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병리현상의 극점, 자살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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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병리현상의 극점, 자살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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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챤의 자살 무엇이 문제인가

1. 크리스챤의 자살, 충동인가 신드롬인가

그것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잠시 뒤를 돌아보는 사이에 어린아이가 없어져 버리듯 어제까지 지성과 미모를 자랑하던 빛나는 얼굴들이 사라져 버렸다. 1996년 1월에는 가수 서지원이 유서를 남긴 채 약물과다복용으로 숨졌다.

이후 같은 달 6일에는 가수 김광석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 2005년 2월에는 영화배우 이은주 양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올해 1월에는 가수 유니가 그리고 2월에는 정다빈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부인과 자식을 외국에 유학을 보내 놓고 외로움에 못 이겨 자살한 기러기 아빠들도 신문지상을 장식했다.

먼저 떠난 이들의 공통점은 대화의 단절에 있다. 자신의 위기에 대하여 속내를 털어놓을 상대가 없었다는 점이다. 외로움이 자살이라는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간 것인가?

자살자의 유언에서는 자살자가 죽음을 선택하게 된 이유가 선명히 나타나 있다. 그것은 줄 것이 없다. 그래서 죽음을 선택한다는 죽음에 대한 동기이다. 자신이 죽으려고 하는데 왜 죽어야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내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줄 것이 없는 무익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을 택했다는 유서가 발견되고 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근래에 들어 크리스챤들의 자살률도 크게 늘어났다. 기독교는 자살을 악으로 규정하고 있으며 절대적 가치관인 구원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는 악한 행위로, 있어서는 안 될 행동으로 강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의 크리스챤에게서 자살률이 늘고 있다. 사회적 병리현상 중 가장 높은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자살현상은 충동이 되었든 신드롬이 되었든 반드시 막아내야만 할 중차대한 일이다.

일찍이 19세기의 실존주의 신학자이며 철학자인 키에르케골(1813.5.5-1855.11.11)은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는데 그 병은 절망이라고 했다. 절망에 도달하게 되면 죽음의 유혹에서 헤어 나올 수가 없다고 말했다.

허무주의자 쇼펜하우어(1788년 2월 22일 (독일) - 1860년 9월 21일)가 자살예찬론을 펼치며 “신은 없다. 자살은 자선이며, 선이다. 어서 죽자”고 했다.

BC 6세기 그리스의 시인 테오그니스는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고, 빛나는 태양을 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좋은 일이다. 그러나 태어난 바에는 서둘러 죽음의 신(神)의 문에 이르는 것이 가장 좋은 일이다…”라고 노래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매우 특징적인 양태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고린도전후서와 로마서를 통해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너무 대망한 나머지 현세와 내세를 극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도바울에 의하면 육체와 영혼은 극단적으로 대립한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두 개의 실재(實在)가 극단적으로 대립되면서 서로 충돌하며 갈등을 유발한다. 사도바울의 이원론적(二元論的) 대비신앙은 필연적으로 페시미즘에 귀착된다. 지상(地上)에서의 육체적 생존 자체가 악이고 더럽혀진 것이라면, 인간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구제받을 수 없다는 결론까지 도달되고 난 뒤에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말해진다.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기뻐하며 감성으로 믿었던 사람들이 육체적 난관에 봉착했을 때, 나는 구제불능이며 죽어야 한다는 자신의 결론에 도달했을 때에 또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요청되고 있느냐에서 갈린다.

대개의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때에 자신을 염치없는 자, 벌레같은 자, 뻔뻔하고 악한 존재로 몰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개의 그리스도인은 이 문제에서 자신을 끝까지 낮추고 비하하면서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나를 도우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나를 살리소서.”라는 신앙적 믿음의 행위(기도)를 통해 위기 혹은 절망에서 탈출한다. 그러나 소수자는 자살을 선택하고 만다.

