짦은소설 / 악몽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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짦은소설 / 악몽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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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권/소설가

쏘나타를 몰고 편도 3차선 도로의 2차선으로 진행하던 나는 오른쪽 차선으로 진입하자마자 서서히 풋 브레이크를 밟았다.

오른발의 페달 유격에 의해 굴러가던 네 바퀴가 제동과 동시에 제자리에 서자 연석선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중년여인이 오른손을 들고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미지의 중년 여인에게로 차를 밀착시키며 접근한 것은 나의 선심을 퇴색하게 만든 중대한 실수였는지 모른다.
뒤따라 오는 차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룸미러를 통해 그것을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만 그 여인의 우아한 미모에 끌려 내 흐릿한 눈이 조금 뒤집혔던 것이다.

그 여인은 내 차 후방 50여 미터 지점에서 굴러오고 있는 모범택시를 향해 손을 든 것인데 나는 차량 왕래가 뜸한 곳이니까 같은 방향이면 좀 도와달라는 걸로 착각하고 순순히 차를 멈췄던 것이다.

택시는 멈추는 듯 하더니 재빠르게 차선을 바꿔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달아나는 택시 꽁무니를 흘끗 바라보면서 그제서야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어쨌든 문을 열어 주자, 여인의 얼굴에 떠돌던 회색구름은 어디론지 자취를 감추고 흰 구름이 두둥실 떠올랐다.

여인은 상다리가 엉거주춤 휘어지는 푸짐한 저녁을 준비할 일이 있어 시장을 보고 오는지 저자바구니가 대단했다.

"귀한 손님이 오시는 모양이죠?"
"네, 우리 집 양반이 이번 인사에서 승진을 했어요. 그래서 몇몇 친구 분들을 초청한다기에 준비 좀 하느라고요. 요즘 물가가 천정부지예요. 배추는 얼마나 비싼지 금치라는 말이 실감이 나요."

룸미러에 나타난 여인의 두툼한 입술이 여간 귀엽지 않았다.
"축하해야겠네요. 어디 근무하시는데요?"
"시청에 있어요."
"아, 좋은 데 있네요. 제 친구 놈도 하나 거기 있는데, 그 친구 별명이 짠돌입니다."
"........."

여인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었다.
"부인은 바깥 양반한테서 사랑 받겠습니다."
"그렇게 보여요?"
"도톰한 입술을 가진 여자 분들이 사랑스럽고 귀엽잖아요."
"그런가요...?"

여인의 얼굴에 슬그머니 자만이 스며들고 있었다.
차가 갑천을 끼고있는 월평동 신흥 주택지로 들어서자, 여인은 내려달라며 짐을 챙기고 있었다.

그런데 부인은 내리자마자 문을 거칠게 닫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화를 내는 게 아닌가? 문 닫히는 소리가 천둥이었다.
"아저씨, 사실은 아까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들었던 것인데 이 차가 서는 바람에 시간은 없고 해서 그냥 탔지만 앞으로 이런 짓은 하지 마세요. 점잖게 생긴 분께서 자가용 영업행위나 해먹고....그러면 되겠어요?"

여인의 예쁘기만 하던 도톰한 입술이 갑자기 선거유세장의 나팔이 되더니, 1397년에 세상에 태어나 1450년까지 지구에 머무르다가 어느 날 홀연히 떠난 이조 제 4대 임금 세종대왕의 초상화가 새겨진 푸른 지폐 한 장이 열린 차창으로 날아들었다.

"부우~인! 그게 아니라....."

내가 손을 흔들어 그게 아니라고 말하기도 전에 그 여인은 쳐다보기도 싫다는 듯이 벌써 저만치 접어든 골목에서 어디론지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자가용 영업행위나 해먹고...?

이런 치욕에 가까운 모욕을 당하다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좋은 일 한답시고 한 것이 파렴치한 놈이 되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날아 들어온 지폐를 확 구겨버렸다.

"존경하는 마음으로 돈을 잘 간수해야 합니다. 돈을 찍어내는데 드는 비용도 엄청납니다. 하루에 사망하는 돈도 많지만 새로 태어나는 돈도 많습니다."
한국은행 총재 나으리께서 바로 내 눈앞에 버티고 서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총재 말이 맞소. 구구절절이 설득력이 있고......"

