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기의 정정 불안과 잇단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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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의 정정 불안과 잇단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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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님의 중세사 이야기 4

4. 고려 초기의 정정 불안과 잇단 시련

후삼국을 통일하고 국가의 안정을 마련한 태조가 재위 26년만인 943년에 세상을 떠나고, 이미 정윤으로 책봉되어 있었던 왕자 무가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2대 혜종입니다.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태조는 호족들을 어우르고자 많은 회유 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혼인정책이었고, 이렇게 추진된 혼인정책을 통하여 총 29명의 부인을 맞이하여 무려 25남 9녀라는 어마어마한 수의 자녀를 두는데, 이것으로도 태조는 호족들을 완전히 억누르지 못했고 단지 호족 연합 정권이라는 과도기적 체제를 이끄는 데 만족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태조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중앙과 호족간의 긴장은 계속되어 급기야는 혜종, 정종 연간에 있었던 권력 투쟁과 그로 인한 정정 불안을 초래하게 됩니다.

1) 혜종조의 정치적 혼란

혜종은 태조의 둘째부인인 장화왕후 오씨의 소생으로, 나주 호족 오다린군의 외손입니다. 하지만, 혜종의 생모 오씨가 미천한 탓에 태조가 심사숙고해서 후사를 결정짓지 않으면 안되었을 정도였고, 게다가 셋째부인인 신명순성왕후 유씨가 태자 태를 순산하게 되면서 태조는 기타 다른 호족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에, 태조는 태자 무로서 정윤을 삼으려 했지만, 앞 서 서술한 바와 같이 그 생모 오씨가 미천하고, 다른 호족들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은근히 측근인 박술희에게 부탁하여 그 후견인으로 삼도록 하였고, 이후 박술희는 태자를 충실히 보좌하여 혜종이 어렵사리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박술희는 벽성(지금의 충남 옥천)의 호족 출신으로 태조 밑에서 많은 공을 세워 공신에 있었던 인물이며 강직하고 사심없는 인물이라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태조 사후 팽팽한 긴장속에서 혜종이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반대 세력 또한 만만치 않았는데, 바로 경기도 광주의 대호족 출신인 왕규세력으로, 그는 태조에게 제 15 비와 16 비를 바친 바 있었고, 더구나 혜종에게도 왕비를 들이도록 하여 이중으로 외척관계를 형성, 조정에 큰 세력을 마련한 실력자 였습니다.

이후 그는 혜종을 몰아내고 자신의 외손 광주원군을 왕위에 세우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하게 되고, 급기야는 혜종을 암살하고자 자객까지 파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혜종은 이러한 왕규의 음모를 알았지만 그를 응징하거나, 문책하지 못했는데, 이것은 왕규의 위상이 왕권을 능가했을 정도로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혜종을 반대한 세력들은 비단 왕규 만이 아니었습니다. 태조의 셋째 부인인 신명 순성왕후 의 친정인 충주 유씨 세력도 혜종을 반대하였고, 따라서 왕규와 마찬가지로 혜종을 폐위시키려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혜종을 보호하려는 친왕 세력과 그를 제거하려는 반왕 세력들간의 치열한 긴장과 권력투쟁은 불가피한 것이었고, 왕규를 비롯한 여러 반대 세력은 기회를 보아 왕을 제거하려 하였으므로, 혜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침소를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닐 정도였습니다.

또한, 신명 순성왕후 소생의 두 왕자 요와 소(요는 정종, 소는 광종으로 즉위)의 존립또한 혜종을 위협하는 존재였습니다. 또한 요의 장인인 박영규는 본래 후백제 견훤의 사위였지만, 태조의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귀부하여 태조로부터 각별한 신임을 얻었던 인물이었고, 더구나 태조의 사촌 동생으로서 서경에 진주하고 있었던 왕식렴과도 연결되어 있었기에 혜종의 불안은 이만 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혜종대의 이런 불안한 정국은 결국 반대세력의 숱한 음모에 불안한 생활을 하며 숨죽이고 있었던 혜종이 결국 몸저 눕게 되면서 고비를 맞습니다.

곧, 혜종을 보필하던 박술희는 왕규에 의해 제거되었고, 그 왕규 또한 혜종의 이복동생이자, 또다른 경쟁자였던 왕자 요의 요청으로 서경에 있었던 왕식렴군이 내려 오면서, 제거 되었습니다. 하지만, 과연 왕규가 역심을 품고 모반을 일으켰는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최근들어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습니다.

한편, 잦은 정변과 권력 투쟁으로 인해 몸저 누웠던 혜종은 재위 2년만인 945년 9월에 마침내 34세의 한창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는데, 그 이복동생 요가 왕위에 오릅니다. 이 요가 3대 임금 정종입니다. 정종의 즉위는 왕실과 호족출신 외척간의 권력투쟁에서 왕요가 승리함으로서 일단 혜종 2년의 혼란기가 수습된 것처럼 보여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정치적인 긴장은 계속되었습니다.

2) 정종의 시련과 왕권 강화 노력

정종은 태조와 신명순성왕후 유씨 사이의 3남으로 태어났으며, 훗날 4대 임금 광종으로 즉위하는 왕자 소는 그의 동복 동생입니다.

형식적으로 군신의 추대를 받아 즉위하는 형식을 취하여 왕위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앞에서 보았듯이 왕식렴을 비롯한 서경 세력과 몇 몇의 지지 세력에 의해 군사력이라는 비상 수단 속에서 즉위하였으므로, 정치적 긴장이 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의 즉위는 당시 수도였던 개경을 기반으로 둔 일부 호족세력과 백성들의 커다란 반발도 초래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정종은 강력한 조처를 취하게 되는데, 훗날 성종때 최승로의 시무 28조의 5대조 치적평에

"일찍이 혜, 정, 광 3종이 서로 계승한 처음을 보건대, 국가의 모든 일이 채 갖추어지지 않았을 때에 서경과 개경, 양 서울의 문무관이 반이나 살상되었으며"

라 한 것에서도 이런 긴장된 정치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정종은 이러한 반발을 의식하여, 개경에서 수도를 지금의 평양인 서경으로 천도하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정종에 대한 개경 출신 호족들의 반발과(특히, 대숙청 작업으로 인하여 그 반발은 더욱 컸음), 정종을 후원해 준 왕식렴을 비롯한 서경세력과의 정치적 관계를 고려하여 나온 것으로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정치 현실을 천도를 통해 타개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를 위해 풍수지리설을 신봉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서경천도를 위해 그는 많은 인력을 강제로 동원하여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사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왕권 강화와 거란군의 내침을 대비하기 위해 서경에 광군사 30만을 조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밖에도 즉위과정에서의 과오를 뉘우치고자 불교 진흥책을 적극 추진하여 이를 크게 장려하기도 하였습니다.

서경천도는 재위 4년만에 정종이 세상을 떠나 실현되지 못했습니다만, 정종의 이러한 여러 노력으로 혜종대에 크게 실추된 왕권이 어느정도 강화된 것은 사실입니다. 이는 정종의 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과 함께, 왕규와 같은 야심만만한 호족세력의 왕권에 대한 도전이 없었다는 점, 그리고 정종이 개경세력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쓰고 소신을 갖고 서경천도를 단행하였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정종의 이와 같은 노력들은 훗날 광종의 대대적인 개혁 작업의 밑바탕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종의 이런 노력들이 바로 왕권의 안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광종의 대대적인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작업이 구체화되기 전까지도 팽팽한 긴장 국면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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