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정치 지형 결산, 과제 및 전망
2002 정치 지형 결산, 과제 및 전망
  • 연합뉴스
  • 승인 2002.12.22 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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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첫 '선택' 영파워.사이버정치 북핵.반미 파고 정치권 부침

<2002 정치> ①21세기 첫 '선택'

(서울=연합뉴스) 김민철기자 =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의 대통령 당선으로 끝난 제16대 대통령선거는 정치 뿐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의 획기적 전환을 가져온 일대 사건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31년만에 양강 대결로 치러진 이번 대선에서는 '부패정권 심판'과 '정권교체'를 내세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와 '낡은정치 청산'과 '정치교체'를 내세운 노 후보가 대결한 끝에 국민은 결국 노 후보의 손을 들어줬다.

특히 노 당선자가 50대 중반의 '젊은 지도자'라는 점에서 세대교체의 의미가 부각됐다. 다만 세대교체의 부정적인 측면으로 세대대결 구도도 함께 부각됨으로써 앞으로 세대간 간극을 메워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등장했다.

대신 선거운동 과정과 개표 결과에서 지난 30여년간 우리 정치 발전을 가로막아온 지역대결 구도가 퇴조하는 계기가 마련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노 당선자와 이 후보가 16개 시도를 정확히 동서로 나눠 가졌고, 영.호남지역에서 이 후보와 노 당선자간 지지율이 과거 대선과 별 차이없는 '비정상적인' 분포를 보인게 사실이다.

그러나 대선 과정에서 노골적인 지역감정 선동발언은 대폭 줄어들었고 지역 유권자들의 반향도 크지 않았던데다 언론도 대체로 이를 무시했다. 결국 노 당선자는 영남권에서의 지지율 신장을 통해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이같은 점들은 '3김 정치'가 종언을 고함과 동시에 '계보.가신.측근에 의한 패거리 정치와 제왕적 보스정치 및 부패를 낳는 금권정치'의 퇴장도 의미한다.

호남을 제외한 전국 대부분의 지방자치단체장을 휩쓴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조직면에서 열세인 노 후보에게 패퇴한 것은 민심의 흐름과 정치토양이 달라지고 있음을 극명하게 드러낸 것이었다.

또 이 후보와 노 당선자 모두 초반엔 무차별 폭로식 네거티브 선거 캠페인의 유혹을 받았으나 유권자들은 지난 5년내내 진행돼온 네거티브 정치에 혐오증을 드러내며 '선거용'으로 치부, 표심에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

이때문에 양당 모두 시차는 있지만 공식 선거운동 도중에 전략을 급선회, 행정수도 이전 공방 등 대형 정책이슈 대결로 선거운동을 전환했다.

역대 대선에서 상대측이 반박.해명할 틈을 주지 않고 타격을 가하기 위해 선거 2-3일을 앞두고 구사하던 막판 폭로전을 양측이 못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특기할 대목이다.

선거때마다 으레 유권자들의 시선을 끌었던 색깔공방도 남북 화해협력에 대한 유권자들의 경험에 힘입어 이번 대선에선 통하지 않았다는 평가다.

노 당선자가 수차례 좌절에도 끝까지 지역주의 극복이라는 원칙을 지킨 끝에 성공을 거둔 반면 '철새' 행보를 보인 정치인들이 지역별 표분석에서 '심판'을 받은 것도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노 당선자의 정치행보가 일찌감치 대권 도전을 염두에 둔 '계산된 장기전략'이었다고 하더라도, 눈앞의 실리를 좇지 않고 명분을 지킨 데 따른 보상을 유권자들로부터 받은 셈이다.

또 20-30대 젊은층의 참여와 자발적인 참여민주주의의 확산은 '영파워' '피플파워'를 정치적 '신주류'로 등장시켰다.

