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왕조의 회복될 수 없는 업보(業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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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조의 회복될 수 없는 업보(業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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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폭군과 폐륜으로 낙인찍힌 「광해군(光海君)과 옹주묘」
‘영화’와 ‘드라마’ 등에 단골로 등장하는 비운(悲運)의 왕

삼촌인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世祖,1417년~1468년)’이 조카인 ‘단종(端宗,1441년~1457년)’의 왕위를 찬탈(簒奪)했는가 하면, 역으로 조카인 능양군(綾陽君, 인조(仁祖,1595~1649)은 삼촌인 광해군(光海君,1575년~1641년)에게서 반정을 통해 왕권을 차지하는 등 반인륜과 피를 동반한 야심과 퍠기(覇氣)로 권자에 올랐던 그들의 행적은 잊혀질 수 없는 불멸(不滅)의 역사이며, 이로 인한 패자(敗者)들 또한 몇 백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 주지의 사실이다.

△ 2012년 9월 개봉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리얼라이즈픽쳐스(주)

특히, 패자(敗者)로서 굴곡의 역사를 갖고 있는 광해군에 관해서는 영화 또는 드라마를 통해 우리 주위를 계속 멤돌고 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즉, 2012년에 개봉된 「광해(光海), 왕이 된 남자(감독 주창민, 주연 이병헌)」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광해군 일기에 남겨진 단 한 줄의 글귀인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자 말라 이르라’를 시작으로 왕위와 권력 다툼과 당쟁(黨爭)으로 혼란한 상황에서 기방의 취객들 사이에 걸쭉한 만담으로 인기를 끌던 하선을 광해군을 대신해 왕 노릇을 그린 팩션(faction) 사극이다.

이 영화에서 이병헌은 1인 2역을 맡아 하선과 광해를 연기하면서 하선을 통해 엄격한 궁궐생활에 적응해 나가는 왕의 일상을 카리스마가 강하면서 이상(理想)을 찾아가는 군주(君主)의 모습과 아울러 코믹함까지 보여 주고 있다.

△ 2017년 5월에 개봉된 영화 ‘대립군’ ⓒ리얼라이즈픽쳐스(주)

또한 2017년에 개봉한 「대립군(代立君, 감독 정윤철 주연 이정재,여진구)」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宣祖,1552년∼1608년)는 열여덟 살의 광해(여진구 분)에게 조정을 나눈 분조(分朝)를 맡기고 의주(義州)로 피난했으며, 광해는 선조대신 의병을 모아 강계(江界)로 떠난 일행은 남의 군역(軍役)을 대신해 먹고 사는 대립군을 호위병으로 대리고 길을 떠난다. 대립군의 수장(首長) 토우(이정재분)와 동료들은 이들을 무사히 데려다 주고 한 팔자 고치고자 했으나, 정체불명 자객(刺客)들의 습격, 왜적(倭敵) ‘고니시 유키나가(小西 行長)’ 군대의 추격과 산성에서의 고투(苦鬪)를 거쳐 임무를 완수했으나, 끝내 대립군들은 장렬히 전사한다는 팩션 영화이다.

△ 2015년 5월 방영된 MBC 드라마 ‘화정’ ⓒMBC,김종학프로덕션

이와 함께 2015년 MBC 월화 드라마 「화정(華政)(극본 김이영 연출 김상호외, 주연 이연희,차승원외)」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역사 속의 한 여인 즉, 광해군의 이복동생정명공주(貞明公主1603~1685)‘의 이야기로 가장 고귀한 신분인 공주로 태어났으나 권력투쟁의 와중에서 죽은 사람으로 위장한 채 삶을 이어나가야만 했던 여인, 강력한 조선을 꿈꾸었으나 끝내 태생(胎生)의 한계에 부딪힌 불운한 임금 광해, 반정을 통해 그토록 그리던 권좌에 오른 후 패도의 길을 걸었던 야심가 인조(仁祖), 제 아비의 손에 죽은 비운의 세자 소현(昭顯), 형을 지킬 수 없었던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왕이 된 효종(孝宗)의 면면을 보여준다.