사도바울의 위대한 신앙은 그가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영(성령)에 사로잡혀 살았다는 점에서 극점을 이룬다. 사도는 꿈 혹은 환상을 통해 본 삼층천에 입성하기 위해 순교하기로 결단하고 죽을 자리만 골라 찾아 다녔다.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육체적 본능이 불길같이 타오름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결혼하지 않았고 여성을 취하지 않았다.

설교와 성경공부를 통해 사도바울의 신앙과 믿음, 그리고 사도의 교훈을 교훈받을 때, 주목해야 할 바는 사도의 당시와 현실과의 괴리이다. 이 괴리를 현실적으로 접근하지 않거나 풀어 써 주지 않는다면 감성을 통한 순수성에서 “사도바울처럼 살아야겠다”, “나도 사도바울처럼 순교자가 되어야겠다”는 가치관의 결단이 나오게 되어 있다.

목사나 성경공부의 교수자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집회나 성경공부에서 사도바울의 글이나 사상을 전할 때, 간과하는 가장 중대한 실수가 있다. 그것은 “나는 그렇게 살지 못했으나 너희는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묵시적인 기대감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가장 강력하게 사도 바울을 통하여 교훈되는 강령이 있다. 그것은 “주께서 허락 하시면” 이다. 주께서 허락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40에 하나 감한 매를 세 번이나 맞고 태장을 다섯 번이나 맞고도 살아남았다. 맞은 매로 인해 어그장 걸음을 걸으며 시체를 버리는 곳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왔다. 자신은 그토록 순교를 열망했고 또 이번에야 말로 순교하는구나 하고는 각오를 단단히 했음에도 순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도 바울의 순교는 먼 날에 가서야 이루어졌다. 가이사 앞에 서게 된 이후에 곧 풀려날 줄 알고 있던 로마 시민들의 상상을 뒤엎고 어느 날 갑자기 찾아 왔다. 사도는 이렇게 말씀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7,8)

적어도 크리스챤이라면 주께서 허락하실 때까지, 그 어떤 것이라도 그 모든 것이라도 인내할 수 있어야 하며 참아낼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크리스챤이라면 국가와 사회에 누를 끼치며 자살로 끝을 내서는 안 된다. 살아 있는 것이 죽어 없어지는 것 보다 오히려 더 누를 끼친다고 할지라도 주께서 죽음을 허하시고 생명을 취하여 가실 때까지는 비참하게라도 살아 있어야 한다.

시편 38편에 보면, 다윗이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블레셋 왕인 아기스 앞에서 침을 흘리며 미친 체 하다가 결국 쫓겨나게 되었고 생명을 보존했다. 다윗은 이때를 가리켜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 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케 하셨도다” (시 40:2) 다윗은 이것이 새 노래로 하나님께 올릴 찬송의 제목이 되었다고 말한다.

극적인 반전이다. 영웅에게 있어 과거의 무너짐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 무너짐을 딛고 일어서서 영웅이 되었다는 사실이 극점과 극점을 하나의 직선으로 연결해 버린 위대한 영웅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다윗은 이 날을 위하여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시 40:1)라고 말한다.

위대한 영웅이 버러지만도 못한 처참한 몰골로 쫓기면서 오죽하면 원수에게 가서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며 빌붙어 있었겠나. 그의 변절을 바라본 유대의 지도자들, 심지어 그의 원수인 사울왕마저 다윗을 죽은 개에 비유했다.

가장 비참한 계곡에 떨어져 있는, 그래서 죽음을 생각하는 모든 이들이여 이 점을 생각하라. 인격이 함몰되고 경제는 파탄 났으며 아무도 그대를 사랑하는 이가 없고 오히려 죽어주기를 바라는 사람들로 세상이 가득 한 것 같아도 이 점을 생각하라. 극점과 극점을 하나의 직선으로 이를 수 있는 영웅은 바로 그대라는 사실이요 그것이 달성될 때까지 그대는 죽음을 허락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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