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네 멋대로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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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의 영화를 통해 살펴본 사랑의 진실

누구나 한번 쯤은 사랑에 울고,
누구나 한번 쯤은 사랑에 웃고,
그것이 바로 사랑 사랑 사랑이야

철 지난 유행가사라지만, 이보다 더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누구나가 시작은 좋아서 하겠지만) 좋아서 시작했다고 좋게만 끝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싫다고 하다가도 해피엔딩을 맞이 하게 되는 것도 사랑이지 않는가 말이다. 결국 자신이 선택한 사랑에 대한 운명은 자신 스스로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 될 터, 이는 곧 "사랑"이란 자신의 의지(또는 감성)를 통해 주체적으로 행해지는 행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누가, 결혼하재? 한 달만 사귀어 보자니까!"

아직도 현실에서의 사랑은 처녀성에, 순결성에 집착하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게 사실. 뿐만 아니라, (많이 변하였다고는 하지만) 최소한의 도덕적, 관습적인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시대의 감성(또는 의지)은 자아실현적 사랑주의로 더더욱 치닫고 있음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근래에 나온 영화 <마들렌>을 보자. 이 영화에서 희진(신민아)이 지석(조인성)에게 대수롭지 않게 던지는 말 한 마디. "누가, 결혼하재? 한 달만 사귀어 보자니까!" 어떠한가? 물론 그리 대수롭지 않게 받아 들일 수도 있을 법 하다. 하지만 이 말이 가지고 있는 뉘앙스는 우리가 생각하는 그 대수롭지 않음을 상당히 깨부수고 있음을, (영화를 본) 그대들은 눈치챘는가?

영화에서 희진은, 지석에게 "사귐"을 제안하기 이전에, 이미 전 남자친구와의 관계(라는 말은 곧 "사귐"이라는 말로 대치할 수 있을 것이다)를 통해 (후에 알게 되는 일이지만) 임신을 한 상태였다. 이는 희진이 한 남자와의 관계, 즉 "사귐"이라는 과정에서 "섹스"를 무관시 하지 않았다는 얘기이며, 곧 "사귀자"라는 말에는 "섹스를 나눌 수도 있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비추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도 시한부적으로 "한 달만"이란 토를 달면서...

한 발자욱 더 나아가 보자. "사귐"이 "섹스"로 이어진다고 해서, 더욱이 그 "섹스"가 (인간으로서) 무한의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임신"으로 이어진다고 해서, 희진은 그 옛날 우리네 아낙네들이 그랬던 것처럼 관습에 굴복할 생각은 하지 않는다. 헤어진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생긴 아기를 끌어 안고 살아가려는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희진은 지석에게 ("섹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사귐"을 제안하면서도 "누가, 결혼하재?"라는 말로 쉽게 제도적 관습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다.

"난, 자신 있어! 절대로 들키지 않을 자신!"

이왕 내친 걸음, 조금 더 나아가 보도록 하자. 얼핏, 영화 <마들렌>에서의 희진의 모습은 한창 젊은 나이에 겪는 사랑에 대한 방황으로 보일 수도 있으며, 역으로 (결혼을 통해서) 책임감을 수반하는 신분이 되기 이전에 누릴 수 있는 특권으로 보일 수도 있을 법 하다. 그렇다면, 결혼이라는 제도에 편입 한 이후엔...?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꼭 "사랑"이라는 굴레 하에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보여 준다. 특히 연희(엄정화)가 "사랑"과 "결혼"을 분리시켜, 나아가 각각을 하나의 독립적인 삶으로서 살아가는 모습에서는, 불륜이라는 고리타분한 단어의 냄새가 나기보다는 진정한 자아실현을 향한 로맨스적 사랑법의 향기가 느껴지기까지 한다. 물론 이것이 진정 로맨스로 지속되어 남아 있기 위해서는 제도적 권력으로부터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불안한 전제가 따르기는 하지만...

어쨌든, 영화 <마들렌>의 희진이, "사귐"이 "섹스"로 이어지고, "섹스"가 "임신"으로 이어지는 과정속에서도 결혼이라는 관습적 제도 하에 묶이지 않았던 것처럼.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연희 또한 "사랑"을 "결혼"과 결부시키지 않음으로서, "섹스"에 대한 의미 자체를 굳이 "사랑"이나 "결혼"이라는 관념 하에서 찾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워메, 좋은거!"

(사랑이 동반되지 않은) "사귐"이 "섹스"로 이어질 수도 있고, 그러한 "섹스"의 결과가 "임신"이라는 절대적 책임감으로 몰아간다 해도, 이시대의 젊음은 절대 제도적 권력에 굴하지 않는다. 그런가? 설사 "결혼"이라는 관습적 제도 하에 편입되었다 하더라도, 현 시대적 감성은 "사랑"과 "결혼"을 이분법적인 현상(또는 삶?)으로 나눔과 동시에 "섹스"의 존재 의미를 그 상위에 위치시킨다. 그런가?

영화 <죽어도 좋아>를 보자. 어떤 날은 낮에도 하고, 어떤 날은 하루에 두 번도 했다고 달력에 꼼곰이 기록하는 귀여운(?) 할아버지를 보라. 이시대의 젊음도 아니고, 현 시대적 감성을 지니고 있지도 않지만, "섹스"의 즐거움을 탐닉하며 솔직히 표현해 내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라. 그들에게는 "만남"이 "사귐"이 되고, "사귐"이 "결혼"이 되며, "결혼"이 곧 "섹스"가 된다. 그리고 "섹스"의 즐거움 속에서 "인생"의 참 맛을 느낀다. "워메, 좋은거!"

그러나, 만나서...사귀고...사랑하고...결혼하고...섹스하고...(제도적으로 또는 관습적으로) 아무 흠잡을데 없어 보이는 이 과정마저도, 현실은 (최소한 지금까지는) 터부시 해왔다. 그 주체가 늙었기 때문이라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를 달며...하지만 그들은, 이시대의 젊음보다도 더 주체적으로, 현시대의 감성보다도 더 열정적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그리고 지금껏 우리들이(라기 보다는 필자가) 주절주절거렸던 "사랑"에 대한 통속적 관념을 (멋적은 웃음 한번 내비침 없이) 가벼이 뛰어 넘는다.

철부지 어렸을 땐 사랑을 몰라,
세월이 지나가면 사랑을 알지,
그것이 바로 사랑 사랑 사랑이야

철 지난 유행가사라지만, 이보다 더 사랑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까 싶다. 사랑을 하는 나이가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이가 듦에 따라 사랑에 좀더 솔직해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어쨌든, 슬퍼도 하는 것이 사랑이고, 기뻐서 하는 것도 사랑이고, 어렸을 때도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고, 세월이 흐르고 난 뒤에도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다만, 사랑을 하되, 네 멋대로 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니겠는가. 덧붙여서, 영화 <죽어도 좋아>의 할머니가 던지는 말을 옮겨 적어 본다.

"사랑은 누가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거다. 밥먹고 그것만 연구해라.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만 연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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