또한 권력 투쟁의 한 가운데에서 인간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이이첨과 김자점, 막후에서 조용히 왕실을 흔들었던 상궁 김개시(金介屎)와 희대(稀代)의 악녀로 평가받는 인조의 후궁 소용 조씨 등이 등장하는 등 진정한 세상의 주인이란 대국(大國)도, 왕좌의 주인도, 권력자들도 아니며, 세상의 주인은 더 정의로운 세상, 더 가치 있는 신념을 위해 불의한 모든 것과 맞서 싸우고 있는 시대의 개인들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 2021년 5월에 방영된 MBN 드라마 ‘보쌈, 운명을 훔치다.’ ⓒMBN,제이에스픽쳐스외

이어 최근 MBN 드라마 ‘보쌈, 운명을 훔치다’(연출 권석장 PD 황혁, 주연 정일우,권유리외)는 시청율 10%대를 기록하며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이 드라마는 조선 중기 “여자는 한 번 시집가면 종신 불개(不改)해야 하며, 개가녀(改嫁女)의 자식은 벼슬을 시키지 않는다.‘는 과부재가금지법으로 인해 홀로된 과부를 깊은 밤에 보에 싸서 데려와 혼인하던 풍습인 보쌈(일명 약탈혼)이 성행하던 시절을 모티브로 전개된다.

좌의정 이이첨의 둘째 아들에게 시집간 광해군의 옹주(권유리 분)는 신혼 첫날밤 보쌈꾼 바우(정일우 분)에 의해 보쌈을 당하면서 임해군(臨海君) 아들 이대업(신현수 분)과의 밀고 당기는 삼각관계의 전개는 물론 바우를 만난 이후 옹주는 자신의 기품과 가식(假飾)으로 지금껏 살아 왔던 신분의 굴레를 벗어 놓고 평민으로의 삶으로 귀결(歸結)한다는 팩션 사극(史劇)이다. 이 드라마에서 광해군은 왕권을 위해 자식을 외면하는 군주의 냉혹(冷酷)함과 아비로서의 애틋한 부정(父情)이 동시에 투영(投影)되기도 했다.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영락공원묘지내 철책으로 가려진 광해군묘앞의 필자.ⓒdailiantv

역사에서 폭군(暴君)과 폐륜(廢倫)으로 낙인찍힌 광해군 혼(琿)은 선조(宣祖)와 공빈 김씨의 둘째 아들로 적자(嫡者)도 장자(長子)도 아닌 세자로서 부왕의 끊임없는 견제(牽制)를 받으면서도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열여덟살에 의주(義州)로 도피한 선조를 대신해 분조(分朝)를 이끌며 의병들을 격려하면서 군량미(軍糧米)를 모으는 등 민초들과 함께 저항하면서 리더쉽을 발휘 정국을 안정시켰으나, 부왕의 푸대접을 감수하였으며, 명(明)나라로부터 다섯 번이나 세자 책봉(冊封)을 거절당하는 수모를 겪는 등 세른네살의 늦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었다.

광해군은 당쟁(黨爭)을 억제하려다 대북파(大北派)의 책동으로 임해군(臨海君),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 영창대군(永昌大君)과 능창대군(綾昌大君), 전(佺)등을 역모(逆謀)로 몰아 죽이고, 자신보다 아홉 살 어린 계모 인목대비(仁穆大妃)는 폐서인(廢庶人)시켜 서궁(西宮)에 유폐시키는 등 소위 ‘폐모살제(廢母殺弟)’라는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범하는 등 왕권 사수에 극심한 노이로제를 보였을 뿐 아니라, 왕권을 위협할 만한 징후가 보이면 주저없이 친국(親鞫)을 통해 가차없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

△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 공원묘원내 협소한 공간에 모셔진 광해군묘,ⓒdailiantv

즉위 후, 왜란(倭亂)으로 전소된 경복궁(景福宮), 창덕궁(昌德宮) 등 궁궐 복원공사를 무리하게 추진하여 재정의 파탄(破綻)을 초래하기까지 했으며, 조선 시대 조세(租稅) 제도 가운데 각 지방의 특산품을 할당, 현물로 바치도록 한 공납(貢納)이 폐해가 커지자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고자 공납을 쌀로 내서 나라에서 필요한 물품을 사게하는 대동법(大同法)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하기도 했다. 그는 재위 15년동안 많은 서적을 편찬, 간행하였음은 물론 사고(史庫)를 정비하고 성지와 병기수리, 호패제(號牌制)를 실시하는 등 내치(內治)에도 성과를 거두었다.

