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왕호는 태조, 한자로 풀이하면 큰 조상, 즉 시조인 셈이다. 단지 고구려어를 중국식으로 쓰다보니 태조왕이 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지 모르겠으나, 삼국사기에는 다른 별칭으로 국조왕이라고도 부른다고 말했기에 시조왕이라고 표현해야 옳을 것이다.
어떻게 고구려의 제 6대왕인 태조왕이 어떻게 국조왕이 될 수 있는 것일까? 상식적으로 본다면 고구려의 제 1대왕인 동명성왕 주몽이 국조왕이 되어야 옳은 것이다. 여기에는 모본왕의 시해을 살펴야 할 것이다.
삼국유사에는 주몽(추모)왕의 성씨를 해(解)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 뒤의 왕인 유리왕, 대무신왕, 모본왕은 모두 해씨라고 한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본다면, 주몽왕은 고씨라고 성을 고쳤으니, 주몽의 자손도 모두 고씨라고 해야 옳을 터인데, 어떻게 해씨였을까?
여기에는 고구려 4대왕인 모본왕의 죽음을 봐야 옳을 것이다. 모본왕이 죽고 나서, 태조왕이 올라갔다. 학계에서는 모본왕까지가 소노부이고, 태조왕부터 계루부였다고 한다. 즉 한마디로 말하자면, 고구려의 실제 건국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계루부가 왕위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태조왕부터였던 것이었다. 따라서 어떻게 본다면 태조왕이 국조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태조왕은 그 즉위에 대한 정당성이 부족했으므로 자신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부여의 동명 설화를 착안해, 고구려의 주몽왕을 동명성왕으로 조작하고, 주몽왕의 성씨를 고씨로 개성(改姓)했을 가능성이 많다.
즉 한 마디로 말하자면 고려의 우왕과 창왕이 공민왕의 자손이 아니라,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폐가입진(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웠다는 뜻)을 당했듯, 모본왕의 죽음또한 이런 논리가 적용되었을 것이다.
태조왕의 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태조왕의 아버지인 재사를 유리왕의 동생으로 조작하고, 말도 안되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이 만들어지게 되는 셈이었다.
따지고보면 고구려의 초기 연대사가 엉망이 된 것은 바로 계루부가 집권 과정에서 소노부의 권력을 찬탈한 의혹을 씻기 위해서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다보니 고구려사는 완전히 뒤죽박죽되고, 후세 사가들은 고구려사가 동명성왕은 없었고, 태조왕이 건국자라는 착각을 갖게 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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