대중문화.소비.인터넷 분야에서 정치권으로 확산된 이들의 힘은 다시 사회의 다른 전 분야로 확산될 기미여서 앞으로 우리 사회에 길고 폭넓은 파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결국 2002년 한해동안 전국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16대 대선이라는 정치행사는 21세기의 첫 국가지도자를 뽑는다는 시대적 의미를 정확히 짚어낸 국민의 '선택'을 통해 한국정치가 거듭 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끝) 2002/12/22 07:31


<2002 정치> ②영파워.사이버정치

(서울=연합뉴스) 김범현기자 = 노사모, 인터넷, 대학내 부재자투표...'2002년판 정치교과서'가 있다면 새롭게, 그리고 가장 빈번하게 등장할 단어들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 대통령후보 경선을 시작으로 12.19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정치행사가 줄을 이었던 2002년 한국정치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키워드인 것이다.

또 지역, 조직, 자금 등을 주요 정치수단으로 활용해온 '3김 시대' 정치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이 자리잡았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정치 무관심족'으로만 알려졌던 '2030(20대-30대 젊은층) 세대'가 정치행위에 대한 심판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했음을 말해주는 이같은 지표들은 2002년 정치가 낳은 새로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젊은층의 정치참여는 이미 예고됐었다. 이들은 지난 6월 월드컵 때 '대~한민국'을 외치며 붉은 악마차림으로 전국 곳곳의 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들은 대선 직전엔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항의표시로 광화문 일대를 촛불로 대낮같이 밝혔었다.

이에 앞서 2년여전 이미 4.13 총선때 '바꿔 바꿔' 개사곡과 386세대 정치인들의 대거 등장과 그 이후 집권여당인 민주당의 1년이상에 걸친 쇄신파동은 기성 정치와 정치인의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층의 행동화 가능성을 예고했었다.

이들은 월드컵 성공에 자신들의 폭발적인 에너지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됐고, 촛불시위를 거치며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자신들의 힘을 재확인, 이번 대선에서 이를 분출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역대 선거에서 젊은층의 '저조한 투표율'은 "투표한들 세상 변할 게 있느냐"는 자조와 자신감의 부족때문이었다면 월드컵이 그들의 파워를 확인한 계기였으며 그 이후 계속 동원된(mobilized) 상태에 있다 대선을 맞은 것이다.

이들이 어느정도 투표에 참여했는지는 아직 정확한 통계가 나오지 않았으나, 각 투표소에서 특히 투표참여를 호소하는 인터넷 사발통문이 돈 후 젊은층 유권자들이 유난히 많이 눈에 띄었다는 게 투표소 현장의 일치된 목격담이다.

여론조사 분석가들은 당초 젊은층의 저조한 투표 경향을 들어 75% 이하의 낮은 투표율을 기록할 경우 이들 연령대에서 상대적 열세인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후보에게 유리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70%를 간신히 넘은 대선 사상 최저 투표율에도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가 승리한 것은 전반적인 투표참여 저하에 비해 젊은 층의 투표 참여도가 상대적으로 높았기 때문일 것이라는 데 일치된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전체 유권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0대는 23.2%, 30대는 25.1%로 거의 절반을 차지하는 '2030 세대' 유권자의 60% 안팎이 노 후보에 투표한 것으로 나타난 각 언론사의 출구조사 결과가 이를 방증한다.

정치분야 영파워는 특히 사이버 공간의 특성 때문에 더욱 증폭됐다.

과거 유권자들은 신문.방송을 통해 정해진 시간에 같은 내용의 '정제된' 정보를 일방적으로 제공받았으나 초고속 통신망 가입자가 1천만명을 넘어선 2002년 이들은 사이버 공간을 통해 다양한 원자료 정보를, 서로 신속히 받고 전파할 뿐 아니라 이 과정에서 스스로 분석.판단하는 능력도 키운 것이다.

이같은 사이버 정치 만개의 이면에는 온라인상 흑색선전 등이 난무, 1만여건에 달하는 게시물이 선관위에 의해 삭제조치를 당하기도 해 앞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로 지적됐으나 '넷 크라시' '사이버 크라시'가 점차 대세로 자리잡고 있는 양상이다.

