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도 됐고, (작년, 한 해동안 여기저기서 받아) 챙겨 둔 도서상품권도 꽤나 되는 것 같아, 오랜만에 서점으로 나들이를 해 보았다. 그동안은 이런저런 핑계를 들며 독서에 관한 따끔한 충고들을 피해 나갔다고 하지만, 요즘처럼 무단휴직을 감행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상태에서는 독서만큼 유용한 일도 없는 듯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2002년 베스트셀러?
어떤 책들이 있을까? 작년에는 서점을 들른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오랜만에 하는 책 나들이는 나의 마음에 잔잔한 설레임과 동시에 기대감을 일으켰다. 그리고 찾은 한 대형서점. 크기만으로는 세계 1위(라고 들은 것 같다)라는 이 서점에서, 나의 설레임과 기대감은 금새 허탈함으로 바뀌고 말았다.
서점에 (특히, 미리 점 찍어 놓은 책이 없는 상태에서) 가게 되면, 아무래도 제일 먼저 발길이 닿는 곳은 신간서적 코너이기 마련이다. 이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새로 나온 책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러한 이유로 새로 나온 책들(중에서 좋은 책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베스트셀러로 등록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신간서적 코너 옆에는 항상 베스트셀러 코너가 마련되어 있기 마련이고.
그런데, 나의 설레임과 기대감이 바로 여기(베스트셀러 코너)서 무너지고 만 것이다. 출판물량으로만 치면 세계 10위 안에 든다는, 하루마다 쏟아내는 신간만 해도 수십종에 달한다는 우리나라의 출판계가, 작년 한 해 동안은 쉬었단 말인가? 아니면 작년에는 읽을 만한 책이 그리도 없었단 말인가? 2002년 연간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위 <아홉살 인생 (위기철 저)>, 2위 <봉순이 언니 (공지영 저)>, 3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박완서 저)> 등등. 분명 모두들 훌륭한 작가들의 책들이 순위 안에 있다. 하지만...<아홉살 인생>은 작년이 아닌, 재작년 초에 나왔던 책이 아닌가? 더욱이 <봉순이 언니>와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이미 4년 전에 나왔던 책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작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사랑(이라는 말보다는 관심?) 받은 책들이라고? 4위인 <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루르 저)>은 뮤지컬의 열풍에 힘입었다 치고, 5위를 차지한 <괭이부리말 아이들 (김중미)> 역시 재작년(좀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2000년도에 동화로 나왔다)에 나왔던 책이지 않은가. 계속해서 살펴 보자면, 6위에는 <연탄길 1 (이철환 저)>이 올라 와 있었고, 7위에는 <뇌(상) (베르나르 베르베르 저)>, 8위에는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 (유용주 저)>, 9위에는 <화 (틱낫한 저)>가 올라 와 있었으며, 그리고 마지막 10위에는 <모랫말 아이들 (황석영)>이 올라 와 있었다.
베스트셀러...는 만들어진다?
조금은 아이러니 할 수밖에 없었다. 유용주 시인의 산문집 <그러나 나는 살아가리라>도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미 2000년도에 나온 책을 보급판으로 내놓은 것이고, 황석영 선생님의 <모랫말 아이들> 역시 2001년 초에 나온 책이 아닌가. 결국 2002년 연간 베스트셀러에 올라 와 있는 책들 중에서, 정작 2002년에 출간 된 책은 <오페라의 유령>, <뇌(상)>, <화> 뿐(<연탄길 1>은 2000년도 나왔으나, <연탄길 2, 3>이 2002년에 출간되었다)이었으니...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 난 것일까? 내가 그동안 독서계의 흐름을 너무나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물론 모두들 너무나 좋은 책들이기에 이런 의문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이상할 수도 있지만, 이미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라 와 있는 책들 중) 대부분은 읽은 것이기에, 오랜만에 책 나들이에 나선 필자로서는 적잖이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풀렸다. 2002년도 연간 베스트셀러 목록 옆에 차지하고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는 (그 베스트셀러 목록에 있는) 책들을 보면서 말이다. 필자가 의문을 가졌던 책들은 하나 같이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방송국의 딱지를 두르고 있는 것이었다. <"MBC !느낌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 선정도서>라는, 마치 훈장이나 되는 듯한 이 딱지가 바로 베스트셀러로서의 자격증처럼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그 옆의 금주의 베스트셀러 코너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1위인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전우익 저)>를 비롯해, 2위인 <마당깊은 집 (김원일 저)>, 5위인 <삼국유사 (일연 저)>, 그리고 2002년 연간 1위를 차지한 <아홉살 인생>이 6위를 차지하며, 마찬가지로 ("!느낌표"의 선정도서라는) 딱지를 두르고 있었다.