나는 환상을 금방 떨쳐버리고는 사무실로 되돌아 왔다. 재수 옴 붙었다고 투덜대면서.
"소장님, 벌써 오세요?"
경리직원 미스 진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았다.
"가다가 중지하면 아니 간만 못하니라."
"웬, 옛 시조예요."

내가 저간의 사정을 얘기하자 미스 진이 나를 위로한답시고 양념까지 쳤다.
"요즘 세상이 제 세상이 아닌데 제 정신 가진 사람이 어딨어요."
"그럼 나도 그 축에 끼겠네."
"그냥 해 본 소리예요."
미스 진이 하트 무늬가 엷게 새겨진 메모지를 가져왔다. 메모지에는 D보험회사 부장으로 있는 동창회장 오달웅의 전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고등학교 동창생 박칠구의 승진 자축파티가 있으니 꼭 참석해 달라는. 이 참에 그 짠돌이 마누라 좀 보자꾸나. 헤헤, 설레이지 에헴......
"이 짜식, 짠돌이가 어쩐 일이야 망가진다고 망치도 안 빌려 주는 놈인데."

시청에 근무하는 박칠구는 결혼 이후, 한 번도 친구들을 자기 집에 초대한 적이 없었다. 짠맛을 내는 무색의 천연 광물성 식품 같은 놈이었다. 산지기 눈 봐라 도끼밥을 남 줄까란 속담의 출전에 가까운 친구였다.

게다가 별명도 다섯 손가락 만큼이나 많았다. <구두쇠>를 엄지에 넣는다면 검지에 <소금>, 장지엔 <자린고비>, 무명지에<스쿠리지 영감>, 끝으로 소지에는 <짠돌이>가 자리매김 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생에 한 번 있는 결혼청첩장을 보내면서도 구두쇠 기질을 십분 발휘한 위인이었다.
혼잡스러우니 될 수 있으면 결혼식장에는 참석하지 말고 인편이나 온라인으로 축의금만 보내라고 한 놈도 그 위인이었다.

국수 한 그릇 값도 값이지만 여러 사람이 바라보면 신부 얼굴이 닳으니 제발 참석을 안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친구들은 박칠구의 마누라 얼굴을 모르는 형편이었다. 마당발에 속하는 나도 박칠구의 마누라 얼굴을 알 리가 없었다.

"네 마누라 얼굴 한번 구경 시켜줄 수 없니, 한번만 보면 오늘 접시물에 빠져 죽어도 원이 없겠다."

언젠가 내가 술 한잔 걸친 기분에 입바람을 불었더니 그의 대답은 엉뚱한 울림으로 내 고막을 때렸다.
"매우 이뻐서 나 혼자만 바라보면서 살려고 해. 안되니까 일찌감치 그 뭐지 음, 냉수 마시고 속차려!"

"그럼 집이라도 가르쳐 주면 안되겠니. 혹시 아니. 네 생일 때나 네 마누라 생일 때 선물로 아나보라 한 트럭 사 가지고 갈지."

"너 이 놈 악담하지 마! 너도 사내야. 이 세상 남자들을 보면 파렴치한 늑대들 같애. 수컷이 발동하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 너도 알잖아. 어떻게 친구를 믿니. 특히 너 같이 이목구비가 수려하고 잘생긴 놈은 나에게 있어선 사실은 위협적인 존재야!"

바늘로 눈알을 콕콕 찔러도 태연하게 앉아있을 지독한 놈이었다.
전화가 따르릉 하고 방정을 떨더니 미스 진의 목소리가 노래처럼 날아왔다.
"소장님 저~언화 왔습니다."

주근깨 투성이의 노처녀 주제에 뭐가 그렇게 신이 나는 건지...? 이른 바, 엑스세대 젊은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근깨는 출세의 샘이라며 미국 여배우 미아 패로우를 발로 차고 그녀의 양녀 한국계 처녀 순이 프레빈과 결혼한 미국의 영화감독 우디 앨런을 저주한다는 미스 진이었다.

"나도 서태지를 좋아해. 그리고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도 자신 있게 부를 수 있어!"
나는 수화기를 잡으며 미스 진을 바라보았다.
"전화나 받으세요."

나는 수화기를 귀에 대자마자 스트레이트로 뽑았다.
"네, 인력은행입니다."
"상담 좀 하려고 그럽니다. 40대의 신체 건강한 대한민국 남잔데요. 막노동 좀 해볼까 해서요. 우리 같은 사람도 일 좀 할 수 있을까요?"

