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국가영역은 씨족 부락을 중심으로 한 부족적 연대감, 즉 혈연적 일체감에 의해 성립되었다. 따라서 이 시대의 군사사상 역시 부족의 수호와 보존 및 발전의 측면에서 검토될 수 밖에 없다.
<사기>에 의하면 B.C 193년 고조선의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왕위를 빼앗기게 되자 측근들을 거느리고 마한(馬韓)으로 내려가서 한왕(韓王)을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준왕이 거느렸다는 측근이란 고조선 사회를 구성하고 있던 여러 부족 중에서 그의 직계 부족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그가 마한 땅에서 국가를 세운 후 '조선왕'이라 칭하지 않고 '한왕'이라 한 것은 '조선'이라는 국가관념보다는 부족관념이 강했던 탓으로 보인다. 그러한 사실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건국신화에서 뚜렷해지고 있다.
주몽과 그를 따르는 한 부족이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국한 것이나, 온조로 대표되는 부족세력이 한강 유역으로 내려와 백제를 건국한 사실은 부족관념이 국가관념을 지배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연맹왕국 단계에 이르러서도 부족의 군대를 그대로 유지한 신라의 6부병(六部兵)의 존재는 군사적 측면에서 부족적인 색채가 농후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연맹왕권이 강화되어 중앙집권적 국가체제에 이르러서는 각 부족장들은 중앙귀족화 되었으며 혈연적 운명공동체적인 부족관념은 지연적 구성원인 국민으로서의 국가관념으로 확대되었다. 따라서 군사면에 있어서도 부족적 색채는 퇴색하고 국가적 관념이 생성되었다. 이러한 민족의식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설치된 한군현을 분쇄하는 과정에서 확고해진다.
고구려는 유리왕(琉璃王) 31(서기 12년)년 현도군을 공격한 이래 줄기차게 낙랑, 대방군 등 한군현을 공략함으로써 끝내는 한의 세력을 축출하는데 성공한다. 또한 위(魏)의 지배하에 있던 낙랑과 대방군이 삼한(三韓)을 침략하자 삼한이 연합하여 이에 대항했고, 위(魏)의 관구검( 丘儉)이 고구려를 공략하였을 때, 자국의 안전을 위해 중국 편에 섰던 부여가 멸망함에 이르러서는 그 지배층과 다수의 국민들이 고구려에 귀화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부여, 삼한사회에서 이미 민족의식이 성장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이와같은 민족의식의 맹아는 이후 민족사의 발전과 사상의 형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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