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법의 모순과 한국사에 대한 이질화 및 정치도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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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의 위기, 이대로 둘 것인가? (3)

(3) 연구법의 모순과 한국사에 대한 이질화 및 정치도구화

1. 연구법의 구조적 모순과 한국사 해석에 대한 양분적 이질화

한국사의 위기는 지금까지 살펴본 PD 사학의 문제나 한국사학계의 고질적인 병폐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한국사 연구 방법의 구조적인 모순과 역사관에 대한 뚜렷한 시각 차이에도 그 원인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민족은 해방을 맞이하였으나 해방이후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데다 자유와 공산주의로 양분되는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점령에 의한 남북 분단이 고착화 되면서 역사관 또한 제대로 잡지 못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사학에 대한 제대로 된 청산조차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념적 대립, 즉 이데올로기의 갈등에 의한 남북한의 대립으로 역사관에 대한 시각차이도 소위 분단사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결국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갈등 속에 등장한 분단사학은 우리 역사에 대한 해석의 경직성을 초래하였고, 이러한 경직된 역사성은 결국 한 쪽에만 치우치는 데 급급하였다. 결국 이런 분단사학의 등장으로 남한은 귀납적 접근 방법에 의한 역사 이해를 개발해 냈고, 북한은 연역적 접근 방법을 통한 역사 이해를 개발해 내었던 것이다.

소위 실증사학의 이름으로 등장한 남한의 귀납적 역사 이해는 결과적으로 지배자 중심의 역사서술로 일관하게 되었고, 반면 연역적인 접근 방법을 통한 역사 이해를 개발한 북한에서는 민중의 저항이라는 틀 속에 얽매여 역사해석을 크게 양분 시켰는데, 흔히 주체사상에 입각한 주체사학에 근간을 두고 나온 북한의 대중적 역사관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다.

일례로 앞서 잠시 언급하였듯이 남한의 한국사가 대체로 지배자 중심의 서술인데 비해 북한의 조선전사, 조선역사에서는 민중 투쟁을 강조하는 민중 중심의 역사 서술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연유에서다. 시대를 놓고 보더라도 더 두드러진 차이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조선왕조를 남한에서는 대체로 중세, 혹은 근세 왕조로 보고 있는데 반해 북한에서는 이씨들의 봉건 국가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즉 조선은 이성계의 정권욕에 의한 쿠데타에 의해 세워진 봉건 통치배들의 국가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굳이 조선왕조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한 민족의 역사를 각기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남북한의 이질적 역사관은 해방이후 근 60여년이 다되어 가는 오늘, 남과 북이 화해의 무드를 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조차 근접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하다.

그 와중에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것은 비록 중국의 동북 공정이라는 타율적인 면이 있었다고는 하나 우리 민족의 공통된 역사를 찾기 위해 남과 북이 서로 노력한다는 것이다. 특히 고구려사 문제만 놓고 보면 남과 북의 인식 차이가 다르지 않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앞으로 남북한의 이질적 역사관은 능히 극복될 것으로 본다.

2. 한국사에 대한 정치적 도구화

한국사의 위기를 초래한 또 다른 원인 가운데 하나로 바로 한국사에 대한 정치적 도구로의 이용을 들지 않을 수 없다. 해방과 분단을 겪은 이후 남한과 북한에서 보여주었던 우리 역사에 대한 일년의 정치적 도구화 움직임들은 날이 가면 갈수록 두드러 지게 나타나 권력자의 집권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위해 중히(?) 쓰였던 것이다.

6,70년대 이후 남한이 그러했고, 6-80년대 나타난 북한의 주체 사상에 입각한 소위 주체 사학에 대한 인식 또한 그러했다. 물론 지금도 북한의 역사는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쓰여지고 있지만, 우상화를 강조한 6,80년 대에는 특히 심했다.

우선 북한의 경우에는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김일성 주석에 대한 영웅주의를 강조하면서 없는 사실까지 꾸며가며 날조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3.1 운동 당시 김일성 주석의 선친이 참여했고, 어린 나이의 김일성 주석이 사람들을 끌어 모아 독립 운동에 적극 나섰다는 것이다. 실례를 든 것은 이것 하나 뿐이지만 이것 말고도 김일성 주석과 연계되어 있는 역사적 사실을 높이기 위해 온갖 방법을 모두 강구하였던 것이다.

아무리 권력자 집권에 대한 정당성 확보를 꾀한다 하더라도 역사적 사실에는 확연히 있지도 않은 것들을 꾸며내기에는 너무도 과한 감이 없지 않다.

