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않는 새 - 1
울지 않는 새 - 1
  • 이영철 소설가
  • 승인 2005.10.07 15: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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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 네 번…….

전화벨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여름날 풀숲에 숨은 풀벌레처럼 울어댔다. 하지만 태진에겐 그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받지 않으면 언제까지라도 울어댈 기세였다. 전화기 코드를 뽑아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심호흡을 한 다음,천천히 수화기를 들었다.

태진이 미처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저예요.”

잔뜩 억눌렸던 용수철이 튕겨져 나오듯 소영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터져나왔다.

“…… 어디야?”

긴장이 탁 풀렸다. 맞바람을 안은 팽팽하던 연실이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좋은 데요. 알아맞혀 보세요.”

수화기를 타고 킥킥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제가 분명 좋은 데라고 말했죠? 상상력을 발휘해 보세요.
30초의 여유를 줄 테니까.”
“…….”

태진은 소영의 장난기 어린 말투를 들으며 가슴이 뛰었다. 목소리만 듣고도 그의 남자는, 거북의 모가지가 나오듯 서서히 부풀어올랐다. 소영의 집에서 진하게 나눈 정사가 떠올랐다. 당장에라도 달려가 끌어안고 길고 진한 키스를 하고 싶었다.

“10초가 지났습니다.”

소영이가 시간을 재고 있었다.

진희는 긴장된 눈빛으로 대화를 듣다가, 소영이의 전화인 것을 눈치채고,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렸다. 그리고 담배를 피워 물고 연기를 허공에 길게 내뿜었다. 태진만의 느낌일까. 진희의 그런 뒷모습이 어쩐지 쓸쓸해보였다. 소영의 전화가 반가웠지만, 진희 앞에서 드러내놓고 표현할 수는 없었다.

“20초 경과.”

소영이는 재촉하고 있었다.

소영이 좋은 데라고 말하는 곳이 어딜까. 머리를 아무리 굴려봐도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그녀가 막바지에 달했다던 촬영이 끝났구나 하는 느낌은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만큼 생기가 돌았다.

“에이, 재미없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예요?”

어느 새 소영이 정한 30초가 경과한 모양이었다.

“어디야?”

태진은 재차 물었다.

“옆에 누가 있는 거예요?”

태진은 가슴이 뜨끔했다.

소영이가 마치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는 것처럼 날카롭게 말꼬리를 올렸기 때문이었다. 여자의 육감이 무섭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당하고 보니 몹시 당황스러웠다.

“아, 아냐.”

태진이 들어도 자신의 목소리는 자신이 없었다.

“그럼 왜 그렇게 목소리도 작고, 반가운 기색도 없이 긴장돼 있어요?”

소영이의 목소리가 오래 된 빵 껍질처럼 딱딱해졌다.

“집이야?”

태진은 의식적으로 큰 소리로 물었다.

진희는 비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굳어버린 석고상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진희가 피운 담배 연기가 아주 느리게 허공 속에 풀어지고 있었다. 번개가 일었다. 먹구름이 몰려와, 낮인데도 저녁처럼 어두웠다.

“욕실이에요. 오대산 촬영을 다 끝내고 막 돌아와 샤워하는 중이에요.”

태진도 어쩔 수 없는 수컷이었다.

수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욕실이라는 말에, 부풀어오르던 남자가 나무 토막처럼 뻣뻣해지며, 소영이의 육감적인 몸매가 눈에 선하게 떠올랐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와 잠자리를 함께 하기 전에는 여자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정상적인 남자들이 말하는 주기적인 섹스라는 것도 그의 생활에서는 먼 나라 이야기처럼 들렸었다.

그런데 소영이와 함께 밤을 세운 이후로 그는 변해있었다. 왜 소영이의 목소리만 들어도 자신의 남자가 무섭게 부풀어오르는지 알 수 없었다. 한때는 남녀간의 섹스를 아주 추한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잡한 피를 이어받은 것일까. 자신이 그토록 혐오하고 증오했던 그들의 불결한 피를.

“몹시 피곤하겠군.”
“올 수 있죠? 지금 출발하면 도착할 때쯤엔 샤워를 다 마칠 거예요.”

태진은 난감했다.

