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균의 아버지 원준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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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의 아버지 원준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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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원균 바로보기(3)

2.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순신의 아버지 이정은 위인전이나 소설, 드라마에 이순신의 어린 시절을 다루면서 초반에는 등장할 때가 많다. 그 묘사는 아버지 이백록이 기묘사화로 화를 입으면서 정치에 뜻을 두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다. 이백록이 기묘사화와 무관함은 지난 연재분에서 살펴보았지만 그가 국가에서 처벌을 받은 것은 사실이고 비록 사화는 아니라도 억울한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정은 실록에서 아버지 이백록의 신원을 요구하는 진소를 올리는 걸 제외하면 찾을 수 없는 등 별다른 벼슬을 하지 않고 산 것도 사실이다. 이에 반해 원균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위인전은 물론이고 이순신과 어린시절을 같이 보낸 것으로 묘사한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도 그 언급을 찾기는 힘들다. 이쯤 되면 ‘원균의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하는 의문도 생길 법 하다. 안 생기면 할 수 없다. 그래도 이번 연재분의 주인공은 원균의 아버지, 원준량이다.

먼저 원균의 가문인 원주 원씨가 어떤 가문인가 살펴보자. 시조는 고구려에 당 태종이 파견한 학사 중 한 명인 원경(元鏡)이라 전하지만 고구려 멸망 이후 문헌기록이 없고 현재는 시조를 같이 하는 단본이면서도 3개 파로 나눠져 있다. 이들 가문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원극유를 중시조로 하는 원성백파, 고려시대 문하시중을 지낸 원익겸을 중시조로 한 시중공파, 태종 이방원의 스승이었으며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킨 원천석을 중시조로 하는 운곡공파 등이 있는데 원균은 원성백파 출신이었다.

원균의 가문은 무인을 많이 배출하여 원균의 아버지인 원준량 역시 무인으로 여러 관직을 지냈다. 과연 그의 관직생활을 순탄했을까? 이를 알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그의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원우(李元祐)를 전라도 병마 절도사로, 원준량(元俊良)을 전라좌도 수군 절도사로 삼았다.【뒤에 헌부가 논핵하여 체직시켰다.】

【원전】 20 집 62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명종실록 명종 17년(서기 1562년) 6월 10일

헌부가 논핵하여 체직시켰다는 것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원준량은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가 탄핵 받은 것일까? 혹시 모함이라도 받은 걸까? 이 기사에는 안 나오지만 실록에서 다른 기록을 찾아보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다. 먼저 위의 기사 바로 다음 해의 기록을 살펴보자.

최응룡(崔應龍)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백인영(白仁英)【평소 명망이 없었다. 일찍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에 그 일을 감독했었는데, 이 때문에 당상(堂上)에 오르게 된 것이다.】을 공조 참의로, 원준량(元俊良)을 경상좌도 병마 절도사로, 정척(鄭쾩)을 대호군으로【이양과 어려서부터 서로 친했었는데, 중간에는 어떤 때는 친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소원하기도 했다. 공론이 있으므로 승지로 있다가 병을 핑계하여 체직된 것이다.】 삼았다.

【원전】 20 집 675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원준량(元俊良)이 배사하니, 전교하였다.
“군졸을 잘 보살피고 방비를 엄하게 조처하라.”
【사신은 논한다. 원준량의 욕심많고 사납고 무지함은 이원우보다도 더했다. 그런데 원우는 공박을 하고 준량은 보냈으니, 이는 필시 준량의 뇌물이 권신의 힘을 얻고 간관의 입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 군졸을 보살피고 방비를 굳게 하는 일을 어찌 준량이 할 수 있겠는가.】

【원전】 20 집 67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원준량은 전라좌수사와 지위는 동급이지만 병력 규모 면을 살펴보면 사실상 더 상급이라 할 수 있는 경상좌수사로 임명된다. 그러나 같은 달 당대의 권력자 윤원형을 상전처럼 섬겼다고 기록되어 있는 윤선지가 경상좌수사로 임명되면서 원준량은 경상우수사로 부임한 걸로 보인다.(재미있는 사실은 아들 원균 역시 훗날 전라좌수사로 임명되었다가 탄핵당한 뒤 임진왜란 개전 직전 경상우수사로 부임하였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더 자세히 다루겠다.) 여기서 보이는 원준량에 대한 사관의 평가는 원준량이 뇌물로 윤원형이나 심통원 같은 권력자에게 잘 보여 관직에 임명된 것이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뇌물 바치고 부임한 관리가 본전 이상을 뽑아내기 위해 부패하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는바, 원준량의 관직생활이 그리 깨끗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그래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비록 부패하기는 했지만 무인으로서 전투는 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자.

원준량(元俊良)을 파지도(波知島)로 유배(流配)하고,【원준량은 전라 우도 수사(全羅右道水使)로, 제주의 왜변을 듣고도 달려가 구원하지 않았다.】 김충렬(金忠烈)을 방산진(方山鎭)으로, 김인(金仁)을 훈융진(訓戎鎭)으로 이배(移配)하였다.

