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학생운동(1)
스크롤 이동 상태바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학생운동(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알려 사실을 밝힌다.

^^^▲ 개혁당의 모임에 참석한 윤여연 의장좌측 두번째가 윤여연 의장이다^^^

연재되는 글은 윤여연(아이디 인간해방,인간해방협의회 의장)씨의 글로 1980년 당시 숭실대 총학생회장으로서 '민주화의 봄' 학생운동을 주도,경험한 바를 적시한 것입니다.

충분한 사실성,역사성이 있다고 보여지나 대전뉴스타운의 취재나 의도와는 무관하며 약간의 편집만 하였음을 밝힙니다.<편집자 주>

글을 들어가며

1960년 4.19 민주혁명은 1년후 일어난 1961년 박정희 등이 주도한 5.16쿠테타에 의해 좌절되었고, 이후 20여년간 유신헙법과 긴급조치 등 철권적통치하에서 국민들은 침묵을 강요당했습니다.

1979년 박정희가 궁정동에서 김재규의 총에 비명횡사한 후, 그동안 억눌려있던 전국적이고 전계층적인 규모에서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봇물처럼 쏟아졌던 시기를 역사가들은 "민주화의 봄"이라 합니다.

그래서 "1980년 민주화의 봄"은 4.19의 민주화의 꿈을 되살려서 왜곡된 역사는 물론 인적, 구조적, 제도적 청산을 완성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사회대청소가 꿈이었습니다.

이러한 민주화의 봄 시기의 상징적인 사건이며 민주화운동의 출발점이었던 5.15 서울역 시위를 회고해 보고자 합니다.

왜, 우리는 1980년 봄을 "민주화의 봄"이라고 부를까?
왜, 지금보다도 대학생수가 3분의 일 정도도 못되고 운동권의 조직력도 지금의 십분의 일도 안될 만큼 취약했는데도 1980년 5월 15일에는 20만 명이나 되는 대학생이 사회대청소의 구호를 외치면서 서울역으로 몰려든 것일까?
왜, 1980년 이후 운동권의 조직력과 대중운동의 조직력이 몇 십만∼몇 백만 명을 넘었는데도 한번도 그 이상의 숫자가 모일 수 없었을까?

1980년 이후에도 운동권은 구속이나 해고를 피하기 위해서 격동적 시기에서 수많은 회군을 반복했지만, 유독 서울역회군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비판만 받아왔을 뿐, 지도부가 목숨을 담보로 한 무기한 가두투쟁 결의를 하고 전국적 공동투쟁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에 대한 긍정적인 측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그 주동자의 한사람으로서 그 진실을 올바르게 평가하고자 합니다.

1. 민주화의 봄 시기 학생운동

1979년 11월부터 학생회 부활논의를 시작한 전국의 대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학생운동은 1980년 봄의 학생회 부활운동에서 시작하여 학원민주화투쟁을 거쳐 계엄해제와 유신잔당의 퇴진을 겨냥한 대대적인 정치투쟁으로 발전하였다.

신학기 대학가는 각종 써클이 공개적으로 신입생을 모집하고 여러가지 대자보가 등장하여 연일 신군부와 최규하 정부의 음모를 폭로하고 유신정권의 비행을 폭로·질타했다. 총학생회 선거 열풍이 지나가자 대학은 민주화투쟁을 준비하는 거대한 기지로 변해갔다.

학생운동은 학생회 구성작업이 마무리된 시점까지 일체의 과격한 투쟁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정치적인 집회와 시위를 최대한 자제했다. 3월은학생회 구성을 위한 선거운동 기간이었고 4월은 학원민주화투쟁 시기였다.

이 투쟁은 족벌사학에 대한 학생들의 시위·농성으로 시작되었으나 학원민주화투쟁은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4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병영집체훈련 문제가 학원민주화투쟁의 새로운 이슈로 전면 등장했다.

각 대학의 병영집체훈련 거부투쟁이 본격화되고 이 문제가 전국적인 쟁점으로 떠오르자 신군부는 신문, 방송을 통해 "학생들의 안보의식 결여"를 비난하고 교내 시위·농성을 집중적으로 보도하게 했다.

이 공방은 조만간 다가올 신군부와 학생의 일대 격돌을 예비하는 전초전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4월 14일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 겸직 보도가 나오고 입영훈련 거부투쟁과 맞물리면서 대학가에 투쟁의 진로와 방법에 대한 이견과 노선투쟁을 불러 일으켰다.

심각한 국면에 접어든 학생운동은 일부대학이 입영훈련 거부투쟁 철회를 결정하고 5월 초부터 "계엄령 해제"와 "유신잔당퇴진", "정부개헌 중단"과 "노동 3권 보장" 등 본격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학생운동은 학내민주화운동에서 벗어나 전국적인 정치투쟁으로 돌입했다.

5월 초부터 13일까지 열흘 남짓한 기간은 학생운동이 본격적인 가두투쟁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5월 10일 서울대 총학생회장실에서 열린 "총학생회장단 회의"에 참석한 전국 23개 대학 대표들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와 "전두환, 신현학 등 유신잔당 퇴진요구" 등을 결의하고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정세에 대한 공동대처 방안을 마련했다.

그리고 항간에 유포된 "5월 봉기설"에서 쿠데타의 명분을 찾으려는 신군부에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당분간 평화적 교내 시위만 전개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5월 13일 밤 가두진출을 주장해 온 강경파 학생들의 광화문 일대 시위로 학생운동은 전면적인 "민주화투쟁"을 위한 가두시위로 나서게 된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뉴타TV 포토뉴스
연재코너  
오피니언  
지역뉴스
공지사항
동영상뉴스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 서울특별시 노원구 동일로174길 7, 101호(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617-18 천호빌딩 101호)
  • 대표전화 : 02-978-4001
  • 팩스 : 02-978-8307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종민
  • 법인명 : 주식회사 뉴스타운
  • 제호 : 뉴스타운
  • 정기간행물 · 등록번호 : 서울 아 00010 호
  • 등록일 : 2005-08-08(창간일:2000-01-10)
  • 발행일 : 2000-01-10
  • 발행인/편집인 : 손윤희
  • 뉴스타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뉴스타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towncop@gmail.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