다음으로 남한의 경우, 박정희 대통령이 집권한 3-4 공화국은 집권 이후 민족 중흥을 표방하면서 특히 초등학교 부터 국사 교육을 의무화 하였다. 적어도 이런 면에 있어서는 불만이나 부정적 평가 보다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평가되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특히 오늘날 우리의 국사 교육이 소흘히 취급받는 현실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특정 시대와 인물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높임과 폄하는 박정희 정부가 한국사에 대하여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할 생각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듯 싶다.

일례로 신라의 역사와 문화에 많은 관심을 보여 신라와 관련된 각종 문화재들이 이 무렵 활발하게 정비한 데 비해 상대적으로 백제나 가야, 고구려 문화는 소흘히 취급되어 이들에 대한 문화재 정비는 신라의 그것보다 뒤떨어지게 취급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또한 인물 면에 있어서도 신라의 화랑이나, 이순신, 김유신, 을지문덕, 강감찬, 세종대왕 등을 지나치게 높이고 상대적으로 원균과 같은 이들을 혹독할 만큼 깎아 내렸다. 객관성을 잃은 이러한 박정희 정부의 역사관은 민족 중흥을 표방한 그 이면에 자신들의 비정통적 집권에 대한 정당성 확보라는 정치적 목적도 깔려 있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국사 교육을 의무화 시킨 것까지는 좋았으나 자연스레 박대통령이 좋아하는 시대, 좋아하는 인물들로 편중되면서 끝내 정치적인 면으로 활용되었다고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자. 1995년 이른바 문민정부를 출범 시킨 김영삼 정부는 잘못된 근현대사를 바로잡고자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명분을 앞세워 5.18 특별법을 제정하고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 비리 사건을 계기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구속하여 법정에 세웠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잔재를 없앤다는 구실로 옛 총독부 청사와 옛 총독 관저 (대통령 관저인 청와대의 구 본관) 마저 철거하였다.

그러나 김영삼 정부의 이런 역사 바로 세우기 작업은 인기에 영합하기 위한 제스처적인 방편에 불과하였다. 김영삼 대통령은 5년의 재임기간 중 이른바 '깜짝 정치' 를 펼쳐 국민들을 많이 놀라게 하였는데, 이것도 이른바 깜짝 정치를 역사에 대입시킨, 역사를 사실상 정치적인 목적으로 활용한 셈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신의 지지도를 끌어 올리기 위해 역사를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전직 대통령 구속만 보더라도 그렇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 문제로 촉발된 것을 계기로 5.18-12.12 에 대한 단죄론을 내세우게 되었고, 결국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구실을 씌워 전, 노 두 전직 대통령을 사법처리 해 버린 것이다. 결국 이들은 97년 말 대통령에 당선된 당시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건의로 사면복권 되었으니 결국 진정한 의미의 역사 바로 세우기가 아닌 정치적 목적의 역사 바로 세우기 였던 것이다.

정치적 목적이 아닌 진정한 순수한 차원의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하고자 했다면 먼저 5.18 -12.12에 대한 철저한 진상 조사와 그에 따른 철저한 법집행이 이루어져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취임초 피해자들로부터 철저한 진상 조사와 기소 요구가 있었을 때에도 김영삼 정부의 검찰에서는 침묵으로 일관 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서 비자금 수사를 계기로 180도 태도를 바꾸어 역사 바로 세우기를 한다는 자체는 점도 그렇거니와, 특히 과거 12.12 쿠데타를 주도한 5-6공 세력과 손을 잡는 무리수를 감행하면서 까지 (3당 합당 - 민자당) 집권 노력을 기울여 성공한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의도가 지나칠 만큼 정치적이었다는 점 역시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에서 드러난 몇 가지 예에서 보듯 권력자들의 정당성 확보, 혹은 지지도를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서 한국사는 근현대사를 포함하여 철저하게 정치적인 도구로 이용되었다. 순수하게 배우고 이해해야 할 학문적 도구로서의 한국사가 아닌 정치적 수단과 도구로서의 한국사로 한동안 탈바꿈해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정치적 도구로서의 활용은 많은 사람들로 부터의 적지 않은 불신으로 이어져 오늘날 한국사의 위기를 가중시킨 또 하나의 원인으로 자리하게 된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어떻게 평가해 줄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역사를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하여 한국사의 위기를 가중시켰다는 점에서 앞서 소개한 이들의 이러한 행적들은 분명 비난은 면치 못할 것으로 보인다.

글 / 역사마을 학술 마을지기 장경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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