탄에 빠졌다. 뿐만 아니라 심한 학대 속에 인간 이하로 취급받기도 했다. 이처럼 열악한 조건에서 나라까지 빼앗겼기 때문에 서민들이 느끼는 피해의식과 고통과 위기감은 엄청났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높은 지위나 일자리를 제공받거나, 돈으로 유혹 받거나, 무력으로 압박해오는 등 갖가지 술책과 회유를 개인적으로 상대해서 이겨내기란 인생을 포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고통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행복해지는 지름길로 내심 반가웠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일본의 침략 이전부터 극심한 빈곤 속에 허덕이며 수많은 차별에 시달렸던 백성들은 국가, 사회, 후손, 미래는 생각할 여유도 필요도 없었을지 모른다.

사실은 일제 치하가 아닌 오늘날도 다수 국민들이 국가, 사회, 미래, 후손은 안중에 없이 이기적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요즘의 이런 이기적인 현상 역시 일제 청산에 계속 실패한 결과로 나타나진 현상이며 우리 모두의 책임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당시의 상황은

첫째, 조정의 당파싸움, 탐관오리들의 무능과 방탕으로 지극히 허약한 사회로 전락된 채 백성은 빈곤에 방치된 채 극도로 고통스러웠다.

둘째, 쇄국정책으로 백성이 무지했으며 거의 암흑에 갇혀 있어서 세상을 판단해서 분별할 능력조차 없었다.

셋째, 사회적으로 신분ㆍ계급ㆍ남녀ㆍ적자서자 차별 등으로 서민의 고통이 극심했지만 조정과 관리가 차라리 없는 것보다 못할 정도로 서민들을 착취하고 괴롭혔다.

넷째, 이런 판국에 나라까지 빼앗겼기 때문에 백성들은 스스로 살아남아야 했으며 살아남는 방법도 제각각 터득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내부가 부실한 상황에서 친일은 받아놓은 밥상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동학혁명에서 보듯이 이미 우리는 일본의 침략이 아니어도 백성의 반발과 저항이 극에 도달한 상태였다. 따라서 친일 행위는 일본 침략에 맞물려서 우리의 나약하고 허약했던 기반이 너무나 쉽게 허물어진 부분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허약한 의식ㆍ역사ㆍ문화적 요인들로 인해 민족적인 자존심이 쉽게 허물어지는 등 다양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연관된 채 자의반 타의반으로 생길 수밖에 없는 현상들이었다.^

만일 이런 복합적인 요인들을 부인한 채 오직 개인적 관점으로 친일파를 구분해서 역시 개인 잘못으로 몰아버린다면 일본에 맞서서 직접 싸운 독립군을 제외한 전 국민이 모두 친일파나 친일행위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이처럼 자기 집(자기 나라)에 불이 났음에도 남의 집 구경하듯 소극적으로 대처(구경)했다는 점에서 모두가 친일파라는 주장에도 설득력이 없지는 않다.

따라서 좀더 적극적이고 강하게 "친일파", "친일행위", "친일의 잔재"를 종합해서 표현한다면 「조국을 빼앗기고도 목숨을 걸고 저항하지 않고 그들의 통치 아래 적당히 살아간 당시의 왕권, 관리, 양반, 민족성, 백성은 물론이고 허약했던 문화와 민족성 그리고 이후 이를 똑바로 정리하지 못한 후손」을 총칭하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다.

친일파는 과연 어떤 사람들인가.

우선 친일파는 적극적인 친일파와 소극적인 친일파로 나눌 수 있다.

① 적극적인 친일파.
이들은 일본 편에 서서 독립군을 잡아들이는 등 나라의 독립을 방해하거나, 일본을 등에 업고 동족을 악랄하게 괴롭히고 착취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② 소극적인 친일파.
이는 일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일본 편에 서서 직접 간접으로 협조했거나, 조국의 독립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일본의 총칼에 미리 겁을 먹었든,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였든, 심한 차별과 억눌림을 모면하기 위해서였든, 단순한 취업이었든, 일본으로 공부를 떠났든, 일본말을 사용하고 이름을 바꾸는 등 대부분이 해당된다.
다시 말해서 일본의 회유와 압박과 유혹을 감당하지 못한 채 일본에 직접 간접으로 충성, 취업, 심부름, 협조, 방관했던 사람들이다.