2002년은 TV 프로그램, 소비문화, 가요시장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이미 맹위를 떨치고 있는 영파워가 사이버 공간을 타고 정치분야로 세력을 확장한 원년으로 기록될 전망이다. (끝) 2002/12/22 07:32


<2002 정치> ③임기말 국정마무리

(서울=연합뉴스) 정재용기자 =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집권 마지막해인 2002년의 국정운영 목표를 '성공적인 마무리'로 설정해 전력투구함으로써 대체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김 대통령은 연초 경제 경쟁력 강화, 중산.서민층의 생활안정, 남북관계 개선을 3대 국정과제로, 월드컵, 부산아시안 게임, 대통령 선거, 지방선거를 4대 행사로 각각 정해 이들 과제의 차질없는 수행에 주력했다.

이같은 국가적 과제를 실현하기 위한 대내외적인 조건은 매우 열악했다.

16대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치권의 대립과 격돌 심화로 초당적 협력을 이끌어 내기가 어려웠고, 두 아들이 비리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는가 하면 이들 문제가 겹쳐 레임덕 현상도 빚어졌다.

김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민주당 총재직을 사퇴한 데 이어 지난 5월 민주당 당적까지 버리고 '정치와의 절연'이라는 승부수를 택한 것도 이같은 현실적인 여건을 감안한 국정운영 동력 확보책이었다.

그 덕분에 김 대통령은 4대 행사와 3대 과제의 수행에 대체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끌어 냈으며, 특히 4대 행사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뒀다는 게 청와대측의 자평이다.

월드컵이 '4강 신화'와 한국인의 '역동성'을 전세계에 과시하면서 '대박'을 터뜨렸고 북한팀이 참가한 부산 아시안게임도 성공했으며, 6.13 지방선거에 이어 16대 대선도 특별한 관권개입 논란없이 역대 선거사상 가장 공명하게 치러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 대통령은 또 비록 민주당을 탈당하긴 했지만, 자신과 정책기조가 크게 다르지 않는 민주당 노무현(盧武鉉) 후보가 16대 대선에서 승리함으로써 정권을 순조롭게 이양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한 셈이다.

그러나 임기말 국정과제가 모두 순탄하게 실현된 것만은 아니다. 괄목할 경제성장률에도 불구하고 아직 경제여건이 불확실한 상황이고, 아파트값 폭등 등으로 인해 중산.서민층 생활안정이라는 목표에도 차질을 빚었다.

특히 한반도 정세는 1년 내내 냉기류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월드컵이 끝날 무렵 북한의 서해도발 사태가 돌발했으며, 연말에는 북한 핵개발 문제가 불거져 한반도 정세는 난기류에 빠져들었다.

김 대통령은 또 지난 8월부터 9월사이 2차례나 총리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김 대통령은 앞으로 남은 2개월간의 국정운영을 효과적으로 마무리해 노무현 당선자에게 넘겨줘야 하는 숙제를 안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고 박선숙(朴仙淑) 청와대 대변인은 전했다.

박 대변인은 "김 대통령은 특히 북핵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할 것"이라며 "흔들림없이 국정을 수행, 다음 정부에 잘 인계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끝) 2002/12/22 07:33


<2002 정치> ④북핵.반미 파고

(서울=연합뉴스) 황재훈기자 = 북한에 대한 '악의 축' 발언과 북핵사태 및 미군궤도 차량에 의한 여중생 사망사건과 이어진 반미(反美) 기류 확산은 올해 가장 뜨거운 외교이슈 중 하나였다.

1월말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연두교서를 통해 이란, 이라크와 함께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뒤 급랭 조짐을 보이던 북미관계는 2월말 서울에서 열린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과 부시 대통령간 정상회담을 계기로 대화 분위기로 반전됐다.

그러나 6월말 돌발한 서해교전 사태는 이미 확정됐던 미국 특사의 7월초 방북 계획을 수포로 돌리며 다시 관계를 악화시켰다.