【원전】 20 집 99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명종실록 명종 7년(서기 1552년) 8월 28일

이명규(李名珪)를 지중추부사로, 이미(李薇)【처음 이름은 환으로 기의 아우이다. 타고난 성품이 음험하여 사람들이 꺼리고 두려워하였다. 가령 그가 정원을 쥐었다면 못된 짓을 자행하는 것이 어찌 그 형보다 덜하였겠는가.】·남궁침·윤춘년(尹春年)을 동지중추부사로, 원준량(元俊良)【원준량은 본래 무지하고 거칠고 사나운 사람이다. 전에 전라도 수사 때 순시하다 전주에 이르러 달량포(達梁浦)가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마땅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가서 그 위급을 구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천연덕스럽게 술마시고 웃으며 일부러 시간을 끌어 적의 형세가 더욱 커지게 하였다. 그때에 군법을 시행하지 않은 것이 이미 형을 잃은 것이다. 그런데 이제 다시 본직을 주니 물정이 극히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다. 이준경(李浚慶)은 거두어 서용하기에 급급하였으니 또한 그릇된 것이다.】을 경상 좌도 수사로 삼았다.

【원전】 20 집 430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명종실록 명종 12년 8월 2일

명종 7년의 기록은 전라좌수사로서 제주도에 왜구가 쳐들어온 걸 보고받고도 움직이지 않다가 유배된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명종 12년의 기록에서 달량포가 함락되었는데도 가민 있었다는 것은 명종 10년인 1555년의 을묘왜변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미 직무유기에 의한 처벌을 받고 다시 관직에 임명되었지만 역시 마찬가지의 실책을 하고도 큰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상황을 알 수 있다. 이는 원준량이 무인으로서의 기본자세가 결여되어있음은 물론 권력층과도 깊이 결탁외어 있었을 거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또한 실록에 나타난 원준량에 대한 기록 중에는 원균의 무과 응시 과정에 부정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기록도 존재한다.

사인(舍人) 최옹(崔춳)이 삼공의 뜻으로 아뢰기를,
“함경북도 병사 곽흘(郭屹), 평안 병사 이택(李澤), 경상우도 병사 원준량(元俊良)이 그들의 자제(子弟)를 무과(武科) 초시(初試)에 응시하도록 허락한 일은 지금 추고(推考) 중에 있습니다. 신들이 듣건대, 과거 사목(科擧事目)이 문과는 상세한데 무과는 일정한 규정을 세우지 않은 까닭에 그 자제들이 군관(軍官)으로서 구례대로 응시하도록 허락한 것입니다. 법을 어기고 거짓으로 응시한 것과는 비할 바가 아니니, 상께서 참작하여 처리함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곽흘과 이택의 벼슬살이는 그래도 그 중에서 잘한 점이 있다 하겠으나, 원준량은 갖가지로 재물을 긁어 들여 군졸들이 원망하고 괴로와하면서 날마다 파직되어 가기만 고대하였다. 그런데도 윤원형 등이 일찍이 그의 뇌물을 받았기에 파직되어 갈릴까 염려되어 이렇게 임금을 속이어 아뢰었으니, 앞으로 저런 재상을 어디에 쓰겠는가.】

【원전】 20 집 698 면
【분류】 *인사-선발(選拔) / *역사-사학(史學)
-명종실록 명종 19년(서기 1564년) 6월 21일

무과의 초시는 해당 지방의 병사가 감독관이 되는 것으로 위의 기록은 원준량이 자신의 아들을 자신이 감독관인 시험에 응시하게 한 부정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원준량의 아들이 원균 한 명은 아니고 초시 이후의 응시과정도 있으므로 위의 기록으로 반드시 원균이 부정 합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원준량이란 인물이 부패했으며 공과 사의 구분도 하지 않는 공직자로서는 부적격인 인물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 원준량은 무사히 승승장구하며 관직생활을 계속 할 수 있었을까? 다음이 실록에 나타나는 원준량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헌부가 아뢰기를,
“근래 변장(邊將)들이 몰래 호지(胡地)와 내통하여 매매를 자행함에 따라 군민(軍民)이 곤폐됨은 물론 변방의 혼란을 야기시키고 있으니 드러나는 대로 통렬히 다스려야 합니다. 송준(宋遵)은 금령을 무릅쓰고 물건을 무역하다가 인물이 사로잡히게까지 하였으니 죄범이 가볍지 않은데, 갑자기 가볍게 조율(照律)하였으니 이미 온편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경기에서 가깝고 편리한 곳에 정처(定處)하였으니 더욱 온편치 않습니다. 율문(律文)에 의하여 먼 변방으로 충군(充軍)하라 명하소서. 길주 목사(吉州牧使) 원준량(元俊良)【무관이다.】은 본래 야비한 사람으로 오로지 탐학만 일삼아 거둬들이는 것이 끝이 없었으며 관고(官庫)의 물건을 실어내어 은(銀)을 사는 밑천으로 전부 투입하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외람된 짓입니다. 파직을 명하소서.”
하니, 모두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였다.

【원전】 21 집 135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외교-야(野) / *재정-국용(國用)
-명종실록 명종 21년(서기 1566년) 12월 9일

길주목사에서 파직당하는 것을 끝으로 더 이상 원준량은 실록에 등장하지 않는다. 원준량이 파직당하기 바로 전해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사망하면서 권신 윤원형이 몰락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한 일이 있었다. 윤원형에게 뇌물을 바쳤다고 기록된 원준량은 그 후 탄핵을 받은 뒤 영영 재기하지 못한 것이다. 이쯤 되면 원균을 재평가하는 소설이나 드라마에서는 역사를 왜곡하지 않는 이상 그 아버지 얘기는 꺼내지 않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물론 아버지 원준량의 죄를 아들 원균이 책임질 이유는 없다. 하지만 저런 아버지 밑에서 자란 원균은 아버지와는 다른 참되고 충성스러운 무인의 길을 걸었을까, 아니면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을까? 이 점은 이후의 연재에서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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