진정한 독립군은 누구인가.

①소극적인 독립군은 일본ㆍ일본인ㆍ일본정책ㆍ친일파에 저항해서 싸우다가 자기 생활 속에서 피해와 고통을 당하거나 피해를 감수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②적극적인 독립군은 조국의 해방을 위해 가정을 팽개치고 목숨을 내걸고 직접 투쟁하거나, 독립투사에게 적극적으로 활동자금을 제공해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독립 투사들은 친일파 청산을 어떻게 생각할까.
조국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던 독립 투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 치하에서 그럭저럭 지냈던 사람들이 모두 친일파이거나, 준 친일파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해방 후 60년 동안 친일파 청산에 실패한 것을 보면서 후손들도 친일파나 다름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기왕에 친일파 청산에 실패했다면 지금이라도 후손들이 서로 화합하고 협력해서 아름다운 평화와 복지를 실현하길 바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일본보다 훨씬 더 부강하고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기를 학수고대할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후손들이 서로(형제)를 물고 뜯으며 싸우기보다 진정한 선진국을 만드는 것으로 독립투사(선조)들의 희생에 보답하길 바랄지도 모른다. 독립 투사들은 후손들이 나라를 100-60년 전의 사건과 잘못으로 끌고 가서 분열하고 대립하는 것을 보면서 경악하고 분노하고 통탄해 할지도 모른다.

과거 친일파들이 일본을 등에 업고 같은 동포를 짓밟았던 것은 빈곤하고 무지했기 때문이라는 변명이라도 가능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외부 압박이나 위협이 없는데도 같은 국민을 긁어내리는 것은 친일파들의 비인간적이고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인 잔인성을 고스란히 대물림 받은 짓이어서 오히려 친일파 보다 못할 수도 있다.

과연 독립유공자들에게 관심은 있었는가.

독립유공자들이 어렵게 살았다는 것은 자타가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들의 자녀들 역시 비참할 정도로 어렵게 살았다. 그럼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국가유공자나 자녀들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가.

적어도 친일파 청산을 주장하거나, 심판할 자격을 얻으려면 독립유공자나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관심, 지원, 배려, 근본 방안을 만들어주었어야 옳다. 따라서 독립유공자에 대한 지원과 후손들의 비참한 삶을 방치한 사람들은 오히려 반성하고 책임질 입장일 뿐 "친일파 청산"의 주체는 될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감히 역사의 주인공처럼 나서서 똑같은 시대의 국민을 향해 역사의 칼을 추켜들고 우월한 입장을 차지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친일파 청산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한일합방은 일본과 조선의 국가적 문제이고 역사적 사건이다. 때문에 사람(개인)을 청산하는 차원으로 끌어가서 앙갚음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따라서 우리가 국가적으로 왜 허약했으며, 나라까지 빼앗겼는지 분석하면서 거국적이고 총체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순서다. 그리고 다양한 원인들에 대해서는 국민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피력하고 이를 종합해서 계속 논의하는 것이 수반되어야 한다.

둘째, 우리 동포들이 왜 친일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심리적 원인들(악랄한 신분 차별, 극심한 빈곤과 무지, 양반의 횡포와 관리들의 착취, 후진적인 문화와 관습 등)을 철저히 분석해서 반성함으로써 국민의식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는 전환점을 만들어야 한다.

셋째, 이런 과정에서 독립을 기어코 방해한 사실이나 인물들, 악랄하게 동족을 괴롭히고 착취해서 고통스럽게 만든 적극적인 친일파들은 국민의 동의를 얻어서 신중하게 처리하되 가급적 보복적인 차원을 뛰어넘어야 한다.

우리는 비열하게도 60년씩이나 친일파 청산을 거론하며 사람만 문제 삼다가 실패를 거듭했다. 결국 친일파 청산에 대한 미약한 의식과 방법상의 미숙함으로 계속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 비슷한 방식을 되풀이하는 것은 친일파 청산을 빙자한 역적 행위인 것이며 야비한 역사의 되풀이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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