좀 장난기가 있는 듯한 전화였지만 발음은 정확했다.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아침 6시까지 나오시면 됩니다. 늦어도 6시 30분까지는 나오셔야 됩니다."
"그런데 일당은 얼마씩이죠?"
"일당은 5만원입니다."

"알선비도 내야 되잖아요?"
"소개비로 10%를 떼고 있습니다. 5만원 일당에 5천원을 떼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이 뗍니까? 내가 알기로는 2% 이상 못 떼게 돼 있는 것으로 아는데..."
"우리도 먹고 살아야지요. 사무실 관리비다 뭐다......"

이 말이 내 입에서 떨어지기가 바쁘게 귀에서 불이 번쩍거렸다. 천둥 번개를 동반하고 있었다.
"야, 이 나쁜 놈아! 그건 노동력 착취잖아. 불쌍한 막노동꾼들이 피땀 흘려 번 돈을 그렇게 많이 떼면 되겠어? 그래서 잘 먹고 잘 살아지데? 그 착취한 돈으로 호의호식하고, 에라, 이 망할 도적놈아......"

차알칵! 오늘따라 이상했다. 아까는 자가용영업을 했다고 욕을 얻어먹더니 이건 또 뭔가?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간 밤의 뒤숭숭한 꿈자리가 떠올랐다.
내가 공사판의 막노동꾼이 되어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충북 옥천 인터체인지 부근에서 포크레인으로 흄관 매설공사를 하다가 포크레인 바구니에 찍히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아악!"
비명과 함께 꿈이 쪼개졌다. 현실이 아니었던 것이다.일단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오달웅이 전화로 불러준 메모 쪽지를 보고 박칠구네 집을 찾아가기 위해 차를 몰았다.
러시아워라 사람도 붐비고 차도 혼잡했다. 길이 막힐 것이 뻔했다. 오후 6시 30분까지 오라고 했으나 계속 네거리 등 신호기에 녹색등만 연결되고 또 켜진다면 빠듯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내 계산이었다. 내가 월평동 계룡건설 앞 박칠구네 집에 도착했을 때는 30여 분이 지난 7시를 조금 이탈해 있었다.
열린 문 현관에 들어서자 이미 술판이 질펀하게 벌어져 있었다.

시내 중앙통에서 작은 마누라 얻어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박북식이 침을 튀겨가면서 언거번거 수다를 떨고 있고 한림대학 김 교수는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가 끝난 판이었고, 왈패건설 대표로 있는 윤왈패가 김하정의 <금산 아가씨>를 뽑아내고 있었다.

"어, 우리 소장님, 이제 오시는구먼. 노동력 착취해서 돈 좀 벌었다며!"
박칠구의 얼굴도 달아올라 칠색 무지개가 선명했다.
"이, XX놈아 입 확 찢어 놓기 전에......"
나는 열두 명이 모인 친구들 틈 빈자리에 앉자마자 숟가락부터 찾았다.
"여어보! 우리 마동필 소장님이 오셨어. 숟가락하고 에, 또 밥하고 국하고......"

"오늘에야 네 마누라 얼굴 좀 보겠구나!"
"이젠 한물 갔어. 지는 해를 붙들 수는 없더군. 40대 중년 여인이 됐으니......"
그때, 밥이랑 국이랑을 하얀 은쟁반 위에 받쳐들고 박칠구의 부인이 나타났다.
"참, 인사드려. 인력은행 소장님이신 마동필이야. 왜 저, 당신 좋아한다는 <괴로운 사라>던가 뭔가, 야한 얘기 써 가지고 주머니 가득 채운 마O수 시인 있지. 다 같은 일가들이라구."

나는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세요. 마동필입니다."
내가 굽혔던 허리를 세우며 고개를 들었을 때 아니! 내 몫으로 가져온 밥과 국이 왈칵 쏟아지면서, 내 발등을 고스란히 적셨다. 내 눈이 두 배로 커졌다.

아까 골목길로 접어들던 어떤 여인의 뒷모습이 오버 랩 되면서 부엌으로 동동동동 사라졌다.
"앞으로 이런 짓은 하지 마세요. 점잖게 생긴 분께서 자가용 영업행위나 해 먹고.!"

가시 돋친 모욕에 가까운 그 폭언이 비수처럼 내 가슴에 다시 한 번 내리꽂히면서 지난 밤의 꿈자리가 다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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