대외적(對外的)으로는 국경방비와 외교에 주력하여 1619년 후금(후에 靑)의 누루하치가 심양(沈陽)을 공격하여 명(明)나라의 출병(出兵) 요구가 있을 때, 강홍립(姜弘立). 김경서(金景瑞)를 보내어 명군(明軍)을 원조하게 하면서 형세를 보아 향배(向背)를 정하라는 당부를 내리기도 했으며, 명나라 모문룡(毛文龍)이 패주하자 강홍립이 후금(後金)에 항복하여 본의 아닌 출병임을 해명함으로써 후금의 침략을 모면하는 등, 명과 후금 두 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양면 외교(外交)정책을 실시해 정국 안정을 꾀하기도 했다.

△ 광해군묘 오른쪽에 위치한 폐비 윤씨묘. 반정당한 현실을 부인했던 여걸로 알려졌다.ⓒdailiantv

1623년(광해군15년) 반정(反正)으로 등극한 인조(仁祖)는 대륙의 정세를 아랑곳하지 않고 ‘친명배금(親明拜金)’ 으로 일관하다 후금 태종(홍타이)에게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1636년 12월 중순부터 다음해 1월말까지 47일간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고투(苦鬪)하다 삼전도(三田渡,지금의 서울 송파 석천호수 부근)에서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씻을 수 없는 굴욕(屈辱)과 함께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워야 했으며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 후에 효종)과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했던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를 끌고가 처형했다. 또한 수 십만명의 민초들이 잡혀가 노예로 팔리고, 애써 귀국한 아녀자들에게는 ‘환향녀(還鄕女, 나중에는 화양년으로 변형)’라는 굴레까지 짊머지게했으며, 서인과 남인들이 정권쟁취에만 눈이 어두워 무능한 능양군(綾陽君)을 옹위(擁衛,) 반정에 의해 광해군을 폐위시킨 후, 변화하는 대륙의 정세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울어 가는 명(明)만을 추종하다 후금 태종에게 굴욕을 당하여 한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의 역사로 기록하게 됐다.

1623년(광해군15년) 음력 3월 13일 서인(西人)들이 일으킨 인조반정군에게 잡힌 광해군은 석어당(昔御堂)에서 인목대비앞에 무릎을 꿇었으며 강화도(江華島)를 거쳐 제주도에서 1647년 17년간의 유배(流配)생활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으며, 폐비 유씨(文成郡 柳씨)사이의 3형제 중 차남인 폐세자 질, 폐세자빈 박씨 등은 강화도에 유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나, 두 달 후 우여곡절 끝에 자살했으며, 폐비 유씨(1576~1623년)는 광해군이 폐위되자 창덕궁에 몰려든 반란군을 향해 “오늘의 거사(擧事)가 대의를 위한 것이오, 아니면 일신의 영달(榮達)을 위한 것이오?”라고 힐난했던 여걸(女傑)이였으나, 자신이 당한 현실이 믿기지 않았던 까닭에 화병을 얻어 유배생활 1년 7개월 만인 1624년 10월에 생을 마감했다.

△ 남양주농업기술센터 도로건너 공동묘지앞에 묻힌 광해군 옹주와 남편 합장묘로 돌보는 이가 없는지 잔디와 봉분이 많이 훼손되어 있다.ⓒdailiantv

또한 후궁 소의(昭儀) 윤씨( ? ~1623년,본명 尹永新)는 광해군의 승은(承恩)을 입고 숙의에 봉작(封爵)되었다가, 1619년(광해11년) 음력 6월 23일 옹주(翁主)를 낳았으며 옹주의 출생일은 태실이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리에서 발견됨으로써 알려졌다. 소의 윤씨는 인조반정군이 도성을 장악한 뒤 체포되어 이튿날 처형되었으며, 남양주시농업기술센터 건너편 공동묘지내 옹주의 묘 바로 위 언덕에 묻혀있다. 특히, MBN 인기 드라마 ‘보쌈’에서는 성인(成人)역(권유리)으로 화제를 낳았던 옹주는 실제 1619년 6월 태어나 부친인 광해군이 폐위 당시 다섯 살에 불과했으며, 외갓집에서 성장하다 25세때 사인(士人) 박징원(朴澂遠)과 결혼해 2남 3녀를 두었으며, 1664년(현종5년) 10월 45세 나이로 별세하는 등 옹주를 제외하고 광해군의 혈족들은 반정군에 의해 멸문(滅門)의 화를 입었다.