교양을 지배한 미디어의 힘!
"문자를 읽지 못하는 것이 '문맹' 이라면,
책 읽지 않는 사회는 '책맹사회' !!
'책맹사회'는 '문맹사회' 보다 위험합니다." -
실로 거창한 문구였다.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큼 대단해 보였다. 자신들이 선정한 12권의 책을 모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려 놓았다는 것도 놀라웠고, 수많은 국민들이 이러한 캠페인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는 것 또한 놀라웠다. 그래서, 그리도 거창하게 "좋은 책 한권을 선정해 한 달 동안 모든 국민이 읽어 보자"는 취지를 내세우며, 국민들을 (지난 1년 동안) 그 12권의 책 속으로 몰아 넣었단 말인가?
그래, 그렇다면. 모든 국민들이 자신들이 선정한 12권을 책을 모두 읽으면 '책맹사회'를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인가? 전국 공공도서관 400개, 도서관 당 인구수 11만5천명이라는, OECD 가입 국가 중 최하위 수준을 벗어날 있다는 것인가? 정부 배정 공공기관 도서구입비가 하버드대학의 5분의 1 밖에 안 되는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모든 국민들이 지난 1년 동안 그 12권을 꼭 읽어야 했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건 어떻게 생각할까? 한국출판인회의가 매주 집계하는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가 선정 한 책들을 빼겠다는데, 그 이유를 알고는 있을까? 모든 국민들을 '책맹사회'로 부터 탈출시킬 수 있다는 그 책들을, 정작 출판계에서는 왜 외면을 하는지, 그 이유를 알고는 있을까?
그렇다면, 이건 또 무엇인가? 새해 벽두부터 도서관을 만들겠다고 국민들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건 또 무엇이란 말인가? 12권의 책 선정으로는 '책맹사회'를 벗어날 수 없음을 느꼈단 말인가? 그래서 이제는 아예 도서관을 지을 테니, (국민들이) 알아서 참여 하라는 것인가? 참으로 대단해 보였다. 아니 무섭기까지 했다. '국민들의 무식을, 교양 없음을 그냥 두고 볼 수 만은 없어서 (우리라도) 팔 걷어 붙이고 나서야 겠다'라는 모습에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친구를 선택하듯, 작가를 선택하라 - W.딜런
현명한 사람은 책을 가려 읽는다. 흙더미 속에서 옥석을 가려 내듯이, 고르고 골라 책을 읽는다. 딜런의 말처럼, 책을 선택하는 것은 친구를 삼듯이 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친구로 삼을 수 없듯, 모든 책을 인생의 이정표로 삼을 순 없는 일이다. 더욱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이정표만을 보고 간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 선정한 책들이 하나 같이 훌륭한 책들 임을 안다. 그리고 그 캠페인의 본 취지가 나쁘지 않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특정의 책을 국민들에게 획일적으로 적용시켜서는 안 될 일이다. 책은, 국민 모두가 지켜야 할 규범이 아니라, 작가의 사상(또는 독자의 사상)에 따라 선택 되어지는 자유로운 창작물인 것이다. 좀더 나은 책을 국민들이 읽기 원한다 해서, 일방적인 선택을 하게끔 압력(미디어의 힘은 이미 우리들 의식 속에서 하나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 한다면)을 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신문의 추천도서 코너에서, 출판협회의 권장도서 목록을 통해 얼마든지 좋은 책을 찾을 수 있다. 굳이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미디어까지 나서서 책을 콕 집어 줄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 작금의 상황이 방송을 탄 것들은 살고, 방송 못 탄 것들은 고전하는 현실이라는 것을 자각한다면, 가뜩이나 어려운 출판계를 구태여 갈라 놓을 필요는 없다는 것도 알았으면 한다.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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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실망이군요....인디안
표절이라는 느낌밖에 나질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