진희와 몇 시간 전에 이 회장을 납치해 왔다. 이제 겨우 그를 지하실에 가두어 놓았을 뿐이었다. 본격적인 게임은 이제부터였다. 그런데 진희를 혼자 남겨두고 소영이에게 간다는 것은 너무 미안한 일이었다.

태진은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곤란하고…… 내일 가면 안 될까?”
“…….”

소영이는 침묵했다.
태진은 최대한 그녀의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배려했다.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 나를 만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에요?”
“…….”

이번에는 태진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소영의 그 말은 차라리 고문에 가까웠다. 소영이와 통화하면서도 자꾸만 진희에게 눈길이 갔다. 진희는 자신이 쩔쩔매는 이유를 알고 있을 터였다. 두 사람의 통화를 듣고 있었으므로.

“내가 집으로 갈까요?”
“아, 아냐.”

태진은 소영의 말에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손까지 내저었다. 그건 안 될 말이었다. 소영이를 이 곳에 오게 해서는 절대 안 됐다.

“왜 그렇게 놀래요? 숨겨둔 애인이라도 있나?”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어서 곧 나가야 하거든.”

태진은 진땀이 났다. 천성적으로 거짓말은 체질에 맞지 않았다.

“이유를 달지 말고 지금 오세요.”
“그게 좀…….”
“내가 촬영 내내, 집으로 돌아오면서, 누구만을 생각했는지 알기나 해요?”
“…….”

알고말고. 태진은 소영이의 마음을 알고도 남았다. 자신이 소영이를 그토록 그리워했다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나 자신도 누군가에게 이토록 깊게 빠질 줄은 정말 몰랐
다고요.”

소영의 말은 거기에서 멈췄다.

두 사람은 수화기를 든 채 서로 할 말을 잃었다. 긴 침묵이 흘렀다. 태진은 갈등이 일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진희가 창에서 눈을 돌려 태진을 보았다. 그녀의 눈은 깨끗한 유리창처럼 투명해 감정의 파문을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너무나 많은 감정을 담고 있어서 무채색으로 보이는지도 몰랐다. 진희의 등 뒤로는 엄청난 폭우와 함께 번개가 일고 있었다. 유리창에 내리꽂히는 빗방울 때문에 창 밖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지금 올 거죠?”

태진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이었다.

“알았어. 지금 출발하지.”
“정말이죠? 그럼 기다리고 있을게요.”

태진은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때까지 진희는 그를 보고 있었다. 진희는 그런 태진의 모습을 마치 슬라이드 필름에 고스란히 담기라도 하듯, 두 눈동자가 태진의 얼굴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태진은 그녀의 시선, 아니 앵글에 사로잡힌 채 얼굴이 붉어졌다.

“다 들었지?”

태진은 진희가 앉은 소파의 턱에 걸터앉으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때까지도 진희는 태진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

진희는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가 되었다. 뭔가 말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 머릿 속만 복잡했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진희는 태진의 얼굴에서 시선을 거두어 다시 창 밖으로 향했다. 태진은 진희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그들은 그렇게 오래도록 침묵했다. 거센 바람에 덜컹거리는 창문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깰 뿐이었다.

“…… 가 봐야죠.”

그렇게 말하는 진희의 목소리는 초겨울 거리에 나뒹구는 가랑잎처럼 건조했다. 만지면 금방이라도 조각조각 부서질 듯이.

“미안해.”

진심이었다.

태진은 진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진희는 가만히 있었다. 다시 한 번 진희와 눈길이 마주쳤다. 순간, 잘못 본 것일까. 마주친 진희의 눈에 설핏 안개 같은 물기가 밀려드는 것을 보았다.

“가야죠.”

진희가 시선을 발로 떨어뜨리며 태진에게 잡힌 손을 뺐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뽀얗고 긴 목덜미가 오늘따라 왜 그리도 외로워 보이는지 알 수 없었다. 생각 같아서는 한번 꼭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일 뿐이었다.

“가능한한 빨리 올게.”

태진은 일어서는 진희의 뒷모습을 향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사실 그 말은 꼭 진희가 들으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진희에 대한 미안함을 그렇게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인지도 몰랐다. 소영이 집에 가면 오늘 밤에 쉽게 돌아올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한,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인지도 몰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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