△ 초라한 광해군묘에 비할 수 없는 넓고 웅장한 모습으로 조성되어 사릉(思陵)으로 관리되고 있는 ‘6대 단종비 정순왕비릉’. ⓒdailiantv

역사에서 윤회(輪回)와 가정(假定)이 있을 수 없지만, 광해군이 후궁(後宮)에게서 태어 난 콤플렉스를 스스로 극복하고 임진왜란 당시 세자로서 총명함과 분조를 이끌었던 초심(初心)을 유지하며 탕평(蕩平)과 옳바른 개혁의 군주(君主) 즉, 이름그대로 ‘光海-빛나는 바다’의 한없는 아량(雅量)과 포용(包容)으로 선정(善政)을 펼쳐 추앙(推仰)을 받았다면, 산세 수려(秀麗)하고 전망좋은 길지(吉地)에서 다른 왕들과 같이 위용(偉容)을 갖춘 왕릉(王陵)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 왔겠지만, 지은 죄값으로 인해 궁벽(窮僻)한 산야의 공동묘지 한 켠, 철책에 둘러싸여 사방이 소나무로 갖힌 빈약한 묘소에 묻힌 것을 보면서, 좋던 싫던 사백여 년전 그들은 우리의 선조(先祖)였음에는 틀림이 없기에 차림은 없지만, 소주 한 잔을 제단에 올리면서 오호, 통재의 깊은 회한(悔恨)과 반면교사(反面敎師)의 의미와 함께 제주 귀양지에서의 쓸쓸함을 달랜 시(詩)를 곱씹으면서 발길을 되돌렸다.

 

“가고픈 마음에 봄 풀을 실컷 보았고, 나그네 꿈은 제주에서 자주 매었네

서울친지는 생사 소식조차 끊어지고 안개낀 강위 외로운 배에 누웠네“

광해군묘 표석음기(光海君墓表石陰記)

신사(辛巳) 7월 1일 병으로 제주(濟州)에서 죽었다. 왕께서 3일은 조회를 중단하도록 명하시고 日 5일을 소찬(素饌)을 보내고 특별히 예조당상(禮曹堂上) 낭청(郎廳)과 중사(中使)를 보내 호상(護喪)하게 하였다. 뒤에 또 각 도(道)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배행(陪行)하게 하고 제전(祭奠)을 점검하여 바로 잡도록 하였다. 예조(禮曹)에서 왕자군(王子君)의 예와 같이 장사 치르기를 청하였다. 왕께서 특별히 장생전(長生殿)의 관(棺) 한부(一部)를 내려 고쳐서 염(斂)을 하도록 하고 승지(承旨)를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고 특별히 명령을 내려 장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자식들이 제사를 받들 수 있게 밭과 집, 종들을 내렸다.

10월 4일 양주(楊州) 적성동(赤城洞)에 장사를 지냈는데 부인의 묘 오른쪽인 해좌(亥坐) 사향(巳向)의 언덕이었다. 예관(禮官)과 중사(中使)와 경기감사(京畿監司)가 처음부터 끝까지 호송(護喪)하고 장흥동(長興洞)의 사저(私邸)에 반혼(返魂)을 하고 아침저녁과 삭망(朔望), 사명일(四名日), 사중삭(四仲朔)의 제준(祭奠)에 관에서 제수를 보냈다.

[원문] 君墓表石陰記

辛巳七月初一日病卒於濟州 命輟朝三日 進素膳五日特遣禮曹堂上郎廳及中使護喪以來又令各道監司陪行檢飭祭奠禮曹請以王子君例一等禮葬 上特賜長生殿棺一部改棺易歛遣承旨致祭 特命隧葬以女子奉祀給其田宅藏穫十月初四日葬於楊州赤城洞夫人墓右亥坐巳向之原禮官中使京畿監司終始護喪返虞於長興洞私第朝夕朔望及四名日四仲朔祭奠官給其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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