북미관계는 다시 급반전돼 7월말 브루나이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외무장관회의때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과 백남순(白南淳) 북한 외무상간 회동이 전격 성사됐고, 이는 10월초 미 특사의 방북으로 이어졌다.

미 특사 방북은 부시 행정부 출범 후 1년8개월여만에 북미관계에 획기적 진전을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으나, 북한의 우라늄 핵개발계획 시인이라는 돌발사태로 도리어 10여년만에 한반도 핵위기 상황 재연이라는 결과를 몰고왔다.

특히 미국은 10월17일 북한의 우라늄 핵개발 계획 시인 사실을 발표하면서 대북 압박에 본격 나섰고, 이후 10월말 멕시코 한.미.일 3국정상회담 및 11월 초 도쿄(東京) 대북정책조정감독그룹(TCOG) 회의를 거치면서 이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대북 강경공세는 11월 중순 뉴욕에서 열린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이사회를 통해 대북 중유제공 중단이라는 조치로 이어졌다.

북한은 한.미.일 3국이 요구한 핵개발 계획 폐기에 대한 언급없이 10월말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조미간 불가침 조약 체결만이 핵문제 해결의 합리적 방안"이라고 불가침조약 체결을 역제의하는 선전공세만 강화했다.

이어 중유제공 중단 결정에 대해선 12월12일 핵동결 해제 선언을 발표하며 '벼랑끝 전술'을 다시 들고 나왔다.

이에 따라 지난 94년 체결된 뒤 8년간 북미관계와 한반도 정세의 안전판 역할을 해왔던 제네바 기본합의는 파기국면에 접어들며 정세 불안정의 파고는 높아만갔다.

지난 6월13일 발생한 여중생 사망사건은 동맹 50주년을 앞둔 한미관계를 뒤흔든 또 하나의 사건이었다.

특히 11월말 미군 군사법원에서 궤도차량 관제병 및 운전병에 대해 무죄평결이 내려진 뒤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대규모 '촛불시위' 등 추모행사가 잇따라 벌어지면서 사회 전반에 반미기류를 확산시켰다.

또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정치권마저 이에 가세하는 양상을 보이면서 한미관계의 근본이 흔들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한미 양국은 뭍밑협의를 통해 11월 말 주한미대사, 12월10일 리처드 아미티지 국무부 부장관을 통해 부시 대통령의 사과 메시지와 사고재발 방지약속을 거듭 전했으나 국내 여론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결국 미국은 12월13일 한미 정상간 전화통화를 통해 부시 대통령의 사과를 전하며 파문 진화에 나섰고, 주한미군지위협정(SOFA)의 적극적 개선 노력도 약속했다.

그러나 미군범죄에 대한 재판권 환수를 주장하는 SOFA 개정 요구는 가라앉지 않고 있어 북한 핵문제와 더불어 새해 한미관계 최대 이슈 중 하나로 떠올랐다.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해 보인 국민여론 동향은 일부에서 '반미 배후설' 논란도 낳았으나 동맹 50년의 한미관계가 좀더 수평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요구라는 데 사회적 인식이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 (끝) 2002/12/22 07:34


<2002 정치> ⑤정치권 부침

(서울=연합뉴스) 안수훈기자 = 2002년 정계는 16대 대선 고지를 향한 각 당과 주요 후보들의 숨가쁜 경쟁과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극적 드라마가 대선 당일까지 계속되면서 많은 정치인들의 명운이 갈리는 부침을 낳았다.

격동의 정치 드라마 초반 무대는 한나라당과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현 정권의 부정부패와 실정을 밟고 '창(昌) 대세론'을 독주시키는 양상으로 시작됐다.

민주당은 1월초 국민참여경선제라는 '정치실험'을 핵심으로 하는 당 쇄신안을 통해 반전을 시도하면서 2월22일부터 이인제 노무현 정동영 한화갑 김중권 김근태 유종근 등 이른바 '7룡'의 각축이 시작됐다.

노무현 경선후보는 3.16 광주경선에서 1위로 올라서는 이변을 통해 '노풍(盧風)' 을 점화, 4월말 대선후보로 확정됐을 때는 역대 대선 예비주자가운데 사상 최고라는 60% 지지도를 보이며 절정을 맞는다.

당내 경선에서 '대세론'을 구가했던 이인제 의원은 국민경선제를 거치며 추락, 결국 지난달초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민련 총재권한대행을 맡았으나 대선결과 자신이 지지했던 이회창(李會昌) 후보가 패퇴함으로써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

유종근 전 전북지사도 탈당과 옥고를 치러야 했지만 '국민경선 지킴이'를 자임하며 끝까지 완주한 정동영 고문은 대선에서도 국민참여본부를 이끌며 노무현 당선자의 당선에 주요한 몫을 담당함으로써 차세대 반열에 복귀해 대조를 보였다.

이회창 후보는 '빌라 게이트' 등으로 지지도 급락이라는 시련을 겪다가 3월26일 집단지도체제 도입을 전격 수용해 당 내분을 추스른뒤 최병렬 이부영 이상희의 도전을 뿌리치고 5.10 전당대회에서 대선후보로 선출돼 건재를 과시했다.

박근혜(朴槿惠) 의원은 5월17일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며 대권도전 의지를 불태웠으나 당세 확장에 실패하자 11월말 한나라당으로 복귀했다.

5.10 전대에서 최고득표로 대표에 선임된 서청원(徐淸源) 대표는 대선기간 이회창 후보와 투톱으로 당을 이끌었지만, 대선 패배로 인해 고비를 맞게 됐다.

대선 전초전으로 실시된 6.13 지방선거에서 한나라당은 16개 시도지사 선거중 수도권 3곳을 싹쓸이하는 등 11개 지역을 차지했고, 13개 선거구에서 열린 8.8 재보선에서도 수도권 7곳을 석권하는 등 호남을 제외한 11개 지역에서 승리해 원내 과반의 거대정당으로 도약했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민주세력 대통합론'을 내세운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 면담 등의 악재와 지방선거.재보선 참패, 당내 흔들기로 인해 지지율이 20%대로 추락했다.

제3지대에 남아있던 정몽준(鄭夢準) 의원은 월드컵 열기를 기반으로 9월17일 출마선언을 하고, 11월5일 국민통합 21을 창당하며 '정풍(鄭風)'을 점화했다.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의석의 위력으로 7월말 장 상(張 裳), 8월말 장대환(張大煥) 총리지명자의 인준동의안을 잇따라 부결시키며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이회창 후보는 다시 정풍에 밀리는 형국이 되기도 했다.

노 후보는 9월들어 김원길 박상규 김영배 의원 등 중진들이 후보단일화를 내세우며 등을 돌리기 시작하자 지지율이 한때 10%대로 떨어지기도 했으나 10월17일 김민석 전 의원의 탈당을 계기로 반전의 기회를 잡았다.

대선정국의 격랑속에서 민주당 전용학, 원유철, 박상규, 김원길, 이근진, 김윤식, 강성구 의원, 자민련 이완구, 이재선, 이양희, 함석재 의원 등은 한나라당으로 피항했으나 '철새 정치인' 비판을 초래한 판단미스였다는 지적을 낳았다. 반면 한나라당 김원웅 의원은 노무현 당선자를 지지한 개혁신당을 택했다.

노 후보는 11월10일 '여론조사 단일화' 수용이라는 승부수를 거쳐 같은달 25일 여론조사를 통해 단일후보로 결정된 후 35% 안팎의 지지율로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1위로 올라선 후 12.19 대선에서 최종 승자로 뽑혔다.

그러나 통합21 정몽준 대표는 대선투표를 7시간여 앞둔 18일밤 돌연 노후보 지지를 철회함으로써 '아름다운 승복'을 통해 쌓은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가장 유력한 차기주자 자리가 일거에 와해되는 상황에 몰렸다.

이회창 후보는 생애 두번째이자 마지막 도전에 실패하자 깨끗하게 정계은퇴를 선언, 6년여의 정치생활을 접었다. (끝) 2002/12/22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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